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9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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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성문을 나선 카렐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황성의 동문 밖은 완만한 내리막이었고, 그 아래에는 샤마시 평원이 누군가 ‘한판 벌여 봐라’고 다듬은 듯 평평하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샤마시 평원 남쪽, 관산수의 푸른 강물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의 여명을 희미하게 반사시키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 날의 새로운 아침을 첫 번째로 밝혀주고 있었다.
“볼만하군.”
카렐이 스코프 뒤편 눈꼬리를 살짝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성벽 바로 바깥은 부서진 공성탑과 널브러진 시체들로 흙까지 모두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성벽 밖을 그렇게 온통 피로 물들여놓은 델루지 가 보병대는 동료들의 시체조차 거두지 못한 채 혼비백산해 퇴각하는 중이었고, 플라칼 가 보병대와 세닉 가의 중장기병대가 그들의 측면을 거칠게 조이며 가뜩이나 급한 발길을 붙들고 있었다.
물론 플라칼 가와 세닉 가의 연합병력 숫자는 델루지 가와 호지 가, 근위대와 동부기병들까지 연합한 연합군 대군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카렐의 동맹군까지 합세해 전면 반격한다면 연합군은 전멸까지 각오해야 할 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황급히 공성전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연합군 중에서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관산수 옆에서 아케메니아 포구로의 상륙을 준비하고 있던 근위대 1군단이 가장 뒤처져 있었다. 게다가 이들을 지휘해야 할 1군단장 셈이 지난 전투에서 카렐에게 다리가 잘려 후송되었고, 베흔, 심지어 그 뒤 서열인 드루그, 타크마와의 연락까지 모조리 끊기면서, 그들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퇴각 결정까지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성문 앞에 나와 선 황제와 총리, 그리고 2백의 가디언 근위기병대를 따라, 5천이 넘는 수비군의 대군이 언덕을 내려가 관산수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건무성에서 올라와 막 상륙한 7천의 슈로 기사단, 그리고 3천의 슬레이프니르 경기병대와 1만의 서부연합군도 퇴각하는 적들의 숨통을 마지막으로 끊을 한 번의 맹추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 동부기병대하고 남부기병들도 반격을 준비하나?”
페로가 적군 후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연합군의 남부기병대와 샤자한 공이 이끄는 동부기병대의 깃발이 플라칼 가의 측면을 치기 위해 바삐 접근해오고 있었다. 조만간, 같은 남부기병들끼리의 전면전이 벌어질 판이었다.
카렐이 전장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머릿속에 넣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반격이라기보다는.......퇴로를 벌자는 거겠지.”
“저거 오랜만에 보는 깃발이군.”
페로가 남부기병대 선두에서 펄럭이는 붉은 대장기를 가리켰다. 플라칼 가의 문장을 떼어낸 것을 보아 히르직스의 것인 듯 보였다. 처가와 연합군이 완전히 갈라서게 되면서, 그도 이제 부담없이 전장에 달려나온 모양이었다.
“히르직스 놈한테 누가 맞서 싸우지? 토로 경도 없고 제네르도.......”
“그건 우리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는데.”
카렐이 손끝으로 가리킨 건 남부연합군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고 플라칼 가 중장기병대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종장 카나르 경을 뜻하는 사자 문장이 보였다.
“하여간, 원수 만드는 데는 소질이 있는 놈이야. 토로 경이 없어지니 이젠 옛날 장인이 눈에 불을 켰군.”
기분이 한껏 격앙된 페로는 카렐의 우울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혼자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방향을 봐서 탄현성으로 전면 퇴각하려는 것 같아. 제롬 그놈이 생각보다 결단이 빨랐나봐. 어쨌든 붕괴까지 가기 전에 물러났잖아.”
“제롬 녀석의 결단일지, 샤자한 공의 결단일지는 알 수 없지.”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폐하! 적들이 동북쪽으로 퇴로를 잡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탄현성으로 전군 퇴각하려는 모양입니다!”
