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6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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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겁나게 운도 좋은 놈이군.”
뒤에 숨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카렐이 지도를 다시금 확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베흔이 간 길은 정확했다. 지금의 시간으로 보아 그대로 직진만 한다면 베흔은 12시 방향 에아 신전의 바로 옆에 자리잡은 1시 방향 티시트리야 신전으로 가게 될 터였다. 교단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똑똑한 베흔 정도면 그 정도면 바로 방향을 수정해 바로 옆의 에아 신전을 찾아가기에 충분했다.
‘빌어먹을, 길이 갑자기 좋아졌네.’
베흔을 뒤쫓아 계속 걸음을 재촉하던 카렐은 지금까지처럼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아닌, 갑자기 넓고 잘 다듬어진 길이 나타나자 적이 당황했다. 앞서가는 베흔 입장에서야 신이 나겠지만, 그들의 발목을 1분이라도 더 잡아야 하는 카렐에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바로 그때, 카렐은 자신이 ‘시침과 분침 사이’를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카렐은 급히 시계부터 살폈다.
‘4시 9분 30초?’
시계를 확인하고 깜짝 놀란 카렐은 뒤따라오고 있을 카토의 팀 쪽을 휙 돌아보았다. 조금만 있으면 분침이 움직일 시각이었다.
‘빨리, 빨리.’
카렐은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한 채 마른 입술만 급히 오물거렸다. 카토의 팀이 빨리 따라붙지 못한다면 그들이 오고 있는 길은 4시 10분을 기해 30도를 돌아가 전혀 다른 곳으로 움직여버릴 터였다. 잠시 후, 조금 너머에서 랜턴을 든 카토를 선두로 부하들이 벽을 짚은 채 엉금엉금 모습을 나타냈다. 카렐은 그들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손을 저었지만 시계는 이미 9분 5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카렐은 베흔 팀을 바싹 추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되돌아가 카토와 합류할지, 아니면 카토와 떨어져 소수 가디언들만으로 뒤를 쫓을지를 결정해야 했다.
‘라말라 박사가 저쪽에 있었던가.’
카렐은 멀리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다가오는 카토에게 급히 수화를 보냈다.
‘2시 트라에타오나 신전으로 가게 될 거다. 그 앞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오면 내 뒤를 따라오게 될 거다.’
카렐의 수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시계는 4시 10분을 가리켰고, 카토가 선 바닥 전체가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토의 팀들이 카렐의 시야에서 천천히 사라져갔다.
“학, 학.”
부하들과 잘려 토막나면서, 이곳에 들어온 이래 가장 난처한 상황에 직면한 카렐의 낮은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그의 곁에는 니사도 없고, 가디언 4명이 전부였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 카토가 얼마나 빨리 뒤로 따라붙어줄지가 문제였다.
‘라말라 박사라도 그쪽에 있는 게 다행인가.’
카렐은 일단 카토를 잊은 채 베흔의 뒤를 다시 쫓기 시작했다. 카토가 네피처럼 단순무식한 가디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똘똘한 녀석도 역시 아니었다. 카토가 가게 될 길이 좋은 길일지, 나쁜 길일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니사라도 함께 있다면 크게 헤매지는 않을 터였다.
어쨌든, 몇 걸음 나아가지 않아 베흔 일행의 후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랜턴 하나에 의지해 나아가는 베흔 일행의 전진은 카렐의 예상보다 훨씬 지지부진했지만 그래도 길이 널찍하고 좋아지면서 적들의 걸음에도 한결 가속이 붙어 있었다.
‘그래, 빨리 에아 신전에 도착만 해라. 나 혼자서도 충분해.’
카렐이 스스로를 위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상대 가디언이 50명이지만, 반대편에서 루토가 막아주고 자신이 뒤에서 몰아붙인다면 충분히 적들에게 떼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카렐은 최소한 아직까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거 길이 왜 이리 좋아?”
널찍하게 좋은 길만 계속되자 지레 의심에 빠진 베흔이 사방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기운이 양 어깨에서 샘솟는 듯, 경쾌한 걸음으로 행렬의 맨 앞까지 나서서 걸었다.
그렇게 신나게 발길을 내딛던 베흔은 멀리 랜턴 불빛 너머 보이는 널찍한 공간에 순간 움츠러들고 말았다.
“뭐야? 저건?”
이번에도 자신이 헛다리를 짚었음을 깨달은 순간 발끈한 베흔은 하마터면 손에 쥔 ‘오르마즈의 지도’를 내동댕이칠 뻔했다. 눈앞에 나타난 건 이번에도 그가 처음 들어온 에아 신전의 좁은 돌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는 ‘정확히’ 도착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것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씨발, 빌어먹을. 이건 또 무슨 놈의 우라질 신전이야?”
머리털을 움켜쥐며 혼자 이를 갈던 베흔은 분노를 일단 가라앉히고 신전 안에 들어섰다. 이번에 그가 들어선 곳도 이전과 똑같은 규모, 똑같은 구조의 신전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곳이 누구의 신전인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을 보통의 무식한 가디언은 아니었다. 그는 랜턴을 위로 향하고 신전 천장의 돔에 그려진 벽화부터 재빨리 살폈다.
“백마라.......훗, 제10신 티시트리야로군.”
베흔은 재빨리 ‘오르마즈의 지도’를 펼쳐보았다.
“훗, 1시 방향?”
지도에서 통로를 나타내는 선들은---그의 생각에는--- 하나도 맞지 않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최소한 12개 신전의 위치와 방향만은 정확하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도를 확인한 순간, 그의 굳어있던 표정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뭐, 아주 나쁘지만도 않은데.”
