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04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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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반 가 아들놈 타죽은 시체가 황성 동문에 내걸렸다는 소식도 전했나?”
“말로 전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죠. 어떤 게 그 아들놈 것인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쿠베가 사진 한 장을 번쩍 들어보였다. 이번에 죽은 타르서스 직할군 반란병들의 그럭저럭 성한 시체 혹은 신체 일부가 마치 푸줏간 고기들처럼 성벽에 줄줄이 내걸려 있었다. 그 시체들 중간에 토막토막난 채로 줄에 꿰여 있는 제일 끔찍한 것이 하나 보였다. 화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아 황성에 있는 세작이 찍어 보낸 듯 보였다.
“시체들이 왜 죄다 저 꼴이야?”
아리아노가 보기싫은 광경에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카렐 그놈 은근히 우리 대장 닮지 않았습니까.”
“풉.”
아리아노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죽은 시체는 토막내서 걸었고 살아서 붙잡힌 놈들은 모조리 목을 잘랐고 장교들은 사지를 잘라 죽인 모양입니다.”
“카렐 놈 애비도 성격이 그랬던가?”
“지 자식이 저런 짓 하고 있는 거 알면 저승에서 통곡을 하고 있을걸요.”
“글쎄, 젊을 때는 주페 그놈도 꽤나 잔인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죠.”
이 둘이 수다를 떠는 사이, 반나절 가까이를 프라이팬 위 같은 끔찍한 사막을 가로질러 달려온 5대의 ‘사절단’ 차량이 사막 한중간의 유목민 캠프에 접어들었다. 물론, 이곳이 진짜 유목민 캠프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겉으로 꾸며져 있기는 그랬다.
“어서 오십시오.”
천막에서 허겁지겁 달려나와 허리가 부러질 듯 굽히고 있는 웬 노인의 모습에 아리아노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늙어서 얼굴은 지가 책임져야 한다더니.’
수명개조 당대 70대 정도 되는 듯, 머리가 하얗게 센 머리에 얼굴이 유달리 쭈글쭈글했지만 아리아노가 미리 파악하고 온 이 남자의 수명개조 당시 원래 나이는 60살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외모도 작은 체구에 까무잡잡하고 쉬 늙어 보이는 타르서스인의 인종적인 특징이기도 했지만 그가 들은 바로는 워낙에 신경질적이고 불같은 성격이 인상에 고스란히 묻어났다는 소문이었다.
“아크반 가 종장 자블리스라고 합니다.”
“다른 가문들은 어디 가고?”
차에서 내린 아리아노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찌뿌듯한 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그의 물음에 자블리스 아크반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곧 동맹군이 진주해 대대적인 숙청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모두 겁에 질려 있습니다.”
“하긴 유평황제가 딱 그짓을 한 일이 있었지.”
아리아노가 마치 남 일처럼 대꾸했지만 공포정치의 시작이기도 했던 당시의 ‘타르서스 대숙청’의 실무 책임자 중 하나가 바로 아리아노 자신이었다.
이번에 그가 또다시 타르서스에 온 것도 대신들 중 이곳 사정에 제일 밝다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전력 때문이었다.
“그래도 10여개의 지도가문 중 6개 가문은 일단 저 천막 안에 모였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드시지요.”
“고작 절반? 장난치자는 건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리아노가 따지듯 물었다.
“그대 가문은 뭘 하고? 우리가 애 돌봐주듯 시시콜콜 다 해주기를 바라는 건가?”
반쯤 윽박지르는 아리아노에게 잔뜩 기가 죽은 자블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그들도 대부분 동맹군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다만 이 자리에 직접 찾아오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동향을 좀 더 살피자는 기회주의자들이 많아서.......”
“쯧쯧, 용맹하기로 소문난 타르서스인들이 언제부터 그 꼴이 됐지??”
아리아노가 혀를 끌끌 차며 비웃었지만 자블리스도 지금 그에게 화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다른 무기를 빼들었다.
“동맹군 쪽에서 코리온 리쿠 학장을 이곳으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숙청을 하자는 속셈인지, 설득을 하자는 속셈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희 능력으로는 그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이 늙은이가.......’
이 교활한 종장의 속셈을 바로 간파한 아리아노가 슬쩍 눈을 흘겼다. 동맹군에서 코리온이 왔다는 사실을 슬쩍 흘려 양쪽 사이에 타르서스를 둔 ‘경쟁’을 벌이겠다는 속셈임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그래봤자 너희 가문은 갈 길도 없는 주제에.’