발리의 보고를 받은 카렐은 문득 말을 세우고 동북쪽, 샤마시 평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지 가와 델루지 가, 연합군 사령부와 함께 있는 근위대의 나머지 병력까지 합친다면 보병대만 12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거기에 기병대까지 합친다면 적들이 퇴각한다고 마구 몰아붙일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그래도 적들도 나름대로 대오를 유지하고 퇴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성 밖으로 끌어내서 샤마시 평원에서 회전을 벌이려는지도 모르지.”
“역시 너 답구나.”
카렐은 적의 의도를 정확히 눈치 챈 페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남부보병대가 괜히 그 이름을 얻은 건 아닐 테니.”
“호지 가 보병 2만과 기병 5천이 후위에서 시간을 버는 새 다른 부대가 퇴각하고 있습니다. 근위대 1군단은 아직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제롬하고 샤자한 그 두 놈이 웬일로 죽이 맞을 건수가 생겼군.”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부 부대에게 ‘뒤를 맡기고’ 물러나는 건 잔인하지만 지금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퇴각책이었다. 그것도 천하의 근위대 1개 군단 규모라면 무시하고 우회하기도 불안한, 위협적인 규모의 부대였다.
“폐하, 집결이 완료되었습니다.”
베아트릭스가 말을 달려와 카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번 승전에 더해 플라칼 가의 전향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그의 표정은 한껏 기쁨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간 플라칼 가문에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그가 이젠 다시 가문의 당당한 일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정치적인 문제에는 유달리 둔감한 그였지만, 이번 일로 자신이 내명부에서 남부의 ‘대표’가 되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 슈로 기사단 부단장인 발리가 급히 말을 달려와 황제의 앞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 전체 상륙 완료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대는 황실 근위대 1군단입니다. 빨리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지금 근위대를 공격하지는 마라.”
“예?”
카렐의 엉뚱한 명령에 발리가 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 치면 강변의 근위대 1군단 본대는 전멸시킬 수 있습니다. 퇴각중인 남부연합군은 숫자도 너무 많고 어차피 정면 승부하기는......”
“그건 알아.”
카렐이 냉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베흔도 없는데 뭐가 겁나서 그네들을 전멸시켜?”
움찔한 베아트릭스가 스코프를 조절해 관산수 강변을 다시금 살폈다.
하지만 이번에는 뜻밖에 페로가 신중하게 나섰다.
“하지만 행여라도 베흔이 돌아오면......”
“못 돌아와.”
“응?”
“에아 신전을 통해서 도망갔다니 오늘밤 욱리하를 건너 도망치려 들겠지. 명색이 가디언들이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 봤자 욱리하 건너편 강변에 안 죽고 도착하는 정도가 최고의 행운일걸. 운이 더 좋으면 건너편에 있는 연합군 분견대에 발견될 테고, 거기서 끝이라면 우리 초소가 먼저 발견하겠지. 어느 쪽이든, 최소한 내일까지는 복귀 못 해.”
카렐이 강변의 근위대 1군단을 내려다보며 이를 살짝 드러냈다.
“베아트릭스 경은 방금 상륙한 슈로 기사단 7천과 과 슬레이프니르 3천을 이끌고 발리와 함께 남부기병대를 도와서 적들을 추격하도록 하십시오. 플라칼 가와 세닉 가 기병들이 남부에서는 그나마 정예지만 어차피 동부기병들을 상대하지는 못할 거요. 발리는 히르직스를 각별히 조심하고, 카나르 플라칼 경이 감정이 앞서서 히르직스와 1대1로 싸우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기병대에 지시를 내려놓은 카렐은 이번엔 1만의 서부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아쉬드 하지즈 장군을 돌아보았다.
