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0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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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143층, 특별의무실에 누워있던 릴라크는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가 있는 이 143층 ‘특별의무실’은 황실, 혹은 내명부 사람들이나 일부 VIP들만 이용하는 곳이었고, 병원이라기보다는 내의원에 딸린 작은 진료시설이라는 편이 더 정확했다. 실제로 이곳의 병상이래야 채 10개도 되지 않았고, 지금 있는 입원 환자는 릴라크와 제네르 2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제네르는 어디 갔는지 한참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릴라크는 황궁의 동측 별관에 있는 황실 부설 종합병원이나 시끌벅적한 야전병원으로 갔으면 속은 편했으리라 생각했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연합군 스파이의 칼을 피하기 위한 카렐의 특별한 배려라는 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창밖을 무력하게 내다보며 계속 뒤척거리고만 있던 그는 의무실 한쪽, 황제 주치의인 니사가 근무하는 사무실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사무실 안에는 웬 앳된 얼굴의 미청년 한 명이 아까부터 앉아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부드러운 인상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이 릴라크의 유별난 호기심을 계속 자극했지만 한가롭게 미남자 감상이나 하고 있기에는 주변 분위기나 릴라크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를 못했다.
멀리 창밖으로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쩍번쩍 하는 전장의 모습이 내다보였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누워있었지만 명색이 군인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의 속도 내내 편치를 못했다.
“빌어먹을, 안 보는 게 차라리 속 편하지.”
옆으로 다시 돌아누우려던 그는 무언가 익숙한, 하지만 그 정체가 무언지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 묘한 소리에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앗!”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울림에, 143층의 두꺼운 창틀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마치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이 작은 의무실의 고요함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으, 으아악!”
몇몇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무언지 모를 충격에 의무실의 두꺼운 유리창이 산산조각나며 그 조각들이 순식간에 기압차에 이끌려 바깥으로 빨려나가 버렸다. 강풍과 거친 빗줄기가 몰아치는 춥고 사나운 바깥공기가 의무실 안의 안락하고 따스한 공기를 일순간에 빨아들이며 뚫린 구멍으로 마치 야수같은 굉음을 울렸다.
“아나콘다?”
놀라 바닥에 떨어졌던 릴라크가 엉금엉금 기어 이동의자 다리를 붙들었다. 창을 뚫고 들어온 시커먼 아나콘다가 의무실 안쪽의 문과 실내의 큐비클을 산산조각낸 채 수십, 수백 개의 끔찍한 파편이 되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운 없는 사람 2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모습으로 그 주변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맙소사, 맙소사. 의사! 의사!”
아직 자력으로는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릴라크가 주변을 둘러보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지만 의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지나가는 시종의 바짓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빌어먹을! 내의원 의사들 다 어디 갔어!”
“예? 아, 내의원 의사분들은 바깥의 전투 때문에 모두 야전병원에 동원되셨고 여기에는 당직의사 한 분만......”
마찬가지로 의사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종은 아나콘다 파편 밑에 쓰러져 있던 한 명을 쳐다보며 움찔했다. 공교롭게도 제일 먼저 쓰러진 것이 의사였다.
“저 구멍! 구멍을 막으란 말이다! 너! 너! 둘이서 잡고! 너는 당장 지휘부에 아나콘다 낙하지점을 알려!”
지휘관 기질이 발휘된 릴라크가 쓰러진 채 두 팔을 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극도의 아드레날린에 휩쓸린 그는 자신의 팔에 꽂혀 있던 진통제 앰플이 어느새 빠져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잠깐, 잠깐요!”
무어라 소리를 지르려는 릴라크의 손을 다급히 붙든 건 조금 전까지 그가 쳐다보고 있던 그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흥분해있던 릴라크는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며 허리춤의 칼이 있던 자리에 오른손을 가져가려 했다. 깜짝 놀란 상대가 얼른 손을 떼며 한 발 물러났다.
“아.......저도 의학박사입니다. 본업은 아니지만 한때.......”
겁에 질린 청년의 검은빛 눈동자를 확인한 릴라크가 그제야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깨달았다.
“이, 이라즈 노에누스라고 니사 라말라 박사님께 잠시 볼일이 있어 와 있었습니다.......이제 됐습니까?”
급히 자기소개를 한 이라즈는 바닥에 떨어진 릴라크의 몸, 그리고 그의 병상에 매달려있던 진료기록을 급히 살폈다.
“릴라크 예리노프 대장군님?”
“수술도 다 끝났고 이젠 감각도 멀쩡해. 허리의 프레임 때문에 못 움직이는 것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다른 사람부터 살펴.”
릴라크는 눈앞의 이 미남자가 황제의 승은까지 받은 내명부 사람이라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괜스레 치밀어 오른 부끄러움과 부아를 이 남자에게 마구 쏟아냈다.
“예, 그렇군요. 어쨌든 여기는 위험한 듯 하니 건물 안쪽으로 피해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그때, 또 한 번의 쉬잇 하는 소리가 릴라크의 귀청을 울렸다. 깜짝 놀란 릴라크는 이 남자의 머리를 껴안고 거의 처박듯 바닥에 밀어붙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 날아든 발리스타는 내의원 조금 옆, 연회실 부분을 쾅 소리를 내며 꿰뚫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창밖으로 내다보였다.
“씨발, 베흔 그 새끼가 완전히 미쳤구나!”
황궁이 공격을 받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릴라크는 이곳에 아나콘다를 날려대는 베흔이 도저히 제정신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빨리! 빨리 환자들을 안쪽으로 옮겨! 모두 안으로 피해!”
