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9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
.
.
“자리를 비워 주었으면 좋겠네만. 내 예르마크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
카나르 경에게서 받은 서류를 다시 가방에 챙겨넣은 수나 마구스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건 당사자인 예르마크 뿐만이 아니었다. 카나르와 헤즈 역시 당황한 듯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건 그다지......”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카나르 경은 수나 마구스의 이 대담하다못해 무모한 요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르마크 경은 크고 당당한 체구를 한, 남부의 손꼽히는 맹장이었고, 싸움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수나 마구스 정도는 단숨에 목을 비틀어 죽일 수 있는 힘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수나 마구스의 요구대로 둘만 남는다면, 그리고 예르마크 경이 독한 맘만 먹는다면 동맹군 특사인 수나 마구스를 죽이고 지금의 회담 결과를 순식간에 원점으로 돌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하신다면 입 무거운 가디언을 함께.......”
“괜찮다니까.”
수나 마구스가 짜증스레 대꾸하며 카나르 경에게 빨리 나가라고 손짓을 보냈다. 카나르 경과 헤즈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의 이런 강력한 요구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바로 문 앞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그럴 일은 없을걸세.”
수나 마구스의 지나친 자신감에 도리어 오기가 난 예르마크 경이 이를 빠득 갈며 손에 힘을 주었다. 태어나 지금껏 ‘비겁한 짓’이라고는 해 본 기억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미안하오, 코다 박사.”
예르마크 경은 혼자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나르 경 부자가 자리를 비우고, 수나 마구스가 자신에게 무어라 일장 설득을 시작하면 그는 이 ‘한물 간 마구스’의 목을 바로 비틀어죽이고 그가 가진 저들의 합의 서류 따위는 불태워 없어버릴 참이었다. 아버지 요아킴의 전력이야 어쨌든, 예르마크는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자랐고, 상대가 ‘사교 마구스’라면 바퀴벌레 밟아 죽이는 만큼의 양심의 가책조차 느낄 이유가 없었다.
“휴우.”
예르마크 경은 자리를 비우는 카나르 경과 헤즈 부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로 플라칼 가의 ‘배신’을 막을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지만, 최소한 이번 전투에서 세닉 가의 뒤통수를 치는 것만은 늦출 수 있을 터였다.
“자. 받게.”
용기를 내며 수나 마구스를 향해 막 돌아서려던 예르마크 경은 자신에게 다시 단검을 내미는 이 여자의 모습에 순간 움찔했다.
“명색이 무장이 칼 한 자루 없이 무장 해제된 초라한 꼴로 서 있는 건 마구스인 내가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야. 예르마크. 아니, 그땐 예리라고 불렀었지.”
어느새 가슴 앞에 바싹 다가와 있는 이 여자의 눈빛에 압도당한 예르마크는 무심결에 한 발 물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수나 마구스가 그에게 내민 건 단검 날이 아닌, 손잡이 쪽이었다. 둘은 고작해야 1척(30cm) 정도의 거리에서 서로의 숨소리까지 느끼며 마주서 있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예르마크 경은 난생 처음, 이 여자의 입가에서 번지는 ‘순수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여야 할 상대였지만 예르마크 경의 떨리는 손은 상대가 내민 칼 손잡이 앞에서 집을까 말까를 계속 망설이며 맴돌기만 했다. 그 칼만 뽑아들고 살짝 힘을 주어 내지르기만 하면, 이 여자는 끝이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예리.......타우.”
예르마크는 자신의 뺨에 부드럽게 와 닿는 이 여자의 손끝을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만 같았다.
“어딜 감히......”
예르마크 경이 이를 드러내며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챙 하며 날이 빠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이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말없이 올려보았다.
“이젠 나보다도 더 커졌구나. 그래, 요아킴의 피는 못 속이는군.”
