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39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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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은 자네의 그런 면을 싫어했지만 난 자네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네.”
카렐이 시로의 처진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걸었다. 시로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여전히 표정은 어두웠다.
“베흔은 폐하께서 어디 계신지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겠군요.”
“추장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카렐이 그의 목을 살짝 조르며 장난스레 말했다.
“뭐, 어쨌든……”
“우리가 사지에 알아서 기어들어왔으니 처음에야 좋아라 하겠지. 여기의 해안 쪽 방어선은 그다지 탄탄하지 않게 해 놓은 것도 그 때문일 테고.”
카렐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적들에게 문제는 이곳에 온 우리의 병력 규모야. 이런 혹한기의 시가전은 양쪽 모두 죽을 맛이겠지만 시가지라는 게 따져보면 인공의 정글 아니겠나. 내가 배를 쓸데없이 많이 끌고 온 게 그 때문이고 말이야.”
카렐이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이번 상륙 선단은 실제 병력 규모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것도 아케메니안 항구의 민간 선박을 모조리 강제 억류해버린, 카렐다운 무자비한 처사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공격군인 우리가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시내를 먼저 장악해 버리면 놈들은 우리의 규모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근위대로서는 여기는 적당히 막는 선에서 사오시안트를 더 강화해야 할지, 펜지켄트의 시가전에 모든 자원을 쏟아야 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지.”
“어느 쪽이든 완전한 선택은 아니죠.”
“전쟁에 어차피 완전한 선택이라는 게 어디 있던가? 놈들은 우리 본대가 사오시안트를 치면 여기 있는 4, 10군단으로 그 후미를 차단하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2번 도시 서북쪽에서 가장 큰 항구인 펜지켄트를 우리 손에 계속 놔뒀다가는 4, 10군단도 맘 놓고 움직일 수가 없어. 도리어 자기네가 우리들 사이에 낀 꼴이 될 수가 있거든.”
“하지만 어디든 폐하가 계신 곳을 알면 그곳에 총력을 쏟겠지요. 폐하만 쓰러뜨리면…….”
시로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도. 그래, 위험한 도박인 건 인정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게 적에게 흘러가면 아주 끔찍한 상황이 될 테니.”
카렐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시로는 황제를 배웅하던 페로가 왜 그리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카렐이 이곳, 그것도 산악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에 제 발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연합군이 안다면 천하의 ‘등급없는 가디언’도 목숨을 건사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리 죽상이야?”
카렐은 아침부터 내내 표정이 굳어있는 니사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럭저럭 표정이 밝았던 니사가 오늘 아침부터 무슨 이유엔지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행의사 한 명이 죽었다더니 그것 때문에?”
“그 일 때문에 의무대 분위기도 안 좋고…….”
니사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유난히 파도가 거셌던 지난밤 당직근무를 서던 니사의 수행의사 중 한 명이 응급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갑판에 올라갔다가 배 아래로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경비병들이 떨어진 의사를 건져내려 무진 애를 썼지만 이곳의 지독한 추위와 찬 바닷물 속에서 채 1분도 견디지 못하고 물속으로 사라져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사실 그 정도는 배에서 워낙 흔히 있는 일이다보니 선원들이나 황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니사에게는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선발대가 갑니다!”
가디언들과 선발된 에키트 전사들을 가득 태운 대형 보트 수십 대가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해안선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에키트 족 추장으로 위장한 카렐 역시 2진으로 보트에 오르기 위해 갑판 모서리에 섰다.
극소수의 지휘부를 제외한 아군조차 정확히 모르는 이곳의 투입 병력은 5천의 에키트 족, 그리고 3천의 북부보병과 3천의 기병, 2천의 가디언이었다. 총 1만 3천의 이들이 이제 혹한의 ‘펜지켄트 시’를 지옥으로 만들어 근위대의 발목을 죄는 덫 역할을 해 주어야 할 터였다. 페로가 걱정했듯이, 지금까지 동맹군이 벌였던 중 가장 위험천만한 전투가 이제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딸 밀리타가 황제의 귀인으로 책봉되었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후, 황궁을 찾은 쿠트라스 상공조합장 아스탈 레즐린의 표정의 묘하게 굳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얼마 전 아들을 잃고, 외동딸을 황실에 보내게 된 긴장감 때문이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황제를 대신해 황도를 맡고 있는 총리 페로와 내명부 수장인 아메스에게 차례로 인사를 올리고 공식적인 ‘사돈’이 된 황태후 세네피스에게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족한 딸년을 상께서 거두어 주시니 이런 영광이 없사옵니다. 소인 바하칼리와 쿠트라스의 상공조합장인 아스탈 레즐린이라 하옵니다.”
황태후에게 절을 올린 아스탈은 준비해 간 고서적과 문방구들을 바치며 평소처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처음으로 독대한 세네피스는 이 ‘사돈’의 선물이나 직위 따위보다는 그의 날카로운 인상만을 한참동안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내 워낙 옛날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만.”
“예?”
지레 놀란 아스탈이 어깨를 들썩이며 움찔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밀리타 역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혹시 성전 이전에 사교 교단 쪽에 있지 않았었나?”
순간 표정이 잠시 창백해졌던 아스탈은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미 세상이 바뀌었사온데 갑자기 그런 물음을 주시오니……당혹스럽사옵니다.”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세네피스가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짐짓 웃음까지 띤 얼굴로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아스탈은 낮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소인의 가문은 오랜 동안 의사 가문이었고……부모님 역시 의사이셨습니다. 소인도 한때 다하카르의 간택자였고……성전 이전부터 지금의 북부에서 사업가로 공공기관을 상대로도 거래를 자주 해 왔사옵니다.”
