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01 회: 파트 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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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표정이 심각한 거 보니까 뭔가 중요한 일이 있나 보죠, 오르마즈?”
오르마즈와 얼굴을 바싹 들이댄 유평은 비로소 진지해진 표정을 지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완전히 돌변하는 그의 표정에 오르마즈는 순간 전율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오르마즈는 유레트가 힐끔힐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주방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옹주마마께 주어진 첫 번째 ‘큰 일’이라고나 할까요.”
“후훗.”
유평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헛웃음을 지었다.
“큰 ‘일’이냐, 큰 ‘함정’이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설마하니 제가 함정거리를 가져왔겠습니까.”
유평은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오르마즈를 안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오르마즈가 꺼내 내민 ‘위임장’과 황제의 편지를 말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유평은 잠시 후, 오르마즈를 살짝 흘겨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프로젝트군요?”
“후훗.”
오르마즈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세부적인 면은 제가 조금 손을 보았지만.......지난번 옹주마마께서 제게 술김에 말씀하신 그 내용 그대로입니다.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화내셔도 제 대답은 ‘어쩔 수 없었다.’ 뿐이군요.”
“하긴, 내 생각이었다고 하면 그 밴댕이속 아버지가 들어 줄 리가 없으니.”
유평은 무심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살짝 드러내며 편지를 도로 접어 품에 넣었다.
“날 도와줄 거죠?”
유평이 다시금 오르마즈를 바싹 잡아끌었다.
“그 말씀만은 폐하와 똑같으시군요.”
유평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오르마즈는 그런 그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단호한 투로 대답했다.
“못.......아니, 안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르마즈의 냉랭한 대답에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 유평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혼자 처리하십시오. 전 다른 할 일이 있습니다.”
“말하는 투를 듣자하니, 내가 모르는 편이 나은 일인 것 같군요?”
오르마즈는 그 질문에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치 저승사자처럼 차가워진 얼굴로 마치 경고하듯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어머니도 지켜드리고요. 꼭입니다. 이제부터는 떨어지는 잎사귀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유평이 여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오르마즈를 응시했다. 이 똑똑한 ‘영웅’이 결코 빈말로, 혹은 지나가는 말로 그런 말을 할 리는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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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의 파티는 카렐에게는 최악이었다. 페로는 카렐의 기분은 헤아려주지도 않은 채 혼자 좋은 티는 다 내고 다녔고, 술을 자제 못한 아메스는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가디언들에게 볼썽사납게 업혀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물론 해가 밝아오는 지금까지도 못 깨어나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덕택에 오늘 아침에 있을 집단 장례식도 황제, 그리고 황후를 대신한 황비 네페티 둘만이 참석해야 할 모양이었다.
“시종장이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여쭈어왔습니다.”
“그냥 놔두라고 해. 나보다 더 피곤했을 사람이니. 꼭 아침에 침실을 청소하라는 법은 없잖나.”
카렐은 물음을 던지는 비서관의 심상치 않은 시선에 일침을 박으며 딱 쏘아붙였다.
지난밤, 혼자 잠이 든 카렐을 지켜 준 건 니사 뿐이었다. 그는 약속대로 밤늦게 찾아와 간단한 검진과 함께 숙면을 취할 수 있는 향신료까지 준비해 주었고, 우울해 있던 그의 곁에 잠이 들 때까지 있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황제가 잠에서 깨었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도 그의 손등에 얼굴을 묻은 채 쿨쿨 잠들어 있는 주치의의 모습이었다.
세상모르게 잠들었던 그를 비빈이 아니고서는 감히 오를 엄두도 내 보지 못할 황제의 침대 위에 눕혀주고 나온 건 딱히 보답한다는 식의 거창한 의미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피곤할 정도로 진지한 그 주치의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잠을 깼을 때 얼마나 당황할지 내심 궁금해 하던 카렐의 짓궂은 장난이라는 편이 더 정확했다.
“침실 지키는 시녀 보고 그 친구 막 깨어났을 때 꼭 사진 찍어놓으라고 해. ‘1/4 승은’ 기념으로 하사할 테니까.”
