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10화 (609/1,132)

< -- 610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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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룰라 모렌 박사.”

“예?”

“내가 자넬 왜 계속 여기 앉혀놓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

카렐이 그에게 갑자기 눈을 쫑긋거렸다.

“자네가 황실에 충성스런 사람은 아니지만 입 하나는 무겁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필요하다면 황제 앞에서도 대놓고 핏대를 세울 정도로 대담하기도 하지. 교단을 떠나 민병대에 온 이후로 최소한 딴생각은 안 했다는 것도 알아. 내게 아직 감춘 비밀이 많다는 것도.”

모렌 박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곱지않은 핀잔이나 추궁이 이번엔 자기 차례라고 생각했지만 카렐의 다음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할 게 있다네. 교단에 관해 어느 정도 알면서도.......내가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놀란 눈으로 카렐을 돌아보았던 모렌 박사가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만 하십시오.”

“슈엘러 경의 말년이 마음에 걸려.”

모렌 박사는 팔짱을 낀 황제의 눈빛에서 낯설기까지 한 공포를 읽어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대담한 황제가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렐은 금고를 열고는 그 안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슈엘러 경의 자료와 포개어서 모렌 박사에게 불쑥 내밀었다.

“지금 내놓은 건 오르마즈 경의 말년을 괴롭혔던 병에 관한 자료야. 내 아는 지식과 서적을 아무리 뒤져봤어도 그런 병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더군.”

모렌 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슈엘러 경의 말년과 공통점이라도 있습니까.”

“아주 많이.”

카렐은 최대한 짧게 대답하며 서류에서 손을 떼었다.

“라말라 박사가 자신은 무관하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겠지. 라말라 박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내 몸을 기꺼이 맡길 수는 있겠지만 교단이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내게 절대 협조하지 않겠지.”

서류를 받아든 채 말없이 서 있던 모렌 박사는 황제의 의자 옆에 꿇어앉으며 더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혹시 폐하의 몸에도......”

카렐은 이번에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눈치빠른 모렌 박사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카렐이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명의 개국공신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같은 병이었는지도 몰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모렌 박사는 자기도모르게 이 황제의 손등을 붙잡고 있었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 이 크고 당당한 황제는 한때 그의 품에서 말썽과 재롱을 피우고 걸음마를 배우던 갓난아기였고, 불에 타 죽은 친아들을 대신해 그의 허전한 가슴을 채워주었던 두 번째 자식이었다.

모렌 박사는 황제의 큰 손등에 천천히 이마를 가져갔다. 무슨 이유엔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어깨를 황제에게 들키기 않으려 잔뜩 힘을 주며 짧게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처리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카렐은 그제야 모렌 박사에게 나가 보라며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받은 서류를 가방에 꼼꼼히 챙긴 모렌 박사가 휘청거릴 듯 무거운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심야의 도살장은 누구나 꺼리는 곳이었지만 이번에 들어온 7명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 7명은 생김새도, 체격도, 성별도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묘한 공통점은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맥이 풀려 있었고, 흐느적거리듯 걷는 걸음에도 별 힘이 없었다.

이들이 걷는 마잔다란의 도살장은 시장 구역에서도 제일 안쪽, 일반인들은 대낮에도 출입을 꺼리는 곳이었다. 다른 어느 곳의 도살장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은 꼭 있어야 하지만 최소한 머릿속에서는 없는 곳이기를 원하는 그 모든 것의 집결판이었다.

이곳은 누군가의 식탁에 오를 먹음직한 살덩이를 위해 동물의 마지막 발악, 혹은 혈관을 잘라 피를 뽑는 비린내 나는 풍경을 감추어두고 있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사실 타르서스의 다른 지역들이 그렇듯 이곳도 관청에서 제대로 관리감독을 받은 흔적은 없었다. 잘린 돼지 목에서 뺀 피는 더러운 배수로에 고여 썩은내를 풍겼고, 먹지 않는 내장과 창자에서 나온 더러운 오물들은 살충제를 잔뜩 뒤집어쓴 채 어딘가로 실려나갈 곳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의 7명은 악취 따위는 맡지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감각해지도록 훈련이라도 받은 것인지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삐끔이 열려 있는 냉장창고 문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들이 멍하던 시선을 처음으로 치켜든 건 어두컴컴한 냉장창고에 막 들어서면서였다. 그들이 켠 랜턴 너머에는 갓 잡은 돼지와 양, 드물게 말과 낙타의 몸뚱이가 쇠꼬챙이에 박혀 거꾸로 뒤집어진 채 이런저런 글자가 쓰여진 꼬리표를 달고 일렬로 줄을 맞춰 걸려 있었다. 그들은 목이 잘린 돼지 사이를 또다시 무표정하게 걸었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처음 보는, ‘특별한 살덩이’가 걸린 앞에서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일제히 위를 올려보았고, 제일 앞의 한 명은 침을 꿀꺽 삼키기까지 했다.

“내 너희 피다이들이 별난 걸 먹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것까지 먹을 줄은 몰랐군.”

창고 한쪽 허름한 나무의자에 앉아있던 한 여자가 그들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자그만 키, 떡 벌어진 어깨, 졸린 듯 반쯤 감긴 눈동자는 며칠 전 아리아노 라자루스 법무장관을 혼돈스럽게 했던 그대로였다.

