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90화 (589/1,132)

< -- 590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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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코프 플라칼 경.”

“예!”

베아트릭스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전향 덕분에 잔뜩 고무된 그의 사촌동생 루코프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은 슬레이프니르 3천을 이끌고 근위대 1군단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일부는 사역병단을 쳐서 아나콘다를 탈취하도록. 근위대를 공격하지는 마라. 그쪽은 내가 해결할 테니.”

명령을 마친 카렐은 손수 말을 몰아 언덕 밑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새 루코프가 이끄는 3천의 기병대가 언덕을 꽉 채우고 가장 처진 채 관산수변에서 퇴각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근위대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페로가 이끄는 나머지 동맹군들과 플라칼 가, 세닉 가의 군대가 동북쪽 탄현성으로 퇴각을 시작한 남부연합군들을 쫓고 있었다.

“보기에 불쌍할 지경이군.”

카렐이 스코프의 초점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지난밤 내린 비로 온통 젖고 강변 땅바닥까지 온통 질척질척해지면서, 평소 그렇게 깔끔하고 당당하던 근위대 장병들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 채 허겁지겁 퇴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오는 3천여 경기병들에 기겁을 하고 놀라 걸음과 손놀림에 속도를 붙였다.

물론 그들이 무서워하는 건 ‘고작 기병들’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도 용맹하던 그들을 떨게 만든 건 동맹군 대오의 제일 선두에 있는 황제기 ‘다라프시 카비아니’와 2백여 가디언 근위기병대, 그리고 바로 그 뒤에서 다가오는 동맹군 보병대와 페로 가디언부대였다.

“베흔 놈이 자리를 비웠으니, 그 사이에 근위대 1군단은 내가 차지해야지.”

“아메샤 스펜타와 동맹군 보병대는 황상을 따른다!”

카토의 외침에 성문 밖에 도열한 5천여의 보병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밀집 대오를 이룬 동맹군 보병대와 아메샤 스펜타, 페로 가디언부대가 미처 퇴각 준비를 마치지 못한 강변의 근위대를 조금씩 조이며 마치 제식 훈련을 하듯 발을 맞춰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들을 너무 위협하지는 마라. 3스타디아(450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카렐이 짧게 중얼거렸다. 평소 같았다면 장창과 방패, 무기를 전면에 앞세우고 적들에게 위협적으로 쇄도했을 그들이 이번에는 정연한 대오로 적들에게 자신들의 기개와 정연한 군기를 보이는 정도에서 그 이상의 적개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카렐이 말에 조금 속도를 붙이며 보병대를 따돌리고 앞장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디언 근위기병들 역시 그 뒤를 바싹 따랐다.

“지금은 내가 근위대에 있었던 걸 은총으로 여기고 있어. 비록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이 되었으니.”

“무슨 뜻이십니까.”

시로의 물음에 카렐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눈앞의 8천여 근위대들은 무거운 중장비, 중량의 보급품까지 불을 지른 채 동북쪽으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아직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얼마 못 가 꺼지면서 사실상 ‘버리고 간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그나마 슬레이프니르 3천이 그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걸음은 더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포위합니다!”

아메샤 스펜타 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 경이 손을 저었다. 제일 바깥쪽의 슬레이프니르를 가르고 그 안쪽에 동맹군 보병대가 접어들면서 이제 근위대들은 사실상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퇴각을 포기한 그들은 행군을 멈춘 채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는 근위대 최정예 1군단이다! 이곳에서 모조리 죽는 것을 명예로 알라!”

가디언 지휘관들의 명령에 근위대 장병이 주변을 둘러싼 적군을 향해 일제히 원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맹군 보병대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3스타디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3면에서 조일 뿐, 그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날 따라라.”

카렐이 카토와 시로에게 바싹 붙으라고 손짓을 보내고는 말에 갑자기 속도를 붙였다. 카렐과, 그를 따르는 2백여 가디언 근위기병들은 근위대와 동맹군 보병대 사이를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기병들의 전진에 놀란 근위대 1선 병사들이 움찔거리며 물러났지만 상대방의 움직임이 ‘돌격’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 황제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지만 그 누구도 감히 먼저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카렐은 ‘하메스타의 창’을 등에 비스듬하게 메고, 허리에는 ‘나즈라의 검’을 차고 있었지만 뽑아들 태세도 아니었고, 그럴 표정도 아니었다.

“오랜만이다. 제군들.”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선 카렐이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설마 무기도 들지 않은 나를 공격할 셈은 아니겠지?”

카렐이 두 팔을 벌려 보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 이......”

1선에 선 가디언 사관들이 우물쭈물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포위당했고, 베흔과의 연락은 끊어졌고, 교전상황이 벌어지면 전멸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들로서는 공격을 하지 않는 적의 모습이 도리어 더 의아할 지경이었다.

“군단장님과 베흔 대장만 오시면.......”

선부에 재빨리 나선 선임연대장이 카렐에게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다리를 잘려 탄현성으로 후송된 셈을 대신해 드루그가 군단장 ‘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차마 ‘대리’라는 말을 굳이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오호, 자네들의 군단장 대리하고 베흔? 이걸 보고 싶은가?”

카렐이 피식 웃으며 말 옆에 달고 온 주머니를 연대장의 발 앞에 던졌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베흔이 버리고 도망간 칼, 그리고 아직 피가 그대로 엉겨 있는 드루그의 묵직한 머리였다.

“이걸 기다리고 있었나?”

내용물을 알아본 연대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쳤다. 카렐이 태연하게 말을 몰아 근위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놀란 연대장의 표정은 카렐의 뒤를 포박조차 당하지 않은 채 따르고 있는 타크마에게 다시금 멎었다. 1군단장 대리였던 드루그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명령권자는 타크마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카렐의 포로가 된 것이 확실했다.

