< -- 646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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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선지자가 묻힌 곳이 교단이 지은 지하실 위에 있다? 거 재밌는 일이야.”
“이 위에는 신전이 있었고, 여기는 마구스 개인의 소장품들을 은닉하던 수장고였습니다. 이후 민병대가 점령하면서 신전은 불태워버리고 일대를 묘지로 조성한 겁니다. 지하실은 나름대로 활용가치가 있어서 수장고로 쓰고 있습니다.”
이트닌이 카렐에게 랜턴을 내밀었다.
“여기는 스코프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가디언의 적외선 시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걸로…….”
“알아. 하지만 내게 랜턴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카렐은 마치 자기 집에 들어서듯 익숙한 걸음으로 어둠 속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설마 폐하께서도…….”
“나도?”
카렐이 이트닌을 휙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지?”
“폐하께도 이곳이 ‘물결이 흘러가듯’ 보이십니까?”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제 어머니를 모시고 지하 카타콤베 구경이나 가 봐야겠군.”
지겨울 정도로 긴 계단을 한참 내려간 후, 그 끝에 있는 어두운 터널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끝에서 이어지는 터널은 마치 소규모 광산 같은 좁고 가파른 구멍이었다. 황궁 지하의 카타콤베처럼 따로 마감이 되어 있지 않다보니 어느 곳은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어느 곳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오리걸음을 해야 할 정도로 좁은 구멍도 있었다.
“이런 고약한 곳으로 어떻게 수장품들을 옮겼지?”
“정확히는 옮겼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원래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고 5백 점 정도만이 나중에 새로 들여온 것들입니다. 조심해야 할 물건들도 없고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들어와서 옮기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허, 대신관의 사적인 소장품들이라면 가치가 상당한 물건들도 많이 나왔겠는데? 그런데 ‘13선지자의 묘 지하’ 꺼내 왔다고 기록된 황실 소장품은 내 별로 본 기억이 없는데? 다 어디 간 거지?”
카렐의 당연한 물음에 이트닌이 급히 해명했다.
“민병대가 이곳에 진주했을 때는 이미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물건들은 그 전에 누군가 미리 꺼내어간 것 같습니다.”
소장품이 얼마 없었다는 대답에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이트닌의 말대로, 출입구의 꼴을 보아서는 물건을 꺼내어가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듯 싶었다.
복도를 나아가던 카렐은 3갈래로 갈라지는 길에서 갑자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뒤따르던 이트닌이 카렐을 얼른 붙들었다.
“제가 안내할 테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잘못 가시면 큰일납니다. 내려가는 도중에 갈림길이 12개나 있는데 그 중 하나라도 잘못 들면 끔찍한 함정이 있습니다.”
“알아. 그럴 것 같군.”
“예?”
“내겐 다르게 보이니까. 오른쪽 길이지?”
카렐은 ‘흐름’이 이어지는 구멍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 외의 2개 길은 그저 어두운 보통 구멍이 안쪽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맞습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트닌을 뒤로하고 카렐이 계속 앞장서 나아가며 물었다.
“보안을 위해 옛 장치들을 일부러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건가? 12군데나 되는 3갈래길이 있다면 산술적인 통과 확률은 531,441분의 1이던가?”
“지금 막 계산하신 겁니까?”
이트닌의 황당하다는 표정에 카렐이 능청맞게 대답했다.
“그냥 찍은 거야.”
“531,441분의 1의 확률로요?”
카렐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이트닌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12번째 마지막 갈래길은 3갈래가 아니고 12갈래입니다.”
“허, 그럼 거기에서 또 4분의 1 확률이군.”
두 번째 갈래길에서 카렐은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이트닌 역시 군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수장고까지 길을 모두 아는 사람이 몇이지?”
“저와 관장님 2사람뿐입니다.”
이트닌은 길 한 번 물어보지 않고 계속 갈림길을 통과하는 황제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걸어 내려간 카렐은 조금 전 이트닌이 말했던, 마지막 12갈래길을 마주하며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뒤따르던 이트닌이 랜턴으로 오른쪽을 비췄다.
“오른쪽에서 2번째 구멍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았다.”
이트닌의 도움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카렐은 이번에는 제일 왼쪽의 제법 큰 구멍을 가리켰다.
“저곳은?”