“코윈의 수용소를 상대로도?”
세네피스가 그제야 ‘의심’의 근거를 슬슬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래 전이어서 가물가물하지만 그대 얼굴이 어딘지 익숙해. 그곳에도 드나든 적이 있던가?”
“사업가가 그런 것까지 가리는 건 아니니까요.”
아스탈이 살짝 이를 드러내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곳에 이것저것 잡비품을 납품하러 자주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스탈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세네피스도 의외로 순순히 털어놓는 그에게 경계어린 표정을 바로 접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런 옛일로 괜히 마녀사냥을 하자는 건 아냐. 그저 어딘지 익숙하길래 호기심에 물은 거지.”
“그렇게 오래 지난 일을 기억하시다니, 참으로 놀라운 기억력이시옵니다.”
아스탈이 마치 죄인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기까지 했지만 세네피스는 뜻밖에 그를 계속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표정을 다시 가다듬은 세네피스는 직접 그린 서화를 이 ‘새 사돈’에게 선물로 내밀었다.
“고이 키운 딸을 이렇게 황가에 시집보내 주어서 고맙네. 여염집 부인네에 비해서 이런저런 제약은 많을 것이나 황궁에서 최고의 격으로 대우해 줄 것이며, 훌륭한 2세와 명예로 충분히 보답받을 것이니 아버지로서 크게 염려하지는 말게나.”
“황태후 폐하와 황상께서 부족한 딸년을 든든히 보호해 주실 것을 믿사옵니다.”
아스탈은 항상 예의를 지켰던 지금까지처럼 이번에도 낯간지러울 정도의 대답으로 세네피스에게 최대의 공경을 표했다. 세네피스는 그의 공손한 태도에 만족한 것인지, 사뭇 밝은 표정으로 그에게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입을 확실히 막아버리시는군요. 허, 잡비품 납품업자요? 코윈 교구장께서요?”
아스탈과 함께 복도를 걷던 밀리타가 콧방귀를 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네피스 앞에서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한 아스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긴, 카파키 가 놈들이야말로 군수품 납품으로 제일 큰 돈을 번 가문이었으니 고작 조무래기 납품업자 뭐라고 나무라 봤자 지 얼굴에 침 뱉기일 테니. 겁먹은 척 하시는 게 아주 볼만하더군요.”
아스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저년도 머리 하나는 정말 알아줘야 하겠군요. 설마 계속 따져들지는 않겠죠?”
“어차피 저년도 내 여자가 될 텐데 무슨 상관이냐.”
밀리타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밀리타의 숙소 앞에 도착한 아스탈은 자리에 멈춰 선 그를 문득 돌아보았다. 얼굴을 약간 덮은 긴 은발 사이로 살짝 비친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갑자기 검은 색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를 잘 아는 밀리타가 겁에 질린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숙소의 자동문이 열렸지만 아스탈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설마 내 여자의 결혼 소식 축하해주러 온 팔불출이라 여기는 건 아니겠지?”
순간,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인 밀리타는 저항조차 한 번 못 해본 채 방 안에 그대로 동댕이쳐졌다. 팽개쳐진 충격이 어찌나 셌던지, 그는 거의 방 끝까지 밀려가 벽에 거칠게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비명소리는 숙소 문이 잠기는 소리에 그대로 파묻혀버렸다.
“넌 내 마지막 신뢰까지 무너뜨렸어. 허? 귀인이 되어서라도 나한테서 빠져나가고 싶다고? 감히 황제의 배우자라 내가 더 이상 못 건드릴 줄로 알고? 보기에 안쓰러울 지경이군.”
밀리타는 자신을 노려보는 이 무서운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기만 했다.
“내 마지막 경고다. 무슨 핑계든 만들어서 당장 돌아와라. 아니면……전처럼 내 하렘에 갇혀서 내 전용 창녀로 사육당하는 게 그나마 행복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싫다면요?”
밀리타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용기를 내 쏘아붙였지만 여전히 그의 눈을 쳐다보지는 못했다.
“어쨌든 난 이제 황제의…….”
“오호, 황제? 그 잘난 면상을 다시는 못 볼 텐데? 꿩 대신 닭이니 이 대신관께서 대신 거둬주시면 어떨까?”
밀리타는 그제야 눈을 부릅뜨며 아스탈을 응시했다.
“황제에게……무슨 짓을 하려고요?”
“이젠 네년에겐 더 해 줄 말이 없어. 또 망쳐놓으면 어쩌려고?”
아스탈이 냉담하게 설명을 거부했다.
“펜지켄트의 눈밭에서 곧 뒈질 놈을 기다리고 있는 네가 딱하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네년 지조없이 오락가락하는 거야 옛날부터 몰랐던 것도 아니고.”
“펜지켄트요? 황제가 거기 있다고요? 어떻게 알았죠? 여기 사람들도 아무도 모르는데…….”
“이젠 네년에겐 알려줄 생각이 없어. 그래도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내 배 밑에서 미쳐 신음할 수 있는 정도의 은총은 남겨두지.……지금처럼.”
쓰러져 있던 밀리타는 어어 하는 새 아스탈에게 멱살이 잡혀 공중에 번쩍 치켜들어졌다. 그는 졸린 목을 붙들고는 아스탈의 팔뚝을 주먹으로 마구 쳤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스탈은 밀리타를 한 팔로 번쩍 치켜든 채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어졌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내 마지막 은총이 되지 않게 하려면.”
버둥대던 밀리타는 그대로 공중을 붕 날아가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반쯤 정신을 잃은 밀리타는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 거친 남자 앞에서 무력하게 떨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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