카렐의 말에 비서관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곧 표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막 열린 엘리베이터 문 밖에는 황실 묘지에서 있을 장례식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황비 네페티가 먼저 나와 황제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제국의 관습에도 아침 시간에는 매장이나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수성전에서 나온 많은 전사자들의 시신 수습과 염, 입관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데다가 그간 추웠던 날씨까지 갑자기 풀리면서 상황은 더 다급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연합군들이 미처 거두지 못한 시체 수천 구까지 한시바삐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모두에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준다는 건 엄두도 못 낼 판이었다. 태부족한 보관시설 때문에 처리가 후순위로 미뤄진 채 성벽 밑에 적치된 적군 시체에서는 슬슬 악취까지 풍겨가며 수비군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쯤 되면 연합군 측에서 ‘인도적인 시신인도협상’을 제기할 만도 했지만 아마도 이런 상황을 일부러 노려서인지 도리어 그들 측에서는 시체를 가져가겠다는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적군 시체는 그대로 태워버리자’는 의견까지 나온 것도 이맘때였다.
어쨌든, 그 덕택에 바빠진 카렐은 ‘황실 묘지에 묻을 사람들만이라도 최대한 빨리 매장해라’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뜬금없이 열린 이 장례식도 결국은 그 때문이었다.
궁에서 나와 황궁 북쪽, 황실 묘지의 ‘공신 묘역’을 향하는 카렐에게 이번 장례식을 주관할 황비 네페티가 조심스레 말했다.
“유시프 대장군과 오난 장군의 유가족들은 시간이 너무 급박해서 불러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안전을 위해 다른 우리 측 사람들과 함께 타르서스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네페티가 황실 묘지 한쪽의 공신묘역에 막 만들어지고 있는 2개의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렐은 별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신묘역을 빙 둘러보았다.
사실 지금껏 ‘황제의 손에’ 죽은 사람은 많았지만 ‘황제를 위해’ 죽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보니 공신묘역은 몇몇 개국공신들의 묘지 외에는 지금껏 텅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그나마 제2개국공신이었던 전 총리 슈엘러 쉐너 경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주인도 없이 한동안 버려진 묘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렐이 황도를 차지한 이후로 이곳은 하루도 삽이 꽂히지 않은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황제를 구하고 죽은 토로 로버넬 경이 제일 먼저 이곳에 묻혔고, 사르키스, 라손도 이곳에서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서로 이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전사와 함께 1계급씩 승진한 유시프 대장군, 오난 장군을 비롯해 전공을 세우고 간 200여명이 이곳에 묻힐 차례였다.
네페티가 오늘의 장례식을 주관하게 된 건 오늘의 장례식이 포구에서의 전사자들을 위한 것이다 보니 서부 출신들, 혹은 서부와 전통적으로 유대가 깊은 타르서스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카렐은 이번에 죽어간 사람들의 관이 내려지고, 네페티가 그들의 명복을 비는 간단한 행사를 주재하는 광경을 한 발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유시프 대장군과 오난 장군의 장례는 카렐에게도 의미가 남다른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정말로 충성을 바쳤던 건 황제라기보다는 네페티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하급장교, 헌병들의 장례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카렐은 문득 행사 한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어깨에 검은 코트를 걸친 채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한 여자를 발견했다.
“내가 그대의 인사카드에서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웬 큰 손이 어깨를 짚자 움찔하며 놀라 돌아선 그 여자의 얼굴은 가득한 상처 자국과 드레싱으로 언뜻 알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감정을 도려낸 듯 차가운 표정만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사에나 쉐너 중랑이라고 했나?”
그의 인상을 확인한 순간, 카렐은 자신과 그다지 닮지도 않은 그의 얼굴에서 마치 거울을 본 듯한 착각, 혹은 동물적인 동질감에 잠시 빠져들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쉐너 중랑이 잘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려 했지만 카렐이 그의 어깨를 급히 막았다.
“몸도 잘 못 가누는 환자한테 인사시킬 정도로 뻔뻔한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아.”
“알겠습니다.”
보통의 무장들이라면 황제의 그런 공치사에도 어떻게 해서든 인사를 하고야 말았겠지만 쉐너 중랑은 정말로 인사를 하지 않은 채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자네 시선이 가 있는 곳을 보니.......아니, 얼굴을 보니 아버지가 누군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없는 편이 나았을 이방인입니다. 최소한 제게는.”
사에나는 이곳 공신 묘역에서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2개국공신 슈엘러 쉐너 전 총리의 묘지에서 애써 시선을 떼었다. 카렐은 그에게 ‘아버지 생김새를 많이 닮았다’고 말하려다가 분위기를 보아 참기로 했다.
