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26화 (623/1,132)

< -- 626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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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베와 사에나로부터 타르서스의 상황에 관해 보고를 들은 카렐의 대답은 ‘알았다.’가 전부였다. 그는 타르서스의 일에 관해 변명을 하거나 이유를 붙이지도 않았고, 죽은 호족들에게 ‘유감이다’ 수준의 뻔한 립서비스조차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보다는 약혼자를 잃고 또다시 혼자가 된 코리온, 그리고 남동생을 잃은 황비 네페티에게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황제의 차가움은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타르서스의 나머지 유지들이라도 달래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몇몇의 물음에 그는 ‘뒈질 놈들이 뒈졌는데 내가 또 뭐라고 해?’ 라며 그답지 않은 거친 말투로 화를 버럭 내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이게 끝일 것 같냐’며 대신들을 경악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황제의 이런 얼음장같은 태도의 뒤편에서 모든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에나가 이끄는 헌병대는 거의 2천에 달하는 호족과 그들의 수하들을 단 하루만에 모조리 잡아들였고, 그 중 4백여명을 재판조차 없이 그대로 처형, 아니 정확히는 불문곡직 그 자리에서 사살해 버렸다. 절차만으로 치자면 세나우스 2세의 공포정치보다 한술 더 뜨는, 기록적으로 빠르고 잔혹한 피의 숙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직적인 반발 혹은 말썽은 그때보다 훨씬 적었다. 당시는 평화시였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이벤트에 이미 충분히 익숙해 있었다. 타르서스 내부에서는 중앙집권에 편입된다는 큰 변혁을 앞두고 나름대로 긴장감이라도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고작’ 4백명이 죽은 정도는 이런 시국에서 큰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다. 황제가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제네르와 같은 온건파 문무 대신들은 타르서스의 호족 가문을 몰살시키면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심지어 자신들과 일언반구 상의조차 하지 않은 황제의 독단에 하나같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최소한 황제의 이번 숙청이 ‘효율적’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사실 타르서스의 장악은 지금껏 어느 황제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던 이상, 어느 정도는 정치적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었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도덕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었다. 황제의 이번 숙청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사람은 샤드니의 죽음에 분노한 서부 출신들, 그리고 뭐든지 ‘화끈한 것’이라면 최고로 여기는 신임 슈로 기사단장 릴라크를 필두로 사에나가 속한 쉐너 가 등 일부 중앙귀족 가문 정도였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제가 유평대제의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뒷말이 공공연히 오갔지만 카렐은 그들의 이런 소문에 굳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양반은 머리부터 굴리는 정치가지만 난 힘으로 승부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전사라는 게 다르지.’라는 정도의 대답으로 그와의 경계선을 그은 것이 전부였다.

어쨌든, 타르서스 숙청을 마친 코리온 일행이 ‘개선’을 한 황궁에는 정치가, 아니 승부사로서의 본색을 서서히 드러낸 황제에게 경외심, 혹은 묘한 두려움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던 중이었다.

“소인 주어진 명을 받자옵고…….”

넓은 대전을 가로질러 들어선 코리온은 당상에서 그를 기다려주고 있던 황제에게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옥좌에서 일어서서 그를 맞아 준 카렐은 그에게 뻔한 위로의 말 대신 다정한 포옹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소신 명을 받자옵고 타르서스의 불충한 무리들을…….”

코리온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하던 말을 끝맺으려 했지만 카렐은 그의 등을 조용히 토닥여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이 자리에서 이 광경을 제일 마음에 들지 않게 지켜보고 있는 건 곧 있을 동맹군 원정군 출정식을 위해 남극성당 대제학 자격으로 들어와 있던 세네피스 카파키 황태후였다. 그리고 무반의 제일 위쪽에 서 있던 상장군 제네르 역시도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사실 코리온이건, 죽은 샤드니건, 그에게 썩 달가운 인물들은 아니었다.

“표정관리에 조금 더 신경 쓰셔야겠습니다.”

잔소리인지, 핀잔인지에 제네르는 옆에서 아직 불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릴라크를 힐끔 쳐다보았다. 대전에서 감히 의자에 앉는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못한 몇몇 무장들에게는 이런 ‘예외’가 인정되고 있었다. 제네르는 짧은 쓴웃음만 지었을 뿐, 릴라크의 조금은 방자한 한 마디에도 대놓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아직 잘 모르나본데, 상께서는 귀가 아주 밝으시다네.”

“어차피 머리꼭대기에 올라 계신 분인데요. 들으시면 또 어떻습니까.”