아리아노는 짐짓 걱정하는 척 굳은 표정을 지으며 천막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등장에 안에 모여있던 호족가문 종장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아리아노는 저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은 다른 황제령의 귀족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나우스 2세가 그렇게 초강수를 썼음에도, 타르서스의 호족 세력들은 아직도 그 힘이 남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과 세력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리아노는 윗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지역을 탐내는 ‘조금 다른 외지인’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지난번 아케메니아 포구에서 타르서스 직할군들 중 일부가 반란을 거부했던 것도 그들이 카렐에게 충성스러워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민족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영주’가 어느 쪽을 택했는지 몰라 혼돈스러웠거나, 아크반 가에 반감을 지닌 경쟁지역 출신들이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리아노를 대하는 그들의 표정은 자블리스의 ‘설설 기는’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이번에 연합군을 도와 움직였더니 기껏 남은 게 뭡니까? 우리 가문에서 보낸 가병 150명이 몰살당했단 말입니다. 나머지 200명도 붙잡혀서 억류상태고.......”
“황도에서 코리온인지 뭔지 하는 놈까지 온다는데 무언가 책임을 져 줘야지요. 우리보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들은 아리아노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불평부터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리아노는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노예가 내온 사과차의 달콤함만을 음미하며 그들의 불평을 듣고만 있었다.
딴생각 할 거리를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아노는 자블리스 뒤의 구석에 서 있는 웬 사병부대 여자 장교에게 문득 시선이 멎었다. 5척 7촌(171cm) 정도의, 군인으로는 작은 키였지만 키에 비해 떡 벌어진 넓고 다부진 어깨를 보아 아주 초짜 장교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구부정한 허리에 불균형해 보이기까지 하는 긴 팔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완전히 흐트러진 자세로 서 있었다.
‘하여간 군기 빠진 군대라고 안 할까봐......’
살짝 눈가를 찡그렸던 아리아노는 문득 그 여자에게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원래 눈이 작은 것인지, 아니면 졸린 것인지 반 쯤 뜬 눈꺼풀 아래 희미하게 눈동자가 보였지만 구부정한 자세와 처진 눈썹 때문에 상대의 시선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나도 참........이런 데 와서까지.’
여자를 응시하며 반사적으로 손을 주무르던 아리아노는 자신의 현역 법무관 시절 습관이 무심결에 나왔음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지금은 정치가로 변신한지 오래되었지만, 그도 한때는 소위 말하는 ‘악질’들과 현장에서 사투를 벌였던, 제국 제일의 형사 법무관으로 손꼽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최소한 ‘보통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정도를 구분할 수 있는 직업적인, 아니 본능적인 감각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내가 다루었던 사건이었나?’
아리아노는 옛 사건들이 어설프게나마 남아있는 머릿속을 잠시 뒤져보았지만 호족들이 옆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현역 시절 워낙 많은 사건들을 다루어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기랄, 내가 알 게 뭐야.’
아리아노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어쨌든 지금의 아리아노에게는 협상, 그리고 타르서스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사이코인지, 범죄자인지 알 수 없는 저 불쾌한 여자의 정체 따위에 괜한 에너지를 허비할 여유는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거의 10분이 넘게 실컷 ‘분풀이’를 하고 나서야 호족 대표들은 비로소 잠잠해졌다.
‘너희들이 그 모양이니 촌구석 호족 수준을 못 벗어나지.’
아리아노가 입가에 뜬금없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타르서스 호족들은 내내 대답이 없는 그의 모습에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듯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침묵으로 분위기를 차갑게 식혀놓은 후, 아리아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가?”
“예?”
“카렐 그 작자가 타협을 원했다면 이부대신인 볼토 트라우제를 보냈거나 지 비서실장인 우베 마르코스를 보냈겠지. 너희와 같은 타르서스인이니까. 그런데 왜 하고많은 놈들 중에 코리온 그놈을 보냈을까?”
“그건 그 사람이 서부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타르서스는 전통적으로 서부와 친분이.......”
“그놈 수족 중에 그쪽 법무대신 두겐 플레렌이 있다는 건 혹시 아나?”
“......”
아리아노가 그 서슬퍼런 시선을 부릅뜨며 호족들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자가 여기 와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내가 아니고 그대들일 텐데?”
협박에 가까운 한 마디와 함께 그가 내던진 건 조금 전 쿠베가 보여 준 황도의 성벽 사진이었다. 순간 충격을 받은 자블리스가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보좌관의 손에 붙들렸고, 나머지 호족들도 기겁을 하며 입을 가려야 했다.