“서부보병들은 남부보병보다 기동력에서 우수하니 아쉬드 하지즈 장군은 세닉 가 투창병단과 연합해서 퇴각하는 남부보병들의 발을 최대한 붙들도록. 적의 숫자가 워낙 많으니 정면을 차단하는 건 삼가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총리는 우리 추격부대들을 총괄해서 지휘하도록. 적들은 근위대가 시간을 끄는 새에 샤마시 평원에 재집결해서 추격부대와 대규모 회전을 벌이려는 속셈일게야.”
“아마도요.”
“적 본대를 적당히 몰아쳐서 집결만 못하게 막고, 놈들이 탄현성까지 퇴각하도록 만들어라. 지금 회전을 벌여서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예. 그런데 폐하께선 그럼......”
페로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짧게 꼬리를 붙였다. 하지만 지시를 마친 카렐은 별다른 대답도 없이 추격전을 전개할 서부연합군, 그리고 슈로 기사단을 돌아보며 창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우리는 황궁을 지켜냈다!”
황성의 남은 수비병들, 그리고 카렐의 뒤에 도열한 동맹군 장병들의 우렁찬 함성이 이미 평원까지 움직인 그들의 귀에까지 울릴 터였다.
“이젠 놈들을 도살하는 것만 남았다!”
카토에게서 ‘다라프시 카비아니’를 넘겨받은 카렐이 강변에 도열한 동맹군들 앞을 거세게 내달렸다. 황제의 그 힘에 넘치는 모습에 장병들이 서로 질세라 함성을 올리며 성벽과 땅을 뒤흔들었다.
“놈들을 쫓아가라! 이승이든 저승이든 그곳에 짐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니!”
‘다라프시 카비아니’의 창끝이 동북쪽에서 도망치고 있는 남부연합군의 등 뒤를 똑바로 향했다.
“돌격!”
기병대의 흥분한 젊은 무장들을 선두로, 슈로 기사단과 서부연합군 장병들이 와아 하는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퇴각하는 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카렐은 깃발을 어깨에 걸친 채 그들의 뒷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폐하께선 여기 계실 겁니까?”
페로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카렐에게 다시금 물었다. 카렐은 대답 대신, 성문 쪽에 대고 손짓을 보냈다.
“저게 누구죠?”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곳에는 시로가 고삐를 대신 잡은 말에 덜덜 떨며 앉아있는 가디언 한 명이 있었다. 부상을 입은 듯 팔과 가슴에 드레싱을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타크마 뒤에는 황궁에 있어야 할 루토까지도 함께 말에 앉아있었다.
“소개하지. 내게 충성을 맹세한 새 특등급 가디언 타크마라네.”
“타, 타크마요?”
깜짝 놀란 페로가 말에 오른 이 크고 날씬한 가디언을 위아래로 재빨리 살폈다. 부상을 입어 체격이나 움직임 같은 것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팔찌에 새겨진 기호를 보아 틀림없이 근위대 소속의 6세대 특등급 가디언이었다.
시로, 타크마와 함께 근위대를 향해 나아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무장들이 잠시 전율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네피와 시로, 조페에 뒤이어 카렐에게 충성을 맹세한 4번째 특등급 가디언이었다. 여기에 포로 상태에서 전향을 거부하고 있는 제파 역시 ‘전쟁만 끝나면’ 결국 카렐 편으로 돌아서리라는 것을 따져본다면 황제 본인까지 합쳐 벌써 6명의 특등급 가디언을 확보한 셈이었다.
페로가 피식 웃으며 다른 무장들에게 물었다.
“지금 상의 곁에 있는 가디언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예?”
“모조리 근위대 출신들이야. 그것도 최근에 전향한. 저네들을 데리고 근위대 1군단에 접근하시는 이유가 뭐겠나.”
카렐의 속셈을 눈치 챈 페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스펀지처럼 조금씩 빨아들이시는군. 베흔의 모든 것을 말이야. 아니, 언젠간 그 성격까지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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