릴라크는 평소처럼 냉소적으로 툭 뱉고는 음료수를 꿀꺽 들이켰다. 제네르는 자유분방하다 못해 언뜻 철딱서니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무장이 전장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구는지 문득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서부 섭정공 자리가 비었으니 결국 두겐 플레렌 법무대신이 물려받아야 하겠군요. 하긴, 두겐 경은 평화시 법무대신으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으니……그럼 후임 법무대신은 누가 될까요?”

“너무 앞서갈 것 없네, 그쪽은 문반 친구들이 알아서 하겠지.”

제네르는 짐짓 침착한 표정으로 페로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하지만 사실 후임 법무대신 문제는 샤드니의 죽음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내각 대신들 사이에서 이미 공공연히 오가고 있는 논의였다. 원리주의 출신의 첫 내각대신인 두겐이 물러난다면 그 자리에 또다시 서부 출신 원리주의자가 등용될지, 아니면 최소한 문반 내각에서 전멸하다시피 한 개혁파를 등용해 줄지는 제네르에게도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제네르는 당상에 말없이 앉아있는 네페티 황비를 힐끔 올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그는 황비 자격이 아닌 ‘서부최고제후’ 자격으로 앉아있었다. 그가 들어온 것을 보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건 새 섭정공 문제가 논의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코리온을 위로해 준 황제는 그의 손을 다정하게 붙들고 당상에 함께 올랐다. 뒤늦게 들어온 페로가 그런 황제의 모습에 대번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할 만한 게재도 아니었다. 카렐은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글썽해진 코리온을 옥좌 바로 아래, 고문관석에 몸소 앉혀주었다.

“잠깐.”

막 옥좌에 앉은 황제에게 총리 페로가 갑자기 바싹 다가왔다.

“응?”

페로의 뚱딴지같은 질투라고 생각한 카렐이 코리온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대전 한쪽의 구석진 알현실로 페로와 함께 향했다.

“왜 그래? 다 보는 앞에서.”

카렐은 알현실의 커튼을 얼른 닫으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페로는 그런 그에게 바로 사무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두겐을 새 섭정공으로 삼을 거지? 어차피 황비가 직접 서부를 다스릴 수는 없으니.”

카렐이 살짝 눈가를 찡그린 건 페로가 자신을 이렇게 불러낸 것이 질투 때문이 아니고 일 때문이라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들어서였다.

“그래야겠지. 왜? 후임자 때문에 그래?”

“부탁이 하나 있는데.”

평소 잘 쓰지 않는 표현에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페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카렐에게 물었다.

“법무대신은 임명하지 말고 그냥 공석으로 놔뒀으면 좋겠어. 종전 때까지만 대행체제로 갈 수 있을까.”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법무대신 자리를 미끼로 거래를 해 볼 만한 사람은 있지.”

“그건……우리 편이 아니라는 뜻이군? 최소한 지금은?”

카렐이 눈을 번득였지만 페로는 대답없이 어깨만 으쓱 해 보였을 뿐이었다.

카렐은 낮은 헛기침을 하고는 알현실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바깥 대전의 대신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마 저들 모두 이번 법무대신직의 향방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모두가 군침을 흘리고 있는 자리를 그냥 놔두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를 뜻하는지 대강 알겠군.”

카렐이 다시 커튼을 내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는 거야? 만만한 놈이 아닐 텐데?”

“그러니 그럴 가치가 있지.”

“그래, 생각해 보지.”

카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때, 페로가 막 나가려는 카렐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응?”

잠시 머뭇거리던 페로는 돌아보는 카렐의 허리를 와락 껴안고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입술에 거칠게 달려들었다. 순간 본능적으로 반응한 카렐은 뒤로 물러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을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페로의 팔이 이미 그의 허리와 가슴을 단단히 안고 있었다.

“아읍.”

단단한 대리석 벽에 등을 세게 부딪칠 뻔했던 카렐은 등 뒤를 팔꿈치로 재빨리 짚었다. 자칫 페로의 여린 손을 그의 단단한 등뼈와 체중으로 으스러뜨릴 수도 있었을 순간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로는 발돋움을 한 채 카렐의 입술을 거칠게 맛보고 있었다.

“알아?”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카렐에게 페로가 살짝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카렐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

그는 조금 전 자신이 얼마나 위험했었는지는 전혀 모르는 듯 다시 카렐의 입술과 혀를 맛보았다. 바로 커튼 한 장 너머에는 수십의 대소신료들이 밀실에서 ‘대화’중인 황제와 총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로는 놀란 카렐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흥분감으로 넘겨짚었는지 혼자 흐뭇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페로는 풀어헤쳐진 카렐의 옷깃 사이로 드러난 검은 용 문신을 보며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너한테서 다른 남자의 체취가 나는 건 싫어.”