릴라크는 자기 자신이 환자라는 것도 잊은 채 시종들에게 바락바락 악을 썼다. 조금 전 쓰러진 의사를 확인하고 돌아온 이라즈는 그런 릴라크를 번쩍 안아 일단 이동의자에 앉혀 주었다.
“대장군님이 피하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군인이 민간인보다 먼저 내빼는 게 어딨냐! 의자만 움직이면 난 거동할 수 있으니까 너나 다른 환자들이나 옮겨! 난 나가서 경비 상태를 봐야 하니......”
릴라크는 이라즈를 뿌리치려 했지만 이라즈 역시 거동조차 못 하는 이 환자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럼 제가 모시죠. 여기는 제가 없어도 당장은 괜찮을 것 같으니.......”
그는 릴라크가 앉은 이동의자를 밀고 급히 의무실을 나섰다. 황궁을 직접 노린 아나콘다가 마구 날아들면서 바깥 복도 역시 놀란 시종, 시녀들로 난장판이 벌어져 있었다.
“씨발! 경비병! 경비병 부대장 어딨어!”
릴라크의 유달리 높은 톤의 째지는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후, 창백해진 표정의 아메샤 스펜타 제대장이 급히 달려와 그의 앞에 부동자세를 잡았다.
“130층부터 143층을 책임지고 있는.......”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고작 발리스타 몇 발에 군인들이 이 따위 꼴을 보이다니! 아메샤 스펜타가 그렇게 형편없는 부대였나!”
“그, 그게 아니고 근위대가 지하층을 통해 궁에 난입했다는 소식에 이곳 종사원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어서.......종사원들은 민간인이라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순간 표정이 굳은 릴라크는 유리창의 구멍 밖을 휙 돌아보았다. 사람 몇 명은 빨려나가고도 남을 큰 구멍 밖으로 143층의 거친 황소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궁을 직접 공격하는 베흔의 속내를 바로 깨달았다. 제대장이 무어라 상황을 다급히 설명하는 것도 마치 웅웅거리는 메아리처럼 그의 귓속과 머릿속을 스쳤다.
물론 그 내용까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건 아니었지만.
릴라크는 제대장에게서 할룩스를 거칠게 빼앗아들고 작동시켰다. 잠시 후, 황궁 상부를 책임지는 아메샤 스펜타 중대장의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 나타나자 릴라크가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전 층의 모든 경비부대에게 명하겠다. 지시를 따르지 않는 놈들은 내 이름으로 두들겨 패도 좋으니 시종, 시녀들을 포함해서 본관의 모든 민간인들은 구석의 창고로 모두 집결시켜 억류해라. 내가 책임진다.”
“예?”
당황한 중대장이 되묻자 릴라크가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대장군인 내가 책임진다! 알겠나? 내 이름을 멋대로 팔아도 좋으니 민간인들을 각 섹터별로 집결시키고 통제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강제로 포박하거나 구타해도 좋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사살해도 좋다.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이라도 취하란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20층에서 24층까지는 보안을 위해 비워져 있으니 그 아래는 루토와 밑에 있는 부대에 맡기고 우린 놈들이 25층 위로 올라오는 것만 막으면 된다! 네 중대 병력이 몇이냐!”
“보병 450명과 가디언 특임대 50명입니다. 하지만.......”
“씨발, 말꼬리 붙이지 마라.”
릴라크는 무어라 둘러대려는 중대장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는 냉소적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다는 면에서는 제네르와 비슷했지만 자존심 강한 명문가 출신이다 보니 권위적인 데다가 일단 결정한 일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저돌적이라는 면에서는 딴판이었다.
“백 개가 넘는 층을 다 지키기는 어차피 불가능하니 1개 제대는 20층으로 내려보내서 위로 올라오는 모든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차단해라. 1개 제대는 100층의 주기장과 101층의 통제실, 여기 143층을 차단해라. 마지막 제대는 공무원들을 별관으로 대피시키고 시종과 시녀들은 건물 중심 코아부의 창고에 억류해라. 가디언들은 101층 통제실에서 명령을 기다려.”
“시종들도 모두 대피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민간인 부상자가 생기면 아무래도......”
무어라 대꾸하는 중대장에게 릴라크가 버럭 화를 냈다.
“난입한 적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우왕좌왕하지만 않으면 막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그럼, 숫자에서 딸리는 적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
“최대한 분산해서.......아니면 불을 질러 혼란사태를 일으키거나 지금처럼 발리스타로 사격해서 기물을 파괴하거나......”
“훈련받은 시종들이 없으면 불을 누가 꺼! 씨발, 시종 몇 놈 뒈지는 것까지 우리가 신경써야 되냐!”
“아, 알겠습니다.”
중대장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이 위쪽 지키는 중대장 놈은 어딨어?”
비록 릴라크가 직속상관은 아니었지만 그의 거칠고 단호한 명령에 중대장은 차마 대꾸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들이 올 곳은 어차피 뻔해.”
이곳 사정에 밝은 릴라크는 황궁을 담당하는 중대장들을 하나하나 불러내 자잘한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잠시 한숨을 돌렸다.
“이라즈라고 했나?”
“예.”
“101층으로 가자.”
릴라크는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이라즈에게 일방적으로 손짓을 해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가 누군지 안다면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제기랄, 또 전쟁터군. 빌어먹을 내 팔자야.”
황성의 핵심 방어시설이 있는 101층, 옛 근위대 중앙본부 자리로 급히 향하던 릴라크가 긴장된 마음을 가다듬으며 계속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황궁에서 베흔이 제일 먼저 노릴 곳이 바로 그곳임을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록 몸도 말을 듣지 않았고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만 그는 동맹군의 그 누구보다 황궁을 잘 아는 자신이 지금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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