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02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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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는 내용인데......,잘 아시는군요.”
사에나가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황제를 올려보았다. 지금껏 누군가, 그것도 처음 만난 어마어마한 윗사람에게서 이런 호감을 느껴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카렐은 아침 겸해서 주머니에 넣어 온 마른 고기조각을 사에나에게 불쑥 내밀었다. 황제의 이런 엉뚱한 행동에 잠시 당황했던 사에나는 조심스레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최소한 자네는 어머니의 본명을 알았을 것 아닌가?”
“저도 모릅니다.”
사에나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도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가까이 하면 같이 취급받을 거라면서 오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녀들 사이에서도 ‘걸레’라고 불릴 정도로 따돌림 당하셨으니......”
“상급귀족가의 종장이고 총리대신이 그런 하녀와 사랑에 빠졌다니, 왠지 비현실적인 삼류 연애소설 같지 않나?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것 같은데?”
카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다른 말을 꾹 눌러 참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사랑 같은 건 애당초 없었으니까요.”
사에나가 마치 한숨처럼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가 신세 고쳐보려고 아버지를 유혹했다고 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강제로 범했다고 하셨죠.”
“비슷한 상황에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솔직히 어머니 말은 믿지 않습니다. 눈짓 한 번이면 수십의 미녀들이 제 발로 침실에 들 텐데 미인도 아니고, 집안에서 제일 더러운 일만 하던 밑바닥 하녀를 겁탈할 이유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니도 수명개조 후세대인데 배란촉진제도 없이 저를 임신할 이유도 없고요.”
“그래.......그랬겠지.”
카렐은 근질근질한 입을 애써 참으며 그의 출생에 관한 물음을 짧게 마무리했다.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카렐은 난생 처음 들어 본 이 여자, 아니 이 모녀의 삶이 마치 자신의 추억인 양 익숙하게 느껴졌다.
물론 카렐은 황제를 처음 눈앞에서 마주한 이 장교 역시 자신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카렐이 새 고기조각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어머니는 지금 어디 있나? 아직 쉐너 가에 남아 있나? 이렇게 훌륭히 장성했으니 이젠 자네가 모실.......”
순간, 잠시나마 밝아졌던 사에나의 표정이 싹 굳어버리며 처음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바로 돌아갔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왜?”
물어 놓고서도 카렐은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사에나의 차가운 대답은 그의 예감 그대로였다.
“목을 매 자살하셨습니다.”
“......”
카렐은 더 이상의 질문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지만 어느새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조금씩 격해진 사에나는 굳이 묻지 않았어도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유서에는 수치스런 삶을 더 이상은 계속할 수 없다고.......미안하다고 하시는 내용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꿋꿋이 버티시던 분이 제 졸업을 코앞에 두고 왜 갑자기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카렐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사에나의 아랫입술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붕대를 칭칭 감은 손으로 콧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재빨리 닦아냈다. 카렐이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딸이.......아니 세상이 자신을 그저 한물 간 창녀 정도로 알아주기를 원해서였을지도 모르지.”
사에나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황제를 힐끔 올려보았다. 그는 황제가 무언가 아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대놓고 물을 정도로 눈치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슬퍼하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아버지는 그 뒤로 조금 이상해지셨습니다. 정무에서도 관심을 끊고는 갑자기 주색에 빠져드셨고 씀씀이도 커지셨죠. 어차피 망할 세상 있는 재산 다 쓰고나 죽자고 가문 재산도 마구 탕진하셨고 .......하렘까지 만들어서 가문 사람들의 비난을 자초하시고.......”
“그래, 내가 더 잘 알지.......그맘때였군.”
카렐 역시 쉐너 총리의 무덤을 문득 돌아보았다.
말년에 그렇게 재산을 탕진해버린 쉐너 총리는 페로와 손을 잡은 그 여동생에 의해 공직에서 축출되었고, 종권 역시 박탈당하는 수치스런 신세가 되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막후에서 진행했던 사람이 바로 카렐 자신이었다.
“하긴, 단순한 양반이긴 해도 나름대로 성실했던 사람이 갑자기 변해 버린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카렐은 쉐너 총리에 대한 표현에서 가장 어울릴 ‘무능한’이라는 표현을 일단 뺐다.
사에나가 아버지의 묘지를 향해 돌아서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쁜 가장은 아니셨습니다. 저와 어머니를 홀대하신 것만 빼면.......어머니 돌아가신 이후로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고, 가끔은 죽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고 이유없이 협박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정말로 칼을 뽑아들고 절 죽이려고도 하셨지만.......결국은 못 하시더군요.”
사에나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폐하께서도 잘 아실 테니.......”
사에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게 종권과 재산을 박탈당하고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치른 ‘재산전’이 한때 화려하게 콜로니를 주름잡았던 그 개국공신의 비참한 최후였다.
“원래 재산전이라는 게 그렇지.”
카렐이 최대한 짧게 마무리했다. 쉐너 총리의 죽음에서 카렐 역시 자유롭지는 않은 처지다보니, 그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네와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임명장을 가져오는 거였는데.”
“예?”
“자넬 2계급 특진시키는 서류에 어젯밤에 서명했네. 아마 오늘 중으로 비서실에서 자네 병실로 사람이 갈 거야. 사에나 쉐너 중랑장.”
“......”
사에나는 고맙다던가, 성은이 망극하다던가 하는 입에 발린 말조차 못 한 채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중랑장이면 연대장급에 해당하는, 장군 직전의 고위 무장이었다. 전시다보니 1계급 특진은 그럭저럭 흔했지만 2계급 특진은 어마어마한 전공, 그리고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상당히 높은 평가가 아니고서는 있기 힘든 일이었다.