“예? 저기는 함정입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꽤 깊은 낭떠러지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길은 모두 한 구멍만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이번만은 벽 특유의 희미한 광채가 2군데 모두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이트닌이 말한 구멍을 통해 1, 2분 정도 걸었을까, 카렐은 갑자기 넓어진 공간을 휙 올려보았다. 바로 그의 목적지인 ‘수장고’였다.
“생각보다 크진 않군.”
작은 규모에 내심 실망한 카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사실 위에 있는 박물관 자체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이곳 수장고 역시 고작해야 그 절반 규모의 음산한 홀 하나가 전부였다. 규모만으로 보면 일개 귀족가인 페로 관의 보관소보다도 도리어 작았다.
“어렵게 만들어 놓은 출입 통로가 무색하군.”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선반에 다가갔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방을 빽빽하게 채운 선반들에 보관된 물건은 제법 많았다. 하지만 이트닌의 말대로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오래된 코메트와 헤네티 군복, 사무용품, 일상용품과 고서적들, 별로 값도 나가지 않아 보이는 장식품, 이젠 고철이 된 정체불명의 기계들이 대부분이었고 정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 잡동사니 더미에서 그 작은 캡슐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들어오는 길이 워낙 고약하고 관리도 어려워서 새 수장품은 가능한 들여오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온 물품들은 참배탑 지하에 있는 납골당을 개조해서 두고 있습니다.”
“교단 연구소에서 가져온 수정란 캡슐이 여기 있을 텐데.”
“잡다한 물건이 워낙 많아서…….”
이트닌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이 많은 수장품들 각각의 위치를 그가 다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애가 타기 시작한 카렐이 그를 재촉했다.
“총 8,304개라고 하니까 어딘가에 담아서 정리해 놓았을 거다. 캡슐이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니까 다 합쳐도 부피가 아주 크지는 않겠지. 들여온 이후에 누군가 열고 손댄 흔적이 있을 텐데.”
“그맘때 것이라면 저 안쪽에 있을 겁니다.”
작은 몸집의 이트닌이 깊숙한 선반 사이로 파고들고는 어수선한 박스 몇 개를 넘어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카렐도 그를 따라가려 했지만 워낙에 떡 벌어진 상체와 두툼한 털옷 때문에 선반 사이에서 몸이 딱 걸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바닥에 고정된 선반 다리를 내려다보며 카렐이 욕을 내뱉었다. 안까지 들어갈 수 없는 카렐로서는 안에서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는 이트닌의 등짝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카렐이 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락도 되지 않는 이런 곳에 오래 머무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혹시 이거 말씀하십니까?”
한참을 전전긍긍하던 카렐은 이트닌의 목소리에 귀가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다른 건 손댄 흔적이 없는데 이것만 나중에 손댄 흔적이 있습니다.”
이트닌이 끙끙대며 내민 건 웬만한 어린애 키만한 크고 넓적한 모양에 반 뼘 정도 두께의, 마치 거대한 책 같은 나무 상자였다.
“이런 상자가 총 8개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보다 무거워서……끄응.”
작은 체격의 이트닌이 낑낑대며 상자 한쪽을 카렐 쪽으로 밀었다.
카렐이 상자를 한 팔로 확 받아서 뚜껑부터 살폈다. 뚜껑의 봉인은 이미 찢어진 건국 무렵의 것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새로 붙은 것에는 세나우스 2세 시대의 날짜가 새겨져 있었지만 그나마도 뜯겨 있었다.
“두 번째입니다. 봉인 날짜로 봐서 이건 뜯은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상자를 받아든 카렐은 이번에도 뚜껑부터 살폈다. 처음 내놓은 것과는 달리 이번 것은 뚜껑이 완전히 봉인되어 있었지만 첫 번째 것보다 훨씬 이전, 제국의 건국 무렵의 것이었다. 카렐은 이트닌이 내민 나머지 상자들도 차례차례 받아 그 위에 쌓았다.
“바로 이놈이군.”
첫 번째로 받았던 상자를 앞에 놓고 카렐이 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 번째 봉인을 뜯어내고 뚜껑을 조심조심 열었다.
“흐음.”
카렐의 눈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렌 박사의 사진에서 본 일이 있는 새끼손가락만한 은회색의 낯선 캡슐들이 각각의 고유번호가 있는 칸에 차례대로 꽂혀 있었다. 바로 그가 찾던 캡슐들이 틀림없었다.