수나 마구스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예르마크는 어린 시절, 그리도 커 보였던 이 여자가 지금은 자신보다 도리어 약간 작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에 빠진 채 무력하게 칼을 쥐고만 있었다. 수나 마구스는 예르마크의 떨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보며 도톰한 입술에 다시 미소를 품었다.
“내 그러지 않았나. 날 죽이지 못할 거라고.”
“천만에.”
다시금 오기가 난 예르마크 경이 이를 악물며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엔지,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나 마구스가 어떡해서든 힘을 주려 버둥거리는 그의 팔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요아킴.......아니 이오타는 정말 무모했어. 지금 너처럼.”
“......”
“감히 운명을 거스르다니.......전 같았으면 그는 물론이고 그 핏줄까지 내 손에 모조리 참살당했을 테지. 고작해야 하렘에서 평생 내 수발이나 들었을 남자 주제에.......그런데 그는 무모해졌고, 나는 물러졌지.”
“무, 무슨.......”
“네 아비가 너희 4남매의 수정란을 들고 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을 때 내 그것들을 벽난로에 쳐 넣어 버리지 못했던 것 말이다.”
“아버지가.......고작 너 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웃기지 마라.”
자존심이 상한 예르마크 경이 대번 이를 드러냈지만 그의 굳어버린 오른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순종적이던 합성체가 그런 맹랑한 짓을 저질렀다니 나도 믿어지지 않았지. 평생을 운명대로 그 누구와도 가까이하지 않고 내게 순종하며 살 줄 알았건만.”
수나 마구스는 옛 생각이 떠오르는지, 목에 걸고 있던 나뭇가지 무늬의 펜던트를 잠시 더듬거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느새 엷게 물기가 어려 있었다.
“감히 마구스의 세포를 훔쳐내서 2세를 만들다니.......”
예르마크 경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수나 마구스를 향한 칼끝을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감히 신의 현신에 손을 대다니 그 무엄한.......”
예르마크 경의 떨리는 손, 그리고 수나 마구스의 흐느끼듯 떨리는 목소리가 빗소리가 거칠게 후둑거리는 이 낡고 초라한 막사 안에서 함께 흔들렸다. 수나 마구스가 갑자기 이를 갈았다.
“그 무엄한 녀석 같으니.......감히........”
멍하니 서 있던 예르마크 경은 조금 전, 카나르 경을 노려보며 가늘게 떨리던 수나 마구스의 눈동자가 왜 그리 익숙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부모조차 매번 소름끼치게 만들던 그의 맏아들, 코리온의 기이한 눈빛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의 그 특별한 능력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도.
“그 말을 믿으라고?”
예르마크 경은 머리에 떠오른 진실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넓고 단단한 어깨에 걸쳐지는 수나 마구스의 차가운 뺨을 느끼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수나 마구스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도 이제는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칼끝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훌륭하게 잘 자랐구나. 예리 빈 트라카.”
수나 마구스는 우두커니 서 있는 예르마크 경의 뺨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이 뺨을 타고 번지며 잠시나마 분노에 끓었던 그의 눈동자에서도 오랫동안 그의 남매들을 괴롭혀 온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천천히 사라져갔다.
“네 누이 이렌느에게도 안부를 전해 다오.”
예르마크 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코다 박사’를 그나마 잘 따랐던 아들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한 그를 유달리 미워했던 것이 적장자이며 외동딸 이렌느 세닉 경이었다. 심지어 아버지의 사후,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하게 하고 매질까지 해 쫓아냈던 그였다.
아들에게서 입술을 뗀 수나 마구스는 짐짓 무심하게 돌아서며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가방, 그리고 벗어놓았던 흰 베일을 집어들었다. 예르마크 경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울먹이듯 물었다.
“이르센 형님을 급류 속에서 구했던 것도........”
“.......”
“설마 코리온을 사창굴에서 내보내주신 것도.......”
문을 막 나서려던 수나 마구스는 입가에 엷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
“맞습니까! 그게 맞냐고요!”