“두겐 그 놈은 아마 역대 법무대신 중에 제일 많은 처형을 집행한 놈이 될 것 같아. 물론 제대로 된 정식 법무대신으로 역사에 남지는 못할 테지만 말이야. 그건 내 몫이니.”
아리아노가 여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제야 자신들의 위기를 깨달은 호족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구석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원숭이 100마리가 모인다고 방정식이 풀리겠냐.’
아리아노가 혼자 비웃음을 퍼부었다. 그는 저들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호들갑인지 굳이 듣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이번 참에 동맹군과 연합군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해서 가장 많은 ‘떡밥’을 내민 쪽을 물으려 했을 터였다. 하지만 카렐이 초강경파인 코리온을 파견하면서 시작부터 계획 자체가 틀어진 것이었다.
물론, 아리아노도 이들을 굴복시키러 온 것이지 미끼까지 줘 가며 적당히 달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코리온이라는 인간이 적당한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이상, 그가 앞장서 사탕을 내밀어 이미 나쁘게 든 이네들의 버릇을 더 나쁘게 만들어놓을 필요는 없을 테니.
잠시 후, 굳어진 표정의 호족들이 다시 아리아노의 앞으로 돌아왔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들 역시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아리아노가 속으로 이들이 할 말을 대신 웅얼거렸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것을 먼저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타협해서.......”
“간단하지.”
아리아노가 딱 잘라 대답했다.
“코리온 리쿠 학장을 죽이고 타르서스 별궁을 점령해. 별궁을 탈환하고 이곳의 격벽식 방어체계를 해제하면 수에니에 있는 근위대를 별궁에 진주시키지.”
호족들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아리아노는 조건만 제시했을 뿐, 이들이 좋아할 ‘당근’은 하나도 내놓지 않은 셈이었다.
“바로 북쪽의 트라이앵글 사바나에 동맹군 15만 대군이 있습니다. 그네들에게서 우리의 안전을 어떻게 담보해 준다는 겁니까?”
“직할군에 있는 그대들의 사병(私兵)들을 동원하면 2만은 넘을 텐데?”
순간 얼굴이 붉어진 호족들이 발끈했다.
“지금 농담하십니까. 15만 대 2만이라뇨! 그나마 우리 사병들은.......”
“그래, 손꼽히는 오합지졸들이지.”
아리아노가 여전히 맘껏 빈정거렸지만 저들에게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호족들이 참담해진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았다. 이제 아리아노가 잔뜩 생색을 내며 당근 한 조각을 던져줄 시간이었다.
“좋아. 근위대 ㅤㅋㅞㄹ크 토벌군 2만은 이제 별로 할 일이 없어졌으니 그네들을 트라이앵글과의 경계에 파견해 주지. 비엔에 있는 남부연합군 보충부대 12만도 곧 황제령에 진주할 테니까 그네들도 함께. 그 정도면 됐지?”
아리아노가 옆에 있는 쿠베에게 씨익 눈웃음을 지으며 던진 ‘당근’이었지만 실상 당근이라기보다는 연합군의 잇속 챙기기였다. 타르서스에 14만이나 되는 연합군이 진주한다는 건 타르서스를 막아준다는 것이 아닌, 이곳을 기지로 해서 트라이앵글의 동맹군 예비병력을 배후 공격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건.......”
호족들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그다지 똑똑하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샤드니가 이끌고 있는 트라이앵글의 15만 동맹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질이 문제였다.
그 많은 숫자 중 샤드니가 당초 데려왔던 5만 정도의 서부 경보병과 약간의 서부 낙타병이 그나마 당장 쓸 만한 전력이었고 10만에 달하는 동맹군 직속 보병들은 거의 대부분 신병이었다. 그들은 지난 전투에서 황도를 지켜낸 고참병들과는 달리 이번에 갓 지원을 받아 기초훈련만 마친 상태에서 부대배치만을 기다리고 있는 햇병아리들이었다.
며칠 후, 탈라스에서 올 기병 전력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가디언도, 기동병력도, 심지어 경륜도 없는 반쪽짜리 군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남북에서 근위대까지 포함된 연합군의 압박에 직면한다면 전멸까지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카렐에게는 지금 황도에 데리고 있는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만이 남게 될 테고, 반격은 고사하고 연합군 재공세에 황도를 지켜내는 것을 걱정해야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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