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5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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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난 날 저녁, 도시가 완전히 제압되자마자 카렐, 아니 ‘소라브 추장’이 서둘러 찾은 곳은 도시 남동쪽 외곽에 자리한 유명한 ‘13선지자의 묘’였다.
황제의 자격이었다면 즉위와 동시에 모든 황족들을 이끌고 공식적인 참배를 해야 할 곳이었지만 당장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베아트릭스를 제외한 아랫사람들에게도 전혀 알리지 않은 채 고작 호위 전사 4명과 에스더만을 대동하고 몰래 이곳을 찾아온 터였다.
문제라면 이곳은 도시를 점령한 동맹군과 외곽으로 일시 퇴각한 근위대와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었고, 적의 반격이 개시된다면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의 한복판에 위치할 위험천만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곳에 황제가 간다는 말에 당초 베아트릭스가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언제 이곳이 다시 근위대 손아귀에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카렐도 약간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성지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무덤은 무덤이군.”
검푸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차가운 공기 너머, ‘펜지켄트 박물관’을 에워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비석들이 카렐의 눈에 들어왔다. 성전 초기, 교단에 의해 처형당한 수천의 유학자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고, 나이 많은 유학자들은 죽어서 이곳에 묻히는 것을 지금까지도 최고의 명예로 여기고 있었다.
카렐을 비롯한 에키트 족 전사들은 박물관이 문 닫은 지 오랜 늦은 시각 따위는 아랑곳없이 출입문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빨리 끝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함께 걷던 에스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생각보다 대담한 여인인지라 따로 표현은 않고 있었지만 그의 거칠어진 흰 입김과 잔뜩 긴장한 눈초리만으로도 많이 떨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렐이 그의 어깨를 살짝 짚어주며 짐짓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박물관 수장고에서 필요한 물건만 챙기고 바로 돌아올 거니까 별 문제 없어. 적이 반격을 개시했다는 보고도 없으니 괜찮겠지. 뭐, 반격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흰 눈에 덮인 유학자들의 묘지는 평소보다 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이곳은 가뜩이나 음산한 도시인 펜지켄트에서도 가장 외곽에 자리잡은 터라 참배객들을 상대하는 몇 채의 숙박시설과 직원들이 사는 공동주택을 제외하면 변변한 거주민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가지를 점령한 동맹군도, 외곽으로 물러난 근위대도 약간의 정찰대를 제외하면 병력을 들여보내지 않은 채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일종의 완충지역이었다.
“너무 무서워할 것 없네, 에스더 이쟈크 경. 여긴 성지고, 설사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무장한 공권력은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
“그건 원칙일 뿐이죠.”
에스더가 쓴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카렐이 자칫 짐덩이가 될 수도 있을 에스더를 함께 데려온 건 그가 ‘상급귀족’이라는 이유 하나에서였다. 가뜩이나 이미지도 좋지 않은 에키트 족 5명이 무장을 하고 ‘13선지자의 묘’에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보니 꽤나 어색한 광경이었다. 제국의 건국사상에 관심이 있는 ‘별종 에키트 족’ 행세를 하느니 그보다는 고등교육을 받고 박사학위까지 있는 상급귀족을 호위하는 모양이 지금의 카렐 일행에게는 훨씬 잘 어울렸다.
사실 이곳의 으스스한 분위기보다 어깨에 두툼한 짐승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손에 피 묻은 도끼를 쥔 5명의 야만족 거한들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진짜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출입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이 야만족 점령군들의 무시무시한 모습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태연히 앞을 막아서고 석궁을 겨누었다.
“참배객이요?”
경비병들의 오만한 태도에 발끈한 ‘락시 대장’이 목소리를 높이려 했지만 카렐이 얼른 저지했다.
이 경비병들의 복장과 무장은 옛 민병대의 것 그대로였고, 옷깃에는 옛 성전에서 받은 훈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시간마저 멈추어버린 이들의 괴상한 차림새는 참배객이나 관광객을 위한 유치한 연출은 아니었다.
이들은 실제로 성전 당시 민병대 전사 출신들이었고, 순위는 각각 달라도 실제 ‘공신’의 호칭까지 가지고 있는 광신도 용사들이었다. 이곳을 지키는 백여 명의 경비병들, 관리인들은 당시 지도자였던 샤미르가 공신 작호를 받은 전사들 중 충성심이 투철한 사람들을 뽑아 ‘평생 성지를 수호할 권리’를 하사한 것이었고, 이들은 이 춥고 황량한 도시에서 자신들끼리 자치조직을 결성하고 이곳을 지키며 그 명예를 수백 년째 지켜오고 있었다.
에스더가 경비병들에게 자신의 상급귀족문을 내보이며 미리 카렐에게 지시받은 대로 냉큼 대답했다.