예르마크 경이 격앙된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수나 마구스는 지금까지처럼 전혀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달갑지 않은 무리의 손을 좀 빌어야 했지만.......마구스의 후손이 있을만한 곳은 아니었으니.”
수나 마구스는 무언가 떠오른 듯 예르마크 경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돌아보았다.
“코리온 빈 트라카.......이오타를 그대로 빼닮았더구나. 거기에 내 상징까지.”
잠시 쓰디쓴 미소를 짓던 수나 마구스는 베일로 다시금 얼굴을 가리며 문을 향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내 후계자로 선택되었을지도 모르지.”
“제발, 제발 가지 마세요!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데.......”
예르마크 경은 악을 쓰며 달려나와 그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하지만 수나 마구스, 아니 어머니의 눈을 본 순간, 그의 온몸은 또다시 빳빳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수나 마구스는 눈동자 외에는 미동조차 못 하고 있는 이 막내아들의 손등을 살며시 짚었다. 차가웠지만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네 딸 상지가 사오시안트에 잡혀있지? 네 부인 레곤은 루게의 델루지 가 대사관에 억류되어 있고.”
예르마크 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온몸이 바싹 굳어 할 수가 없었다.
“네 선택을 옥죄고 있는 것들을 해결하는 일이 우선이다.”
수나 마구스는 굳어있는 예르마크를 살며시 뒤로 밀어내고는 막사의 문을 열었다. 다시 몸이 풀리며 중심을 잃은 예르마크 경이 바닥에 털썩 꿇어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열린 문으로 엉금엉금 기어 어머니의 뒤를 쫓았다.
“잠깐,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면.......”
수나 마구스를 쫓아 기어나오는 그의 모습에 놀란 카나르 경, 그리고 후스를 비롯한 플라칼 가 근위병들이 급히 그의 앞을 막았다.
“네가 할 일은 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 알 테지. 날 믿는다면.”
“......”
수나 마구스가 예르마크 경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래. 어떤 식으로든 내 피를 받은 아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중 하나지.”
“제발! 같이 가 주십시오! 제발요!”
예르마크 경이 비로 젖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울부짖었다. 잠깐 새 돌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놀란 카나르 경이 수나 마구스를 잠시 돌아보았지만 베일 속에 감추어진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운명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나겠지.”
예르마크 경을 잠시 돌아보았던 수나 마구스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멀어져갔다.
“학, 학.”
예르마크 경은 쏟아지는 찬 비를 그대로 맞으며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수나 마구스는 이미 멀어져갔고, 그의 곁에는 카나르 경과 헤즈 경이 우산을 든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카나르 경은 전군에 진격명령을 내리려는 듯 이 회의실로 부장들을 바삐 불러 모으던 참이었다.
예르마크 경이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나르 플라칼 경.”
“말씀하십시오.”
“우리 군대를 공격하지 마시오.”
“예?”
예르마크 경의 뜬금없는 요구에 카나르 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같은 편끼리 싸울 필요가 있겠소.”
“가, 같은 편이요?”
카나르 경의 놀라움에 찬 눈동자가 아들 헤즈를 잠시 향했다.
예르마크 경이 한숨을 내쉬며 질척질척해진 흙바닥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우리 군대는 북쪽의 호지 가를 맡겠으니 그대의 군대는 남진해서 델루지 가를 맡아주시오. 우리 가문 기병대가 도울 것이오.”
카나르 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근위대 예비대가 아케메니아 포구에 상륙하기 위해 남쪽 강가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동맹군의 선방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것 같소. 그대가 델루지 가를 공격하면 근위대와 동부기병들이 반격할 것이나, 건무성의 동맹군 예비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연합군의 작전을 모두 알고 있는 예르마크 경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큰 싸움이 될 것이나, 이번 한 번에 연합군 전체를 황도의 사정권 밖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한 번에........”
“물론입니다.”
카나르 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카렐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연합군 붕괴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황궁이 무너지고, 델루지 가가 황성을 난입해 먼저 점령해버린다면, 이 모든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