사실 쉐너 총리는 베흔과 동격인 제2개국공신이라는 명예를 차지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초급장교 시절 많은 전투에서 공훈을 세워 인정을 받은, 용감하고 훌륭한 야전지휘관이었지만 단순한 성격에 정치적인 식견도 부족하다보니 전략가로는 성공할 수 없는 그릇이었다. 그가 높은 지위로 올라갈수록 능력의 한계를 보이며 ‘명장’의 반열에서 조금씩 추락해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샤미르가 그에게 그런 과분한 감투를 씌워 준 것도 민병대 내에서 온건파와 날을 세우고 있던 강경파에 대한 정치적인 배려였을 뿐, 그의 공훈을 정말로 인정해서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세나우스 3세 치세에는 내각의 수장인 총리대신까지 맡았으니 그맘때 제국의 치세가 엉망진창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말년의 그는 방탕한 생활로 중앙귀족 제일의 명문가인 쉐너 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기까지 했었다.
물론 죽은 쉐너 총리 자신은 한때 오르마즈와도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성전의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바랐겠지만, 애석하게도 사람들의 뇌리에는 ‘세나우스 3세 치세를 망쳐먹은 무능하고 방탕한 총리’의 이미지로 더 강하게 남아있었다.
카렐이 사에나 앞에서 친아버지 쉐너 총리에 대한 말을 아끼는 것도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그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사에나 쉐너, 하급귀족이고 중앙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수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더군. 그런데 출생증명서에 어머니가 안 나와 있고 귀족인데도 중간 성이 없는 걸 보니.......”
“창녀 따위의 성을 물려주느니 없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아버지가 결정하신 겁니다.”
혼외자, 혹은 인공수정 정도를 생각하고 말을 이으려 했던 카렐은 뜻밖의 대답에 막 하려던 말을 얼른 멈추었다. 쉐너 가 사람들이 단체로 인사를 왔을 때, 이 여자만 빠져있던 이유를 알 만도 싶었다.
“그래도 이름은 좋은 것으로 정해주었군.”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겁니다.”
사에나가 눈을 반쯤 치켜뜨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은 막 관을 내리고 있는 유시프 장군의 묘에 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거대한 묘를 향해서도 드문드문 움직이고 있었다.
“‘창녀 따위’가 알 만한 단어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 텐데?”
카렐의 물음에 사에나는 갑자기 울컥하는지 입술에 힘을 꽉 주었지만 지금까지처럼 겉으로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카렐은 사에나의 유난히 뾰족한 턱과 도드라지게 날카로운 콧날, 매처럼 번득이는 눈동자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6척(180cm) 정도의 훤칠한 키에 군인 치고는 가냘파 보이기까지 마른 몸매 역시 그의 시선을 끌었다.
“저도 어머니에 관해서는 자세히 모릅니다. 성전이 끝나고 귀향하실 때 집안에 데려왔다는 것밖에는. 어쨌든 아버지에게 어머니 이름은 ‘창녀’ 뿐이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건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카렐은 또다시 얼음처럼 굳어 있는 이 여자를 문득 돌아보았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흠잡을 곳 없는 이 명문가의 여자가 세상을 향해 왜 이리 단단한 벽을 두르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지금 다시 보니 아버지를 별로 안 닮았군. 그 양반은 보통 키에 골격이 떡 벌어진 전형적인 무골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자네 아버지는 ‘사에나’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양반이야.”
“어머니가 저보다도 크셨습니다. 마르신 데다가 등에 활과 석궁 문양의 큰 문신이 있어서 사람들이 ‘활잡이’라고 불렀었죠. 아마 어머니도 무슨 뜻인지 알고 지으신 건 아닐 겁니다.”
“활이라.......”
카렐이 눈가에 살짝 힘을 주었다. 우연인지, 사에나의 허리에 걸려 있는 작은 석궁을 힐끔 보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내 생각엔 알았을 것 같은데? 교단 초기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영웅의 수호조(鳥)였지? 자네 이미지가 ‘사에나’하고 딱 어울리는 걸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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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도 글을 올렸지만;; 제 컴에 또 사고가 있었습니다. 연재분에도 약간의 손실이 있었고, 출판본 작업에도 많은 지장이 생겼습니다. 다른 본업이 있다보니 복구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행여 연재주기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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