“황상께서 이곳을 점령하는 즉시 성지에 참배하는 것을 잊지 말라 명하셨기에 짬을 내 찾아온 거요. 알다시피 황상께선 오르마즈 경의 혈육이시고, 아메샤 스펜타의 솔로스 장군께서도 우리 쪽에 계시지 않소. 문 닫은 건 알지만 군인이 그런 시간을 하나하나 지킬 수도 없으니.”
황제의 명을 팔아 잔뜩 띄워 준 공치사가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오르마즈와 솔로스 장군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 값을 한 것인지, 어쨌든 경비병들은 그제야 경계를 풀고 석궁을 치웠다.
“일단은 들어가도 좋지만 성소 안에서는 비무장이어야 하오. 이곳은 리 리쿠와 그분을 따르던…….”
카렐이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저었다. 물론 그는 정규교육은 문턱조차 밟은 일이 없다보니 성전의 정신이 어떻고 하는 구질구질한 설명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당시 민병대가 교단에서 빼앗아 온 전리품, 그 중에서도 연구소에서 빼앗아 왔던 ‘특별한 캡슐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출입문을 일단 통과한 카렐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무덤을 가로질러 급히 박물관을 향했다. 일행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경비병들의 시선을 의식한 에스더가 황제에게 살짝 귀띔을 주었다.
“저어, 그래도 여기는…….”
“귀찮게.”
카렐은 그제야 마지못해 박물관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추모탑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에스더와 함께 향을 피우고 대강 묵념을 하는 시늉을 했다.
코리온이나 제네르가 안다면 한바탕 난리를 칠 일이겠지만 사실 카렐은 그들이 정말로 옳았던 것인지 아닌지는 생각도 해 본 일도 없었고 그저 ‘운 좋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으니 대우받는 것’이라 태평하게 치부해 버리곤 했다. 심지어 그는 여기가 설사 마구스의 묘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죽은 사람’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옛 광신도들은 도시를 점령하자마자 찾아온 동맹군 장병들의 참배를 사뭇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을 테지만.
분향을 대강 마친 카렐은 원래의 목적지인 박물관으로 급히 향했다. 펜지켄트의 박물관은 제국의 건국사료들이 전시된 유서 깊은 성지였지만 워낙에 위치 자체가 외지다 보니 규모 면에서는 황궁의 수장고나 남극성당의 기념관에 비해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옛날, 에르네스토가 피살당했던 북극의 회담장을 규모만 키워 복원했다는 말 그대로, 박물관 자체는 사방이 유리로 지어진 넓고 확 트인 단층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박물관에 다가가던 카렐은 이번에도 또 앞을 막는 경비병과 마주해야 했다.
“그냥 참배하러 오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이곳은 성지입니다.”
공손한 말투로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자그만 키에 검은 머리칼을 한 웬 남자였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촌스런 구식 군복 따위는 걸치고 있지 않았지만 서 있는 자세와 눈빛으로 보아 상급자임에 틀림없었다. 언뜻 살기가 보이지 않는 무던한 인상, 마르고 작은 체격을 보아 전사라기보다는 실험실에서 책이나 파고 있음직한 학자로 보였다.
“지금 하고 계신 것이 무장 아닙니까?”
남자가 카렐과 에키트 족들의 무기를 가리키며 언뜻 공손한 말투로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상대를 압박하는 힘이 있었다. 카렐이 에키트 족 사투리가 잔뜩 섞인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키트 추장 소라브라고 하오. 여기 오신 분과 함께 황명을 받아 이곳에서 잠깐 볼 것이 있어서. 무기 문제는 깜박 잊었군요.”
“볼 것이라뇨?”
“교단의 전리품들.”
카렐의 짧은 대답에 그 남자가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이 거인을 올려보았다. 물론 눈은 스코프에 가려 있었고 그가 볼 수 있는 건 털모자 밖으로 보이는 콧매와 입술뿐이었다.
“그러시군요.”
카렐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 남자가 갑자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박물관 보안책임자입니다. 직책상 여쭐 수밖에 없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경비병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며 갑자기 눈짓을 보냈다. 그의 기이한 표정을 읽은 카렐은 혹시라도 정체가 들통난 것이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보시다시피 박물관은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관리인도 없는데 무조건 들여보내드리기는 조금 곤란하니 꼭 보실 것이 있으시다면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지고 있어.”
카렐은 일단 등에 지고 있던 무기와 도끼를 끌러 락시 대장에게 일단 맡겼다. 그리고는 에키트 족들을 그 자리에 놔둔 채 이 ‘보안책임자’, 그리고 에스더와 나란히 박물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여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이자의 목을 비틀어버릴 참이었다.