페로는 카렐에게 밴 코리온의 흔적을 없애려는 듯 그의 목덜미와 가슴에 마구 뺨을 부볐다.

“그래, 너답다.”

잠시 얼떨떨했던 카렐이 쓰디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페로는 카렐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는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여간.”

혼자 남은 카렐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빨갛게 변한 팔꿈치를 어루만졌다. 그가 팔꿈치로 짚었던 곳의 대리석은 움푹 팬 모양으로 망치로 얻어맞은 듯 거미줄 모양의 금이 가 있었다.

“도대체 저놈은 나이를 어디로 쳐먹었을까.”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는 흐트러지고 구겨진 옷을 툭툭 털기 시작했다.

알현실에서 나온 페로는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는 코리온을 슬쩍 흘겨보고는 무심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그는 샤드니가 죽었든 말든 하는 문제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무반 쪽에서 ‘뭐 할 말 없냐’는 식의 눈길로 자신을 계속해 쳐다보고 있는 밀리타만은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황제가 다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2, 3분 정도 지난 후, 다시 단정한 모습을 알현실에서 막 나선 황제에게 이번에 다가온 건 대제학 자격으로 와 있던 세네피스 황태후였다.

‘도무지 진행을 할 수가 없군.’

카렐은 어머니에게 일단 웃음을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세네피스는 황제의 옷깃부터 만져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카렐이 나름대로 잘 맨 옷고름을 다시 풀고는 손수 매어주기 시작했다.

“이번에 부분개각이 있겠지요?”

카렐은 ‘또 그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지만 일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야 하겠지요.”

“지난번 상께서 앓아누우셨을 때 누가 그 치료약을 구해왔는지 아십니까?”

카렐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네피스 황태후는 황제의 옷차림을 손보아주는 척 계속 말을 이었다.

“밀리타 레즐린 부장이 그리 애써 치료약을 구해왔는데 따로 그 공을 치하해 줌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레즐린 부장도 상급 법률사이고, 실무에도 오랫동안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정도면 신임 법무대신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카렐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네피스의 이 은밀한 요청은 겉으로는 지난 일의 치하이지만 아마도 내각에서 북부 세력에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 숨은 속내임에 틀림없었다. 밀리타의 지금 직위 또한 차관급이니 법무대신으로의 등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페로의 제의를 받기 전 카렐이 생각하고 있던 법무대신 후보 또한 밀리타였다.

“어떤 식으로든 감사를 표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법무대신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카렐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는 어머니의 손길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두 사람의 은밀한 청탁을 모두 받은 채 어렵게 옥좌에 돌아온 카렐에게 먼저 입을 연 건 제네르였다.

“탈라스에서 훈련을 끝낸 기병 2만, 중장보병 1만과 에키트 보병 5천의 재편작업이 완료되어 이제 출동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끝낼 시간이 다가오는 건가.”

카렐이 옥좌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입술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제 폐하만을 따르는 황실군의 보병 전력은 중장보병 8만, 경보병 6만, 에키트 보병대 1만으로 총 15만입니다. 그리고 기병은 슈로 기사단과 슬레이프니르 3만 5천이 있습니다. 동원 가능한 제후군으로는 서부연합군 10만, 동부에서는 기병과 투창병 3만, 지난번 전향한 플라칼 가와 세닉 가의 병력 8만이 있습니다.”

카렐이 큰 숨을 내쉬었다. 황도를 차지하고 이제 5달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 동안 적에게 황도까지 길을 내어줘 가며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어가며 기다려 온 반격의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 군 전체를 둘로 나눌 것이다. 일부는 남아 황성을 지키고, 나머지 원정군이 되어 적의 심장인 2번 도시를 칠 것이다. 원정군 출정식은 이틀 후에 아스트라이아 홀에서 열겠다.”

카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옥좌 옆에 세워두었던 오르마즈의 검을 들어 허리춤에 차고는 페로, 제네르와 함께 당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존명하겠나이다.”

“원정군은 짐이 직접 이끌 것이니, 내 없는 동안 자이센 총리에게 황도 아케메니아 전역을 맡기겠소. 부속성, 황성, 황실과 내각, 짐의 식솔들의 생명을 모두 총리에게 맡길 테니 목이 어깨 위에 붙어있는 그 순간까지 지켜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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