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38 회: 파트 8. 해바라기가 앞을 가로막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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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배 안에서 며칠 동안을 지내며 좀이 쑤셔하던 동맹군 원정군 사이에서는 ‘어디든 좋으니 좀 내리자’라며 불평이 한참 끓어오르고 있었다. 특히나 예민한 말들을 동행한 기병들은 긴 항해에 더더욱 답답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위치를 파악할만한 전자장치까지도 모두 압수당했고, ‘선실 안에만 머물러라’라는 괴상망측한 명령까지 받은 덕분에 며칠이나 햇빛 구경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몇몇 할 일 없는 장병들이 금속을 두들겨 엉터리로 만든 사제 나침반을 돌려가며 우리가 ‘동쪽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라고 말해왔기는 했지만 어차피 황도에서 2번 도시까지 가려면 동북쪽으로 움직여야 하니 정확한 각도까지 알려주지 않은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남부제후군, 특히 플라칼 가 장병들은 1년 가까이 전장을 떠나지 못한 상태였고, 그간 연합군의 일원으로 가혹한 행군, 거듭된 패전과 식량부족, 추위에까지 시달리면서 몸도 지쳤고, 사기마저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제후가 이번에 동맹군 쪽으로 말을 갈아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어느 쪽 편이냐는 문제보다 ‘또 행군’이라는 황당한 상황이 더 문제였다. 그렇다보니 대다수의 장병에게 이번 전쟁은 ‘누가 이겨도 좋으니 제발 빨리 끝나기나 해라’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가니 갑판에서 대기하라’는 선장의 방송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지는 말하나마나였다. 그것이 설사 ‘적진 앞으로 돌격’하라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상륙 명령일지라도.
“저게 뭐야?”
나름대로 임전태세를 갖추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제일 먼저 갑판에 올라온 남부 중장보병들은 잠시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들의 고향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햇볕, 멀리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육지는 기대했던 2번 도시의 살벌한 풍경이 아니었다.
“저게 도대체 어디야? 우리 싸우러 온 것 아니었어?”
몇몇 장병들이 망원경으로 육지를 유심히 살폈다. 넓은 백사장과 잘 정돈되어 있는 풀밭이 펼쳐져 있었고, 게다가 햇빛까지도 북쪽 끄트머리의 2번 도시라고 하기는 너무 따스했다. 물론 도끼눈을 뜨고 그들을 맞아주고 있어야 할 적군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전장이라기보다는 마치 큰 리조트 같은 분위기였다.
“위도가 꽤 낮은 곳 같은데?”
누군가가 머리꼭대기의 해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가 하마터면 꿀밤을 맞을 뻔했다. 바로 그때, 브리지 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나며 그들의 제후인 카나르 플라칼 경이 모습을 나타냈다.
“각자 군장을 갖추고 상륙 준비한다. 저곳에 막사를 지을 테니 삽질할 준비들 제대로 하고.”
지휘관들의 명령에 보병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싸우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저곳에 막사나 짓고 눌러앉으라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내 알 게 뭐야.”
병사들의 물음에 장교들이 짜증을 부렸다. 지휘관들이 가진 것도 이 부근이 그려진 쪽지도 뿐이다보니 그들 역시 이곳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쨌든 나름대로 긴장한 표정의 선발대들이 배에서 제일 먼저 내려 작은 배를 타고 쪽빛 아름다운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에 접근해갔다. 배 밑바닥의 물속은 바닥의 아름다운 산호초와 열대의 물고기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지만 별 생각없이 노를 깊이 찔러보았던 한 병사는 긴 노가 속으로 쑥 들어가자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되게 깊은데?”
깊이를 얕보고 막 배에서 내리려던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다시 보트에 올랐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 배 밑바닥이 모래톱에 닿은 후에야 물에 발을 담그고 얼른 배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요란 떨 것 없다. 너흰 기병들하고 함께 주변에 위험한 동물들이나 없는지 확인하고 별 거 없으면 사령부 막사부터 지어.”
후스 콘스탄츠 중랑과 함께 도착한 카나르 경은 적군의 공격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고작해야 ‘동물’ 따위에 주의를 주며 팔을 크게 저었다. 바로 그때, 숲에서 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병사들이 기겁을 하며 무기를 겨누었지만 카나르 경이 긴장한 그들을 급히 저지했다. 하지만 잠시 후, 숲 속에서 나타난 건 진청색 팔찌를 낀 가디언 십여 명과 서부 사역병단 엔지니어들이었다.
“생각보다 늦게 오셨군요.”
그 페로 가디언이 카나르 경에게 아는 척을 했다.
