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98 회: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기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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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의 ‘응징’을 원하십니까.”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코리온의 물음은 카렐에게 조금 더 강경한 대응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짐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학장을 보낸다는 건 이미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가.”
카렐은 옆에 있는 우베가 놀라 움찔하는 것을 느꼈지만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복종하면 살려두고, 저항하면 죽이고. 둘 중의 하나 뿐이지.”
“이번에 배신을 저지른 아크반 가문은 어쩌실 참이십니까.”
코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가 채 무어라 의견을 내놓기도 전에, 카렐의 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감히 군주의 뜻을 저버렸으니 한 놈이라도 살려둘 수 있겠소.”
자리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카렐의 선고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그 일족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들여 교수하고, 주동자는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할 것이니.”
카렐의 잔혹한 선고에 코리온 역시 별 이견이 없는지 무표정했지만 그 아버지 예르마크 경은 조금 놀란 듯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그네들을 살리든 죽이든, 우리에게 중요한 건 빨리 일을 수습하는 것이니......”
코리온이 마음약한 아버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제일 먼저 나섰다.
“지금 당장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카렐이 미처 구체적인 지시조차 내리기도 전에, 코리온은 휙 돌아서며 파티장을 나서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지도로 눈길을 돌리려던 카렐은 코리온을 쫓아 허겁지겁 달려가는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이납. 도대체 너한테는 예의가 콧구멍에 달라붙은 거냐? 2달만에 돌아온 놈이 황제에게 문안인사 한 번 안하고 있어?”
카렐의 핀잔에 그제야 실수를 알아챈 자이납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는 다시 허겁지겁 코리온을 쫓아가려 했다. 카렐이 그에게 손을 뻗으며 쏘아붙였다.
“가긴 어딜 가. 넌 보안국 경호대 소속이니 이젠 복귀신고하고 황도에 머물러야지?”
“아, 아니, 폐하, 지난번에 학장님을 지켜드리라고......”
“그건 탈라스에서 그러라는 거였지, 누가 개인경호원으로 취업시켜 준 건줄 알아?”
“헤헤헤.”
자이납이 갑자기 두 손을 모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지었다. 그의 능글능글한 웃음 속에 깃든 의미를 눈치챈 카렐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리고는 마지 못하는 척, 그에게 가 보라며 손을 내저었다.
“네놈 혹시라도......”
카렐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자이납은 먼저 사라진 코리온처럼 어느새 문 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누굴 닮아서 온 건지.”
허탈해진 카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테이블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 애가 실패해서 타르서스가 적 쪽으로 완전히 돌아설 가능성도 염두에 두시고.......”
매사 신중한 예르마크 경이 입을 열자 카렐이 기다렸다는 듯 펜을 집어들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경우도 생각해야지요.”
서슴없이 대답은 했지만 카렐도 조금은 막막했다. 타르서스는 면적만으로 따지면 프라임 지역과 맞먹는 거대한 대륙이었다. 게다가 동맹군의 예비병력 집결지인 트라이앵글의 배후지라는 것도 문제였다. 이들이 카렐을 향해 칼을 돌린다면 트라이앵글에 집결한 10만의 동맹군 예비병력까지 고스란히 발이 묶인다는 뜻이었고, 적을 향한 반격 또한 묶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예비 병력을 동원해서 타르서스 전체를 모조리 쓸어버려야지 별 수 없지. 최대한 빨리.”
카렐의 극단적인 한 마디에 제일 놀란 건 뒤에 있던 우베였다. 그는 놀라 들썩했던 어깨를 얼른 추스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대가 걱정하는 식이 아니니 놀랄 것 없네, 마르코스 비서관.”
“알겠습니다.”
우베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드리워 있었다. 카렐이 그런 그를 돌아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다면 자네가 학장을 열성적으로 도와야 할 이유는 충분하겠군?”
“예?”
“타르서스 사정에는 누구보다 자네가 정통하니 함께 가서 학장을 도왔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오지로 가라는 말에 바로 잔꾀부터 부리려 했을 우베였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그는 별다른 넋두리도,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 코리온과 자이납이 나간 길로 급히 나섰다. 카렐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고 선 호위대장 카토에게 손짓을 보냈다.
