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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91화 (590/1,132)

< -- 591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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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고개를 숙일지어다!”

카토가 깃발을 번쩍 치켜들며 다시금 큰 소리로 외쳤다. 카렐은 마치 동맹군 전사들의 사열을 받듯 당당하게 어깨와 등을 펴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군이었던 근위대 1군단의 빽빽한 대오 사이를 뚫고 새하얀 백마를 몰아 1군단 기수단을 향해 나가갔다.

“헉, 헉.”

카렐을 뒤따르는 타크마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양옆에서 카렐을 바라보고 있는 근위대 장병들의 이 차가운 침묵과 소극적인 복종이 그 어떤 계기로든, 누군가가 던진 자그만 조약돌 하나로도 깨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살얼음판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침묵이 깨진다면, 그 뒤는 처참한 살육의 장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병사들 하나하나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쓰며 입 안에 흘러든 차가운 땀방울을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켰다.

그 사이, 카렐은 근위대의 1열 부대 사이를 막 빠져나왔다. 그 역시도 긴장한 듯, 뒤를 향해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길을 열어 준 1열 부대가 갑자기 길을 막고 싸움이 벌어진다면, 아직은 ‘적’ 황제인 그의 목숨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시 앞으로 나아간 카렐은 군단기를 든 채 벌벌 떨고 있던 가디언의 앞에 문득 말을 멈춰 세웠다.

“네놈에게 앞으로 나와서 군단기를 바치라 하지 않았더냐. 잘 들리지 않았나.”

카렐이 신경질적인 말투로 쏘아붙이며 기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수는 두 손에 깃발을 든 채 우물쭈물거리며 좌우의 눈치만 보았지만 이 ‘황제’에게 길을 내어 준 선임연대장의 결정은 이미 확실했다.

“죄송.......합니다.......못 들었습니다.”

울먹이듯 힘겹게 말을 이은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깃발을 머리 위로 바쳤다.

“그래, 그 정도는 기꺼이 용서하지.”

빙긋 웃음지은 카렐의 큰 손이 1군단기를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아무렇지 않게 덥석 움켜쥐었다. 지난밤 비를 그대로 맞은 금빛 깃발은 물을 잔뜩 머금어 더럽고 무거웠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카렐은 깃발을 쫙 펼쳐보았다. 중앙에 새겨진 황실의 용 문장 아래쪽에 있는 건 양쪽으로 길게 펼쳐진 새의 날개였다. 이 도안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최소한 이 비슷한 문장이 한때 교단의 상징이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 문장을 당초 도안한 사람은 아마도 의식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부인하려 해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1군단의 문장이 전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어.”

카렐은 물이 뚝뚝 흐르고 있는 그 더러운 깃발에 입을 맞추고는 공중에 천천히 치켜들었다. 물론 환호성도, 박수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근위대 1군단기가 카렐의 손에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습한 바람이 휙 몰아치면서 그 무거운 깃발이 힘겹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젖은 깃발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카렐의 얼굴에 마치 가는 빗발처럼 떨어져 내렸다.

“히럇!”

카렐이 박차를 가하자 놀란 말이 몸을 번쩍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깃발을 치켜든 카렐, 그리고 그를 따라는 2백의 근위기병대는 근위대 1군단의 1열과 2열 사이의 공간을 달리며 이제 그들에게 펼쳐질 ‘새로운 상황’을 완전히 각인시켰다.

“후우.”

자포자기한 표정의 가디언들, 그리고 시민병들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 그리고 자신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떨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의 원대로, 근위대 1군단은 이제 그의 것이었다.

“예상대로, 적군이 회전을 준비하려는 것 같습니다.”

깃발을 어깨에 걸친 채 1군단 중간에 서 있던 카렐은 페로의 보고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기왕 근위대도 접수한 김에 맞서 싸우는 것도.......”

위세등등해진 발리가 평소의 거친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렐은 그런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너무 위험해.”

“하지만 우리 병력도 이제 놈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플라칼 가와 세닉 가 보병대까지 우리 편에 섰으니......”

“회전이 언제부터 병력 수만 많다고 이기는 것이었지?”

카렐의 핀잔에 발리가 잠시 얼굴을 붉혔다.

카렐은 말을 뚜벅뚜벅 몰아 조금 전 1군단 선임연대장에게로 돌아가며 여전히 추격전이 전개되고 있는 동북쪽, 샤마시 평원을 돌아보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동맹군이 숫자는 많아졌지만 구성이 너무 잡다해졌어. 제대로 정비를 거치지 않으면 회전은 어렵다. 적들도 그걸 아니 이미 불리해진 공성전 대신 회전을 벌이자고 우릴 끌어내려는 거고.”

“그럼 적들이 우리를 샤마시 평원으로 유인하고 있는......”

“그런 셈이지. 근위대 때문에 우리가 시간을 끄는 새에 퇴각해서 한판 붙자는 속셈이겠지.”