“상자 하나에 1천 개 정도 들었나?”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많은 것들을 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카렐은 급히 뚜껑을 닫고 8개의 상자 모두를 밧줄로 꽁꽁 묶어 등에 번쩍 짊어졌다. 부피도 어마어마한데다가 무게만으로 치면 건장한 어른 체중보다 많이 나갔지만 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당황한 이트닌이 그의 앞을 막으려 했다.
“가지고 나가시려고요? 그건 여기 소장품…….”
“관장한테는 동맹군들이 협박해서 빼앗아갔다고 해. 다 확인하기는 시간이 없어서 그래. 뒷일은 내가 다 책임지겠네. 물론 자네의 신상도 말이야. 기왕이면 나와 같이 가세. 자네 같이 민병대의 옛 역사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진심일세. 내 크게 보답하지.”
카렐은 난처해하는 이트닌의 어깨를 탁탁 쳐 주고는 마치 자기 물건 가져가듯 뻔뻔스럽게 앞장서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박물관 도둑’과 한패거리가 되어버린 이트닌도 하는 수 없다는 듯 그의 뒤를 따랐다.
펜지켄트 시를 생각보다 손쉽게 차지했던 동맹군 기습부대가 근위대의 이상동향을 눈치 챈 건 황제가 박물관으로 가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판 산에 잠입해 있던 동맹군 정찰가디언들은 주변 일대, 눈밭 지평선을 새카맣게 물들이고 다가오는 남부보병대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소식에 그 누구보다 경악한 건 사령관 베아트릭스였다. 지금 황제는 외곽의 위험지대에 얼마 되지 않는 에키트 족들과 나가 있는 상태였고, 자칫하면 적진에 고립되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길래 말을 좀 들으시라니까!”
보고를 접한 베아트릭스가 머리털을 움켜쥐며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회의실에 모인 공략군 지휘부 중 침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대장군이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짐작한 사람은 가디언 시로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로가 베아트릭스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시길래요?”
“13선지자의 묘.”
순간 창백해진 시로가 얼른 지도를 돌아보았다. 도시 남동쪽 외곽에 자리잡은 그곳은 지금 동맹군의 주 방어선에서 한참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시로가 급히 할룩스를 꺼내들고 카렐의 호출번호를 눌렀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베아트릭스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것을 눈치챘지만 짐짓 태연하게 덧붙였다.
“다른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누가 같이 갔습니까?”
“에키트 족 경호대장하고……에, 에스더인가 하는…….”
시로는 베아트릭스가 입술을 꽉 깨물며 옆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적이 당황했다.
“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장군님께선 적의 반격을 막는 일에만 주력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쓸데없이 감정을 개입시켜선 곤란하겠지. 명색이 사령관이 말이야. 나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 폐하를 모셔오는 일은 그대가 맡아주게나.”
베아트릭스는 잠깐이나마 감정에 휩쓸렸던 스스로가 민망해졌는지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석상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차피 적의 반격은 예상했었으니 방어는 계획대로 실시한다.”
베아트릭스가 지도상의 위치에 각 부대를 나타내는 깃발을 차례대로 올려놓았다.
“지금 남부보병대는 외곽을 차단하고, 근위대와 남부기병대가 시가지로 진입해 우리와 교전을 벌이려는 것으로 보인다. 1차 방어선은 북쪽으로는 판산, 남쪽으로는 펜지켄트 강이다. 집중적인 방어가 필요한 취약지점은 서쪽의 항구, 그리고 판 산과 강이 교차하는 평지인 남동쪽…….”
베아트릭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바로 남동쪽 외곽에 13선지자의 묘가 있었다. 이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부보병대 연대장이 깃발을 도시 안쪽으로 죽 당겨놓았다.
“현재 남동쪽 주 방어선은 13선지자의 묘로 가는 길목에 있는 터미널이 있는 마을입니다만 적군의 규모를 고려해보면 방어가 어렵습니다. 시가지를 향해 북서쪽으로 20스타디아(3km) 올라오면 강과 언덕이 만나는 곳이 있으니 이곳으로 물러나 주 방어선을 설정하겠습니다.”
“……알았다.”
베아트릭스가 메어오는 목을 꾹 참으며 어렵게 대답했다. 그렇게 물러난다면 13선지자의 묘와는 거리가 그나마 더 멀어지는 셈이었지만 지금의 불리한 위치에서 저 많은 적군을 상대한다면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뻔했다. 아직 카렐의 행방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황제를 위해 그곳을 무조건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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