그는 교단 종교재판소의 가장 유능한 수사관이며 제일의 청백리였고, 코메트부대에서는 장성과 고위신관 수십의 옷을 벗게 만들었던 공포의 헌병감이었다. 이후 노예폭동의 주모자가 되어 자이센 가를 출발조차 못한 채 거의 몰살당할 뻔하게 만들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심지어 카렐 이전, 사상 최고액의 현상금이 가장 오랜 기간 걸려 있었다는 특이한 전력까지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언젠가 카렐의 대관식에도 아스탈, 밀리타와 함께 찾아온 일 있던 쿠마르 우펠루가 도끼에서 피를 닦아내며 서 있었다.

그 둘의 태연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양옆에 서 있는 ‘자경대원’ 6명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반쯤 죽은 사람 같아보였다. 그것이 냉장창고의 차가운 공기 때문이든, 아니면 발목에 쇠꼬챙이가 박힌 채 도살된 돼지처럼 목이 잘려 걸려 있는 3구의 시체 때문이든.

“한 조각 잘라 달라면 기꺼이 주지.”

쿠마르가 도끼 끝으로 시체를 가리켰지만 그들 7명의 피다이들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피다이들은 임무 수행중엔 물 외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지. 5일이건 열흘이건.”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쿠마르 발밑에 구르고 있는 3개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유명한 아라무트 암살수 피다이를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군요. 듣던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기지는 않았는데요? 하긴, 지난번 그 ‘영감’도 막상 보니 그냥 시골 노인네 같은 게.......”

쿠마르가 흐느적거리며 서 있는 그 7명의 주변을 빙 돌았다.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주머니에서 웬 병 하나를 꺼내 코에 대고는 힘껏 들이마셨다. 쿠마르가 신기한 듯 그 병에 손을 뻗었다.

“그만두지 못해!”

코나 시디크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쿠마르가 움직임을 재빨리 멈추었지만 그 명령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제발, 제발 살려줘요, 코나.......”

쿠마르는 눈 깜짝할 새 자신의 옆구리에 닿아 있는 칼끝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차가운 냉장창고의 공기 속에서 그보다 더 차가운 땀 한 방울이 그의 목덜미를 타고 주르르 흘렀다. 그는 겁에 질려 고개도 숙이지 못한 채 코나에게 눈동자만 움직였다.

“도, 독이죠? 제가 찔렸나요?”

“손가락 한 마디쯤 더 나갔다면.”

코나 시디크의 손짓에 그 피다이가 칼을 치우고 다시 품에 감추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흐린 눈동자로 흐느적거리는 정신병자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코나가 경솔한 쿠마르에게 이를 드러냈다.

“피다이에게서 ‘하시시’ 마약을 빼앗으려 드는 게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 줄 이제 알았나? 이 멍청아.”

“그래도 전 고용주인데.......”

십년감수한 쿠마르는 셔츠를 얼른 벗어 혹시 독액이라도 묻지 않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코나가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저 자신이 피다이에게 하시시 병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코나의 곁에 있는 6명의 자경단원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깨달을 경황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놀란 나머지 ‘코나’라는 말을 했었다는 것을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제국의 역사책에도 남을 만큼 악역으로 손꼽히는 그 무시무시한 이름을 생각없이 말했으면서도.

“고용주? 저놈들이 오기 전 세뇌받는 건 명령자 1명의 목소리와 명령을 따를 기간뿐이야. 이번엔 내 명령을 5일 동안 따르도록 계약되어 있지. 애석하게도 넌 아니다.”

자신에게는 명령권이 없다는 말에 움찔한 쿠마르가 슬금슬금 뒷걸음쳐 코나 시디크의 곁으로 재빨리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에 더 겁을 먹은 건 코나의 곁에 있던 6명의 자경단원들이었다. 그들은 가뜩이나 불안하던 이 자리가 더 불편해졌는지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무언가를 서로에게 재촉했다.

“저어.......저흰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결국 총대를 멘 한 명이 코나에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코나가 그제야 그 6명과 바닥에 구르는 3개의 머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말씀하신대로 별궁 경비담당자 놈들도 다 잡아왔고 다른 놈들은 매수해 놨으니 내일 저녁이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이제 저희는.......”

“흠.......그래, 그렇군. 잘 했다.”

코나가 손뼉을 짝짝 쳤다. 기뻐하며 이곳을 나가려던 그들은 무언가 미심쩍은 듯 마지막으로 코나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가, 가도 되는 겁니까?”

코나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그들에게 가라며 출구 쪽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들은 이 소름끼치는 곳에서 일초라도 빨리 나가려는 듯 걸음에 급히 속도를 붙였다. 그리고 뒤이어, 코나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귀청을 때렸다.

“이 안에서 독은 쓰지 마라.”

무슨 뜻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6명의 자경단원들이 악 소리를 지르며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뒤에서는 추격자들의 고함소리도, 뒤쫓는 발걸음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 환각에라도 빠진 듯, 눈앞을 덮쳐드는 잘려진 돼지 시체를 급히 두 손으로 치워내며 허겁지겁 다리를 움직였다.

“아읍!”

돼지 목에서 흘러나온 피와 바닥에 고인 물에 누군가 한 명이 미끄러지며 넘어졌지만 그 누구도 동료를 부축해 줄, 아니 심지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아 주기라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넘어진 동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그의 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제일 앞에서 도망치던 자경단원은 동료들의 걸음 소리가 하나둘씩 줄어드는 것을 눈치 챘다.

“이런, 빌어먹을!”

그 역시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냉동창고의 입구가 조금 전처럼 사람 한 명 가까스로 통과할 정도의 크기로 빠끔히 열려 있었다. 기뻐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갑자기 뒷덜미를 무언가가 확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발소리도, 인기척도 없었다. 숨소리나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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