“카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네가 10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따라가서 학장 일행의 곁을 지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바로 돌아서려는 카토의 어깨를 카렐이 덥석 붙들었다. 그는 카토의 귀에 대고 무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카토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렐이 그에게 확인을 받듯 단호하게 물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폐하. 명대로 시행하겠나이다.”
“내 팔자야.”
연회장을 나선 우베는 타르서스에 남아있을 가족과 친척들을 떠올렸다. 카렐이 그저 홧김에 빈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카렐이 ‘쓸어버린다’라고 표현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타르서스에 피바람이 몰아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전에 코리온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카렐은 반드시 그럴 사람이었다. 1,2년 전, 과거라면 모르지만 지금의 카렐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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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번과 바니샤드에게 감세 혜택을 주면서 위태로워진 황실 재정을 뒤늦게 절감한 마시야스 황제가 어렵게 찾아낸 수입원은 지금까지 버려져있다시피 했던 ‘수베르’였다. 수베르는 많지 않은 유목민들만이 사는 외딴 지역이었지만 그곳의 목초지는 언제든 농지로도 변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이었다.
그런 곳을 바로 이웃에 두고서도 인근의 제후들, 혹은 이주할 땅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농업 정주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한 건 유달리 호전적이라고 알려진 유목민들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호전적’이라는 건 외부인들의 관점에서였을 뿐, 그들은 외부의 정치문제에도 밝지 못했고, 자신들의 넓은 땅을 ‘좀 더 경제적이고 생산적으로’ 이용해 볼 생각 따위도 전혀 없는 순박한 유목민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야만족 취급하는 외부인들이 땅에 관한 일에서만 우호의 미소를 보내는 위선이 싫어서 분노한 것일 뿐, 이웃 탈라스의 사촌 유목민들처럼 개방적이고 호탕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양쪽 지역 지도자들의 정치적인 해법의 차이가 이후 두 지역 유목민들의 운명을 갈라놓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때까지만 해도 거친 사막뿐인 탈라스보다는 성장 잠재력이 큰 수베르의 유목민들이 ‘개화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계속 구멍이 커져가는 황실 재정을 보다 못한 황제가 남극성당을 졸업하고 한량 생활을 하고 있던 오르마즈를 급히 불러들인 것도 수베르의 ‘개척’ 문제를 상의하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물론 황제가 맞닥뜨린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테번과 바니샤드의 독립선언만은 어떻게 힘겹게 붙들고 있었지만 코윈의 빌루이 카파키의 불만도 여전했고, 요동의 유목민 세력도 보르지긴 씨족의 대칸 암바카이를 중심으로 조금씩 집결하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개방적인 성격에 외부 문물에 호의적인 대칸 암바카이는 지금까지처럼 씨족끼리만 뭉치는 안방 정치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계속 성장하는 다른 정주민 세력에 대항할 수 없다며 요동의 범 유목민 연합을 과감히 선언했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대대로 대칸을 이어 온 보르지긴 씨족에서 과감히 탈퇴해 ‘슈트란 가’를 창립했고, 동시에 씨족이 아닌, 체계적인 관료 위주의 통치체계를 하나하나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정치적인 모험은 다른 지역의 성장을 부러워하던 다른 유목민 씨족들에게도 통해서, 많은 대규모 씨족들이 암바카이의 지도력 아래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물론 누구에게는 긍정적이었을 이 ‘통합 소식’은 가뜩이나 지방 세력들의 힘에 짓눌려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황제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라가 30년 가까이 망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신통하다고까지 말하고 있을 지경이었지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건 지방세력들이 ‘무슨 이유엔지 공격을 하지 않아서’였지, 황제가 딱히 재주를 부려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아는 황제 역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타르서스의 구석진 어촌에서 여전히 장사 안 되는 술집을 차려놓고 있다가 반 강제로 아케메니안 궁에 끌려온 오르마즈는 황제의 ‘도대체 못 해먹겠다’는 넋두리를 한참이나 괴롭게 들어야 했다.