“돌아온 근위대 상관에게 차 한 잔도 대접해주지 않다니.”

카렐이 말을 몰아 선임연대장에게 다가가며 입가를 다시금 씰룩거렸다.

“뭐, 뭐라고.......요?

카렐의 얼토당토않은 넉살에 압도당한 선임 연대장이 카렐과 시로, 타크마, 심지어 루토와 카토까지도 번갈아 쳐다보아야 했다. ‘돌아온 근위대 상관’이 이 많은 사람들 중 도대체 누구를 말하려는 것인지도 헛갈리는 상황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의 앞에서 동맹군들을 거느리고 근위대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 모두가 근위대, 그의 상관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카렐의 2백여 근위기병들의 손목에서도 대부분 금빛 가디언팔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싸우러 온 것 같나?”

카렐이 다시금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카렐이 휘하의 근위대 출신들을 모조리 데리고 나온 것 역시 상대를 이렇게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그게.......”

선임연대장이 하나같이 창백해져 있는 휘하 장병들을 돌아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선임연대장도 적을 당장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이들, 그것도 한때 근위대의 상관들이었던 이들을 향해 손을 치켜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남부연합군들이 모조리 도망가 버린 상황에서 이들만 ‘영웅적으로’ 홀로 공격한다고 해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차는 나중에 받아 마시도록 하지.”

카렐이 마치 최후통첩처럼 한 손을 치켜들자 지레 놀란 선임연대장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카렐이 선임 연대장은 물론이고 뒤에 선 다른 근위대 장병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황실 근위대 제1군단’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기회는 지금 한 번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렐의 살벌한 눈초리를 의식하며, 선임연대장이 부르르 떨려오는 손끝을 애써 감추었다. 근위대 장병들 모두, 카렐에게 너무도 익숙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저놈들 오라고 해.”

카렐은 1선 부대 뒤쪽에 서 있는 1군단 기수단을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그곳에는 금색 바탕에 황실을 뜻하는 황룡 문장, 그리고 1군단을 상징하는 새의 날개가 새겨진 큰 깃발이 가디언의 손에 들려 나부끼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희는 내게 할 충성의 다짐이 조금 늦어진 부대일 뿐이다.”

카렐이 깃발을 가져오라며 손짓을 보내자 기수가 당황한 듯 연대장의 눈치를 재빨리 보았다.

“저 깃발 빨리 가져오지 못할까.”

카렐의 웃음띤 입꼬리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져가면서 선임연대장, 기수단의 눈빛 역시 조금씩 겁에 질려갔다. 하지만 선임 연대장도 차마 순순히 길을 비켜줄 수 없었다. 카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의 명령 불복종은 전 지휘관의 잘못이니 너희들의 책임은 없던 일로 접어두지. 황실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작자가 당당히 리쿠 가의 핏줄을 이은 내 명령보다 우선한다고 정말로 믿었을 바보는 없었을 테니. 안 그런가? 나의 X동지?”

카렐이 갑자기 몸을 낮추며 선임 연대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임연대장 역시 ‘X동지’라는 카렐의 말에 내포된 그 교묘한 뜻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가디언들은 그간 가디언들의 금기를 깨고 모두 지금 말에 올라 있었다.

“너희 손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내 몸소 가지러 가겠다.”

조금씩 낮아진 카렐의 목소리 톤이 어느새 소름끼칠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선임연대장은 덜덜 떨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 손에 칼자루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렐은 그가 조금 전까지도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고개를 왜 떨어뜨렸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자.”

카렐이 갑자기 말을 전진시키기 시작하자 당황한 시로, 그리고 나머지 가디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헉, 헉.......”

1군단 선임연대장은 앞으로 다가오는 카렐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카렐, 아니 동맹군측 황제와, 그를 옹위하는 근위대 출신 동맹군 가디언들의 말굽소리를 느끼며, 그가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카렐은 그에게는 무심하리만큼 아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옆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무기를 쥔 근위대 장병들은 적에게 공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진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성큼성큼 전진하던 카렐의 백마는 빽빽한 대오의 선두에 여전히 임전 태세로 서 있는 가디언 분대장의 앞에서 잠시 제자리걸음을 굴렀다.

“흐읍......”

선임연대장과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그 가디언은 말 위에서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옛 상관의 얼굴도 재빨리 살폈다. 지난밤 비를 고스란히 맞고, 강변에서 개흙과 씨름하면서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그 가디언의 더러워진 얼굴에서는 공포어린 눈동자만이 이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에 뒤의 병사들의 ‘결단’이 걸려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도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열어주었다.

당연히 갈 길을 가는 사람처럼 다시 말에 박차를 가하려던 카렐은 갑자기 말을 멈춰 세우고는 품에 손을 넣었다.

“병사들을 이끌어야 할 용맹한 가디언의 꼴이 그게 뭔가.”

카렐은 품에서 꺼낸 반짝이는 비단 손수건을 그 가디언에게 불쑥 내밀었다. 눈앞에 나타난 새하얀 손수건에 깜짝 놀란 듯 어깨를 들썩 했던 그 가디언은 잠시 후, 더듬거리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감사......”

자기도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려던 그 가디언이 움찔하며 입술을 멈추었다.

“황상께서 드시니 모두 1보 뒤로!l!”

‘다라프시 카비아니’를 쥔 카토가 큰 소리로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순간 조금 전까지도 빽빽한 대오를 이룬 채 무기를 겨누고 있던 1선의 병사들이 마치 물길이 갈라지듯 좌우로 천천히 비켜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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