“보안국에서 중랑장은.......”
사에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보안국은 군과 같은 계급체계를 운영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별도의 조직이었고, 보안국에서 중랑장급은 5품 부국장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자넬 부국장을 삼고 싶지는 않아. 아직은.”
카렐이 딱 잘라 말했다.
“자넨 내 비서실로 파견될 거야. 수석비서관 우베가 내치 문제에는 밝지만 군이나 공안기관에 경험이 없는 게 문제야. 앞으로 군에 관련된 사안이나 공안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자네가 맡아주면 좋겠어.”
‘황제 비서관’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놀랄 만도 했지만, 사에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이번에도 감사하다느니 하는 식의 표현은 전혀 없이, 감정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자네 반응을 보니 내가 사람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드는군.”
카렐이 손을 흔들며 수행원들에게 다시 돌아섰다. 카렐은 이번에도 고개만 까딱 숙이는 사에나를 뒤로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떤 사람들은 아랫사람의 저런 무반응에 화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카렐의 입가에는 도리어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내 자네를 등용한 게 그 때문이야.”
자리에 돌아온 카렐은 조문객들 한쪽에 서 있는 보안국장 루토에게 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당장 좀 해 줘야 할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사에나 쉐너 중랑.......아니, 중랑장의 어머니에 관해 모든 걸 조사해오게. 그리고 슈엘러 쉐너 총리의 말년 행적에 관한 것도 내 직접 조사한 일 있지만 다시 찾아보면 좋겠어. 아무래도 중요한 걸 하나 찾은 것 같아.”
“예? 아, 알겠습니다.”
황제의 뚱딴지같은 명령에 루토가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렐이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추며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성전 당시 붙잡힌 교단 포로들 중에 에아 교단에 관계된 고위급 포로들 명단을 함께 가져오도록 해.”
“예? 그건 뭐에 쓰시려고.......”
루토의 쓸데없는 호기심에 카렐이 낯을 살짝 찡그렸다. 당황한 루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냉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명하신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공신 묘역의 조문객들 중간에서 살며시 빠져나온 밀리타는 어제 이미 한바탕 장례가 지나간 황족 묘역으로 조심스레 향했다. 황실 묘지 북쪽 고지대에 자리잡은 그곳은 선대 황제들과 리쿠 가의 다른 선조들, 운 없이 일찍 죽은 황족들이 묻혀 있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높은 곳, 세나우스 2세 묘역의 옆에 있는 빈 ‘공터’는 황제가 이후 자신의 대묘(大墓)를 건립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이었다. 황제 묘역이 위치한 이 언덕은 황실 묘지는 물론이고 황궁 컴플렉스, 넓게는 황도 전체의 전경까지도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푸른 잔디로 덮인 그 넓은 공터의 중간에는 바로 어제 만들어진 가묘(假墓) 하나가 조금은 생뚱맞게 위치해 있었다. 그 위에는 조립식 건물로 된 작은 사당도 세워져 있기는 했지만 비석도 없었고, 어제 덮은 흙은 떼도 채 자라지 않아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포위가 풀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오시다니, 역시 당신의 정보망은 빠르군요.”
묘 앞에 서 있던 보통 키에 반백 머리칼의 남자는 밀리타의 물음은 무시한 채 무덤을 가리키며 엉뚱한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시에 하루만에 이 정도 해 놓은 걸 보니 나름대로 신경을 꽤 썼나보군. 저년 가슴이 찢어졌겠어.”
남자가 밀리타에게 살짝 눈웃음을 던졌다. 딱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반백의 머리칼 덕택에 언뜻 수명개조 당대의 중년 남자처럼 보였다.
“비석이나 정식 사당은 전쟁 끝난 후에 세운다고 하더군요.”
“글쎄, 그러려는 건지, 아니면 이참에 묘지를 거창하게 지으려는 속셈인지 누가 알겠어. 보아하니 지 할머니 못지않게 통은 큰 것 같던데.”
“갓 죽은 ‘아들’ 묘 앞에 오셨으면 좀 슬픈 척이라도 하시죠.”
밀리타가 멀리 보이는 묘지 관리인들과 경비병들을 의식하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아스탈은 그제야 표정을 싹 바꾸며 이라즈의 묘를 향해 돌아섰다.
“원래 표정연기에는 서툴러. 누구처럼 표정관리를 따로 배운 건 아니거든.”
“그래도 수십 년을 길렀는데 미운 정에라도 감정이입을 좀 해 보시죠.”
“싫어.”
아스탈이 딱 잘라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 자체가 워낙 차갑다보니 설사 누가 본다고 해도 그가 아버지로서의 슬픔에 의심을 품을 정도는 아니었다.
“네 짓이냐?”
“예?”
“따지자는 건 아냐. 어차피 저놈하고 함께 죽을 운명이었으니 네가 죽였다고 해도 내가 그것 자체로 화낼 이유는 없지. 다만, 내가 궁금해 하는 건 이놈을 죽인 ‘이유’야.”
“괜히 멋대로 몰아붙이지 말라고요. 이놈은 파편에 맞아 죽었다고요!”
격분한 밀리타의 외침에 아스탈은 씨익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묘를 향해 돌아섰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도대체 당신은 날.......”
“니딘투벨이 행방불명된 건?”
“도대체 안 좋은 일만 생기면 모조리 나한테만 뒤집어씌우는군요. 지금 날 못 믿는 건가요?”
“그럼 언제는 믿었는 줄로 아나?”
아스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밀리타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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