“이제 아들놈들도 다 자랐는데 이번 수베르 일에 써먹을까 해.”
“좋은 생각이십니다.”
거의 예스맨 같은, 오르마즈의 성의 없는 대답에 황제가 대번 눈을 흘겼다.
“나이가 모두 30을 넘기셨으니 나름의 이름값을 해 주신다면 황실의 위엄이나 안전이 조금이라도 탄탄해지지 않겠습니까.”
‘황실의 위엄’이라는 말에 황제가 쓴웃음과 함께 술잔을 들이켰다.
“위엄이라.......언제는 그런 게 있었던가.”
황제의 시선은 집무실 한쪽에 있는 황실 가족사진을 무심코 향했다.
사실 그의 슬하에 있는 3명의 적생자, 오렌, 에지드, 후사인 3형제는 이 소심한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늠름하고 당당하게 커가고 있었다. 물론 아들들이 잘났다는 것이 나쁜 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들의 능력에 걸맞게 야심까지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자네가 보기는 셋 중에 누가 제일 능력이 나은 것 같나?”
“아시다시피, 전 이미 은퇴한 사람입니다. 그런 문제에 관해 감히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오르마즈의 말끝이 유달리 조심스러웠다.
사실 교단 시절부터 수백 년을 이어 온 오랜 전통이 후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일반 가문들에서는 ‘장자녀 우선’의 원칙이 오랫동안 지켜져 오고 있었지만 지도자인 마구스의 후계 문제는 철저하게 ‘지명’이 원칙이었다.
문제는 지금까지도 콜로니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 심지어 국가 운영체계에도 교단의 옛 색깔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굳이 따지자면 대신관 바즈라마구스와 동격이라고 볼 수 있었고,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도 그러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마구스의 방식대로 후계를 이어서 일반의 거부감을 희석해야 할는지, 아니면 일반 가문들처럼 장자승계로 나가서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려야’ 할는지도 후계권의 향방을 결정할 민감한 문제였다.
“폐하께서 아직 후계자 지명을 하지 못하신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라 넘겨짚을 뿐입니다.”
오르마즈는 황제의 어설픈 유도심문을 교묘하게 피해 바로 대꾸했다. 황제는 오르마즈가 자신이 원하는 확실한 대답을 해 주지 않자 대번 입가를 씰룩거렸다.
“자네도 무슨 생각은 있을 것 아닌가? 제국의 제일 어른인 제1개국공신으로서 한 마디 할 수는 있지 않은가?”
황제가 집요하게 오르마즈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이런 예민한 문제를 자신에게 계속 묻는 황제의 속셈이 ‘의견 수렴’이 아닌, ‘미끼 던지기’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오르마즈도 이 황제가 자신을 지독하리만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커튼 너머, 3명의 태자들이 이 대화를 지켜보도록 놔두지는 않았을 테니.
오르마즈는 물론이고 아랫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런 예민한 문제에 함부로 나섰다가 분노한 태자들의 칼에 맞아 죽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태자들 모두 좋게 말하면 정치력과 결단성이 있는, 나쁘게 말하면 목적을 위해 제1개국공신의 목 정도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딸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맏이 오렌은 어머니 테나스 황후를 그대로 닮아 신중한 성격에 눈치가 빠르고 술수와 음모에 능한 사람이었고, 동생인 에지드와 후사인 쌍둥이 형제는 형과는 달리 저돌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사내들이었다.
오르마즈는 태자들의 존재를 짐짓 모르는 척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폐하께서 마음에 둔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오르마즈의 대답에 황제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자네답군. 그런 자네가 왜 매번 술집은 홀딱 말아먹는지 모르겠어.”
황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짐짓 악의 없는 척 웃음의 가면을 썼지만 정말로 놀림이 섞였다는 것을 눈치 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봐.”
상대가 자신의 속내와 태자들의 존재를 이미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는 시종장을 불러들여 무어라 손짓을 보냈다. 잠시 후, 커튼 뒤에 있던 ‘3명’이 급히 방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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