“이렇게 몸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렐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하지만 그 경비대장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박물관 입구의 보안장치를 꺼 버렸다. 보안장치가 꺼지면서 조명의 전원도 함께 끊겼는지 안이 깜깜해졌다. 당황한 에스더가 얼른 카렐에게 바싹 다가섰다.
“이트닌 하산 예비역 상사입니다. 공학박사이고 민병대 특무대에서 보안전문가로 있었지요. 조명은 죄송합니다. 심야 보안장치는 조명장치와 연동되어 있어서.”
그가 돌아보기 전에 목을 비틀려던 카렐이 순간 움찔거렸다. 이 사람은 오르마즈, 베흔과 함께 야푸르 대신관을 죽인 암살팀의 일원이었고, 종전 후 제5개국공신으로까지 봉해졌던 유명한 전사였다.
“어느 분께서 진짜 윗분이신지 알겠습니다.”
이트닌은 카렐과 함께 온 에스더에게 눈짓을 주었다. 분위기를 알아 챈 눈치 빠른 이 귀족은 재빨리 박물관 밖으로 물러나 주었다.
“폐하를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분장이 그렇게 형편없었나.”
카렐이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리며 스코프를 벗어버렸다. 이트닌이 쓴웃음을 지으며 랜턴을 켜 들었다.
“아뇨, 완벽하십니다. 그레이오팔 눈동자의 반사광이 스코프의 박막 영상장치를 통과하면 빨갛게 보인다는 걸 아는 제가 이상한 거지요. 작전중에 위장이나 분장을 자주 하다보니 그분을 구별하는 방법을 자연히 터득했습니다.”
“그대가 안다면 베흔도 알겠군?”
“……물론입니다.”
둘 사이에서 부담감을 느꼈는지 잠시 망설이던 이트닌이 짧게 대답하고는 앞장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양쪽으로 이곳에 묻힌 초기 유학자들의 생전의 모습들, 교단의 악행을 남겨놓은 자료들이 스쳤지만 카렐은 그쪽에는 별 관심도 두지 않았다.
“……제게 어느 편인지 묻지 않으십니까?”
“뭣 하러?”
여유만만한 것인지, 무관심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카렐의 이런 반응에 이트닌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자네 발로 직접 찾아와 무릎을 꿇으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을.”
이트닌은 털모자에 반쯤 가려진 카렐의 얼굴을 힐끔 올려보았다. 검고 푸른 위장이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지만 한때 그가 ‘대장’으로 따랐던 사람의 얼굴이 그곳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자네는 베흔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역사책에까지 이름이 남은 공신이니 맘만 먹었다면 근위대 보안국에서 적어도 부장급 이상으로 떵떵거릴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도 이런 외진 곳에서 한물 간 박물관 보안책임자 정도로 주저앉아 있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정곡을 찌르는 카렐의 물음에 이트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문 앞에 선 이트닌이 조심스레 말했다.
“교단 시절 전리품 중 전시할만한 물건들은 황궁 수장고나 남극성당의 유물 보관소에 있습니다. 여기는 전시 가치가 없는 잡동사니만 모여 있습니다. 보려 하시는 물건이 무언지 말씀을 주시면…….”
“기원전 9년, 교단 유전자 연구소에서 훔쳐 온 것들.”
‘훔쳐 온’이라는 표현에 이트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황제의 곱지 않은 표현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마치 치부를 들킨 듯한 당혹감이라는 편이 더 정확했다.
“내 알기로 할머니께서도 다녀가셨을 텐데. 그때도 그대가 안내했었나?”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이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황상께서 오셨다면 아마도 관장님께서 직접 안내하셨을 겁니다.”
더듬더듬 대답한 이트닌은 잠겨 있던 수장고의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큰 철문을 힘껏 열었다. 그를 처음 맞아준 건 끝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까지 이어진 계단이었다.
“깊이와 거리는?”
“이 계단은 지하 330척(96m)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수장고는 지하 630척(189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계단이 끝나면서 지하 터널이 시작됩니다. 아참, 이곳 지하에서는 할룩스 통화가 되지 않습니다.”
“꼭 어디를 생각나게 하는군?”
카렐이 살짝 눈을 흘겼다.
“이곳도 교단이 지은 구조물인가?”
카렐이 물었지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자연석으로 마무리된 벽면은 그가 황궁 지하의 카타콤베에서도 보았던 미세한 기류의 흐름이 마치 물결처럼 조금씩 보여지고 있었다. 랜턴이니 스코프, 심지어 가디언 특유의 적외선 시야 따위가 없이도 그의 눈에는 물결처럼 흘러가는 푸른빛의 벽 실루엣이 그대로 보였다.
카렐은 뒤를 돌아보았다. 교단이 만들었다면 그저 평범한 지하실이 아닐 것 같다는 직감, 그리고 물건을 챙기는 일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 상황이 은근히 걱정되었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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