카렐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근위대 1군단 선임연대장에게 어깨에 메고 있던 군단기를 불쑥 내밀었다. 깃발을 돌려주는 황제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 연대장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근위대장과의 연락이 끊긴 걸 빌미로 근위대를 우리에게 미끼로 던져주고 지네들만 살겠다고 내빼는 거지.”

깃발을 받아든 1군단 선임연대장이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 역시 남부와 동부연합군이 자신들에게 퇴각 결정을 ‘늦게’ 알려 온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배신감이 쉽사리 의지력을 무너뜨린 이유이기도 했다.

“시로, 아메샤 스펜타들과 함께 네가 1군단을 추스르도록 해. 사정상 가디언 간부들과 시민병들은 잠시 분리해야 할 거다.”

카렐은 ‘아메샤 스펜타들로 1군단을 무장 해제시켜라’라는 말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원래 있던 근위대 막사와 보급품은 남부 놈들이 모조리 태워버렸으니 우리가 손을 빌려줘야겠다. 관산수 건너서 건무성 부근에 깨끗한 새 막사를 세워주도록 해. 전쟁만 끝나고 나면 이전처럼 황성으로 돌아와 내 곁을 지킬 충성스런 부대이니 그 격에 맞도록 챙겨주는 것을 잊지 마라.”

포로 치고는 파격적인 대우에 선임연대장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가 직접 한 말인 이상, 빈말일 리는 없었고, 카렐이 빈말을 할 사람도 결코 아니었다. 시로에게 1군단을 가리키며 빨리 일을 시작하라고 재촉해보인 카렐은 2백여 근위기병대를 이끌고 동북쪽 샤마시 평원을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샤마시 평원을 가로질러 말을 달려 나가는 ‘카렐 황제’의 앞에는 퇴각하는 적의 뒤를 쫓는 동맹군, 그리고 플라칼 가와 세닉 가 군대가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회전 따위는 없다! 우리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놈들을 계속 동북쪽으로 몰아붙이기만 해! 우리가 대오를 짜고 맞서주지만 않으면 놈들도 탄현성에서 이어지는 보급로를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다! 알겠나? 정면 대응해 주지 말고 계속 측면만 괴롭히면서 쫓아라!”

카렐의 명령을 받은 페로의 형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양쪽 모두 서로의 패를 다 알고 움직이는 건가. 놈들도 우리가 맞서주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가시를 세우고 움직이는 것일 테니.”

페로의 물음에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상대의 계획 자체를 몰라서 지는 경우는 많지 않지.”

“하긴.”

“의표를 찌른다는 건 상대가 모를 때나 통할 수 있는 거지. 상대가 멍청이가 아니라면 매번 의표만 찔러가면서 이길 수는 없는 것 아냐. 그게 아니라면 ‘원칙’이라는 게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 결국 전투라는 것도 나와 적장과 말없이 나누는 대화라고나 할까.”

“트라이앵글에 힘들게 모아놓은 우리 예비병력이 슬슬 움직일 때인가. 진정한 반격은 그네들의 몫이겠지?”

“샤드니 놈도 이제 몸 좀 풀게 해 줘야지.”

둘의 짧은 대화에는 동맹군과 연합군과의 전투의 클라이맥스를 이룬 ‘황성 공략전’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가 함축되어 있었다. 패주한 연합군은 결국 탄현성까지는 무사히 물러날 테고, 그곳에서 시간을 끌며 ‘두 번째 기회’를 위해 칼을 갈 터였다.

반면 플라칼 가와 세닉 가가 합류하면서 최소한 숫자상으로는 거대해진 동맹군은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가져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승기를 몰아 이번 제위경쟁, 이후 6차 혼란기로 알려지게 될 이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는 ‘마지막 대결’로 적들을 몰아붙여 명실공이 제국의 ‘단일 황제’로 우뚝 서야 할 테고.

카렐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욱리하변, 야트막한 언덕 위의 거대한 황성과 황궁은 지난 며칠간의 시련을 이겨내고 여전히 황제처럼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록 어느 곳은 무너졌고, 황궁은 여전히 군데군데 불타고 있었지만 건국 이래 첫 번째로 있은 ‘황제에 대한 도전’을 물리친 것은 사실이었다.

“가자!”

카렐이 백마에 힘껏 박차를 가하며 더더욱 속도를 붙여 샤마시 평원을 질주했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위해 죽은 무장들도, 이름 없는 수많은 영혼들도, 심지어 황제의 가슴에 칼자국을 남긴 이라즈의 마지막 추억도, 그의 붉은빛 머리칼을 날리는 차가운 새벽 칼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멀리 날려보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어쨌든 그는 황제이고, 이젠 그런 ‘사소한’ 것보다 더 소중한, 꼭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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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후기>

이번 편을 끝으로 [파트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도 끝을 맺었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파트7. 질풍도 주목에 찢긴다.]가 이어집니다. 타르서스와 트라이앵글을 무대로 코리온과 샤드니(물론 자이납도...^^)가 재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르마즈의 깜짝 놀랄 행각과 유평의 어린 시절도 과거 이야기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

아참, 제 개인 사정상 다음 파트는 다음주 초반 정도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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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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