“정찰 결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씨도 좋고 안전하니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선발대 장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도착한 곳이 전장이 아닌, 중간 대기 장소임을 깨달았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몇몇 사람들에게는 김새는 소식이겠지만 대다수의 장병들에게는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몰라도― 생각지도 않았던 며칠간의 꿀 같은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동쪽으로 1스타디아 가면 작은 냇물이 있습니다. 수질도 아주 양호합니다. 드셔 보시죠.”
카나르 경은 엔지니어가 내민 물병을 받아들고 몇 모금을 꿀꺽 들이켰다.
“자자, 들었지! 오늘밤 별보면서 자고 싶지 않으면 빨리 삽이나 주워들라는 말이다! 제일 빨리 끝내는 대대에는 1인당 술 한 병씩이 더 지급될 테니까!”
병사들을 독려하는 카나르 경의 목소리에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되는 힘이 실려 있었다. 선발대에 뒤이어 많은 양의 식량을 가득 실은 배가 보란 듯 따뜻한 햇볕, 짙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모래톱에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도 이 많은 병사들이 며칠은 배불리 배 두드리며 먹고도 남을 많은 양이었다.
“너희 중대는 식량 내리고!”
그간 배고픔과 추위에 치를 떨었던 남부 장병들이 식량이 가득한 배, 그리고 뒤이어 수송선에서 내리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들었다. 이들에게는 개전 이래 처음으로 주어진 달콤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플라칼 가 장병들은 따스한 열대의 해안가에서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동맹군의 모든 부대가 다 그런 풍요로운 휴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간다는 연락을 받고 브리지에 오른 카렐은 멀리 2번 도시의 서북쪽 해안선을 사뭇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응시했다. 초저녁의 어둠 너머, 험악한 산악의 검은 실루엣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황도가 있는 중위도와는 차원이 다른, 고위도의 혹한이 벌써부터 그들의 피부를 죄어오고 있었다.
“제후군들은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다고 하나?”
“예. 남부제후군은 ㅤㅋㅞㄹ크 인근 섬에 모두 무사히 도착했고, 서부제후군과 3군단, 기병 주력군은 3번 도시 서쪽 해안에 주둔지를 마련 중입니다.”
카렐의 물음에 카토 대신 함께 온 시로가 대신 대답했다. 오늘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건 평소 그를 따르던 가디언 기병대가 아닌, 30여명의 선발된 에키트 족 최정예 야만족 전사들이었다.
“ㅤㅋㅞㄹ크 쪽은 카나르 경과 부마께서 통제 중이고, 3번 도시 쪽 상황도 황비 전하와 하크로딘 상장군, 예리노프 대장군 지휘 하에 정상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여기만 해결되면 일단 끝이군.”
카렐은 브리지 아래, 어두운 갑판에 와글와글 모여 있는 에키트 보병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들은 몇 번의 거친 전투를 겪기는 했지만 피를 말리는 장기전은 아니었고, 남부제후군 병사들처럼 긴 행군에 동원되거나 보급부족으로 시달린 일도 없던 덕분에 체력과 사기 하나만은 누구보다 왕성한 부대였다.
게다가 제국에서 가장 험한 탈라스의 야만적인 극지에서 생존해 온 거친 전사들이다보니 상황 적응력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카렐이 이번 작전에 이들을 ‘낙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걱정 마십시오. 배고프면 적군 시체 구워먹으면서 술 한 잔 생각난다고 떠들 놈들이니까요.”
베아트릭스가 얼굴에 근심이 배어나는 황제의 큰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평소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의 이런 격려에 카렐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이 말은 지금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선발대로 잠입한 가디언 대대는 이미 시내에 접근했다고 합니다.”
카렐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카렐은 베아트릭스보다 도리어 더 소심해 보이는 시로를 향해 갑자기 껄껄대고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라니? 이번 작전이 뭐가 어때서?”
인정도 많고 위험한 도박을 싫어하는 그답게, 시로는 이번에도 위험천만한 계획에 직접 몸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황제에 대해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 놈들도 우리가 사오시안트에 직격을 하던지, 아니면 저 앞에 ‘13선지자의 묘’ 둘 중 하나를 노리고 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내 장점이 뭔지 아나? 다른 황제들처럼 요란스런 경호대가 없이도 전사로 제 앞가림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 ‘등급 없는 가디언’이라는 거지.”
카렐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금빛 자수의 망토를 벗고 에키트 족들이 입는 흉갑과 거친 털가죽 옷을 주섬주섬 걸치기 시작했다. 최대한 줄여놓은 ‘하메스타의 창’과 베흔이 쓰던 ‘헤크마의 검’, 그리고 오르마즈가 쓰던 ‘나즈라의 검’도 밖에서 잘 띄지 않도록 가죽 주머니로 한데 칭칭 감아놓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완벽할 겁니다.”
에키트 족 지휘관인 베레트라가 황제의 목에 곰의 큰 턱뼈와 이빨이 주렁주렁 매달린 큰 목걸이를 걸어 주고는 목과 얼굴에도 붉은 색과 검은 색 물감을 짙게 칠해주기 시작했다.
“농담 아니니까 이제부터는 추장님이라고 불러. 알았냐.”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카렐이 곁을 지키는 에키트 족 경호원들에게 일렀다. 몇몇 에키트 족들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큰 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뭐, 이 정도면 볼만하군.”
마지막으로 털모자를 꾹 눌러쓴 카렐이 거울을 돌아보았다. 얼룩덜룩한 그림이 그려진 얼굴과 목까지 드러난 용 문신, 전공을 상징하는 요란스런 목걸이, 낡아빠진 흉갑 위에 여우털 망토와 털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는 영락없는 에키트 족 추장의 모습이었다.
물론 보통 시민에 비해 유달리 불쑥 솟아오른 키가 문제였지만 워낙에 덩치들이 큰 에키트 족 기준에서 보면 눈에 아주 확 띌 정도의 거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에키트 족의 야전 장교격인 군소 추장들은 덩치들이 큰 것이 보통이었다.
카렐은 ‘폼 나는’ 무기들은 보자기로 한데 묶어 원형 방패와 함께 등에 휙 둘러메고는 지저분한 손도끼를 허리춤에 꽂았다.
“맘에 들어. 아주 야성적인데. 밤에 이렇게 하고 안아주면 황빈이 정말 좋아하겠어.”
카렐의 능글능글한 농담에 시로와 베레트라가 웃음을 터뜨렸고, 베아트릭스의 검은 얼굴에도 티가 날 정도로 붉은 홍조가 확 번졌다.
토목학자 신분 덕택에 사역병단 고문 자격으로 동행한 에스더 이쟈크 박사는 황제의 이런 모습이 아직 낯선지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서부연합군을 이끌고 3번 도시에 남은 네페티를 대신해 이제 그가 이 험한 전장에서 황비의 눈이 되어야 할 터였다.
“해안선이 가까워옵니다. 강 하류는 얼지 않았으니 타고 조금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알았다.”
선장의 보고에 카렐이 큰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와, 그를 호위하는 30여명의 에키트 족 전사들은 지휘부를 호위하는 군소 부족 전사들로 신분을 감추고 그들과 함께 움직일 예정이었다. 카렐은 그들과 함께 갑판으로 내려가며 시로에게 손짓했다.
“가디언 선발대에게서 새로운 연락은?”
“주요 공략 목표지 주변에서 대기가 끝났습니다. 우리가 시내에 진주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겁니다.”
“근위대 4, 10군단이 부근에 있어. 지금쯤 연락을 받고 출동준비를 하고 있겠지. 시가지 진입까지 얼마쯤 걸릴까?”
“에키트 족들이 워낙 정예군이고 시가지가 해안과 가깝고, 병력도 많지 않으니 30분이면 충분할 겁니다.”
“많지 않은 게 좋을 때도 있군.”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면승부는 하지 않는다. 상륙과 동시에 야음을 틈타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해안가와 13선지자의 묘 주변 펜지켄트를 장악한다. 최대한 지리멸렬한 시가전을 유도해서 놈들의 발을 묶는 것이 목표다. 근위대 4. 10군단만 여기 묶어둘 수 있으면 원정군 본대가 적의 심장인 사오시안트를 직접 공격할 수 있을 테니.”
‘시가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시로가 마음이 약해지는지 다시금 입술을 꾹 다물었다.
‘13선지자의 묘’ 부근에 있는 강 하구의 ‘펜지켄트 시’는 50만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는, 사오시안트에 이어 2번 도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하지만 사오시안트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프라임 서북지역의 수도 역할을 하던 오래된 도시다보니 이젠 쓰이지 않는 오래된 건물과 공단, 미로 같은 길로 가득했다. 덕분에 상주인구를 접어두고 넓이나 건물 수만으로 보면 도리어 사오시안트를 능가하는 곳이었다.
이 도시 주변, 그리고 안쪽에도 외곽처럼 높지 않은 산지가 군데군데 산재해 있고, 그런 요충지마다 당연히 근위대의 보루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 동맹군이 진주하면 바로 그들과 싸움이 벌어지면서 이 큰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 것이 뻔했다.
심지어 이런 야간 기습공격이라면 그곳에 거주하는 민간인은 도망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끔찍한 시가전의 한복판에 동댕이쳐질 터였다.
“아시다시피, 날이 아직 많이 춥습니다.”
“우리에게도, 놈들에게도 지옥이 되겠지. 그러라고 온 것 아닌가.”
갑판에 나선 카렐이 칼바람에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카렐의 어깨에 걸친 여우털 망토의 긴 은빛 털이 바람에 물결치듯 흔들렸다.
“펜지켄트의 민간인들에게도요.”
시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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