베흔이 싱글벙글하며 지도를 품에 접어넣었다. 그는 신전을 다시 나서서 이번에는 옆으로 난 좁은 ‘순환복도’로 재빨리 접어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머지 50여 가디언들 역시 급히 그 뒤를 따랐다.
“1시 방향이니까 이제 거의 다 왔다. 길이 이렇게만 좋다면 몇 분만 움직이면 돼. 휴우. 이제 황궁을 휩쓸 일만 남았군.”
카렐 일행이 등 뒤에 바싹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베흔은 지금까지 왔던 중 제일 빠른 걸음을 옮겼다. ‘순환복도’는 방사형 회랑보다는 길 자체가 좁은 덕분에 행렬이 길게 늘어졌지만 목표를 코앞에 둔 베흔에게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베흔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익은 광경이 드디어 펼쳐졌다. 처음 들어왔을 때 몇 명의 부하 가디언들이 놀라 자빠졌던 바로 그곳, 에아 신전의 입구였다. 베흔은 급히 달려가며 반사적으로 시계부터 살폈다.
“04시 30분. 제국의 역사가 새로 쓰여질 순간이다.......으음?”
회랑과 ‘순환복도’의 교차점에 우뚝 멈춰선 베흔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먼저 와 있었어야 할 2개의 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베흔이 급히 사방에 랜턴을 비추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급히 바닥을 비춰보았지만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넘어지고 긁히며 남겼던 ‘때가 지워진 흔적’이 전부였다.
2소대장이 바닥을 손으로 짚어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야기 드리기 그렇지만.......아무도 이곳까지 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알아.”
냉담하게 대꾸한 베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의 100명이나 되는 가디언들이, 심지어 그에게 친절하게 길 길을 표시해주었던 동료들까지 이 끔찍한 카타콤베 안에서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더 기다릴까요?”
“이젠 그럴 시간이 없다.”
베흔이 단호하게 대답하며 출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 밖에서 공성전을 시작한지 이미 2시간이 넘었으니 남부 놈들도 슬슬 지칠 때가 되었어. 안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터뜨려 줘야 한다. 좀 무리가 되더라도.”
베흔이 등에 지고 있던 양손검을 뽑아쥐며 출구로 향하자 2소대장을 비롯한 선임 가디언들이 급히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그를 따라온 5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 모두가 지금까지 벗은 채 어깨에 걸치고 있던 위장포를 반사적으로 몸에 둘러감았다.
베흔이 뒤따르는 50여 가디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각자 짐을 열어라. 나누어 준 상자를 확인해!”
“예?”
베흔의 명령에 그를 따라온 가디언들이 등에 지고 온 배낭을 급히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상자’의 내용물을 본 순간, 몇몇 가디언들이 움찔하며 이 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 안에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강력한 고체 인화물질, 그리고 비상용 호흡 마스크가 들어 있었다.
“이건.......”
2소대장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이 가진 인화물질만으로도 황궁의 서너 개 층 정도는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황궁에 불을 지르려고요?”
“숫자에서 딸리니 별 수 없지.”
베흔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방재시설이 잘 되어 있으니 불이 아주 커지지는 않을 거야. 대신 지키는 놈들 얼을 쏙 빼놓기는 충분하겠지. 우리는 그만큼 여유를 벌 수 있는 거고.”
자신의 말을 지금 카렐이 듣고 있으리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베흔이 쓴웃음을 지으며 카타콤베의 출구 돌문을 두 손으로 짚었다. 그는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그 한쪽을 살며시 밀었다. 희미한 불빛이 문 틈새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자 근위대 가디언들의 마비되었던 시력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베흔이 그 틈새로 살며시 눈을 내밀었다.
‘가디언 40명 정도.’
베흔의 수화에 근위대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었다.
‘얼마 되지 않는군.’
입가 가득 미소를 지은 베흔이 양손검을 오른손에 옮겨들며 자신만만하게 수화를 보냈다.
‘내가 앞장선다.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4명의 가디언들과 함께 모퉁이 너머에 숨어있던 카렐은 베흔과 2소대장 사이의 수화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근위대 가디언들이 뒷줄의 동료들에게 연쇄적으로 보내는 수화에서 ‘가디언 40명’이라는 내용을 본 순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루토에게 내린 명령은 ‘가디언 100명으로 에아 신전을 지켜라’라는 것이었다. 그가 바깥과 연락할 수 없었던 사이, 무언가 일이 발생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카렐이 바로 뒤에 선 근위대 출신 부하 가디언을 휙 돌아보았다. 이곳의 지하 신전의 크기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100명과 40명은 그 의미부터가 달랐다. 40명은 베흔을 앞장세우고 돌진해오는 50명이 넘는 근위대 정예 가디언들을 상대하기는 턱도 없이 적은 숫자였다.
‘맙소사.’
여기까지만 오면 베흔을 따라잡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카렐의 눈앞이 순간 캄캄해졌다. 바로 그때, 에아 신전 쪽 출구에서 베흔의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돌격!”
“빌어먹을!”
카렐에게는 이제 다른 선택이 없었다. 겨우 4명의 가디언을 거느린 그는 막 공격을 나가려는 적들의 뒤를 일단 덮쳤다.
에아 신전의 문을 열어젖힌 베흔의 앞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흩어진 채 신전 구석구석을 살피던 동맹군 가디언들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베흔이 어디로 나올지 미처 예상조차 못 하고 있던 그들은 선두에서 달려오는 베흔의 모습에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비켜! 이 새끼들아!”
베흔은 바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려던 가디언의 명치를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짓밟으며 그대로 양손검을 내리찍었다. 그는 자신의 칼을 들어 베흔의 그 무서운 공격을 쳐내보려 했지만 베흔의 무지막지한 검은 그의 칼 중간을 무참히 산산조각내며 상대의 목젖을 찢어내 버렸다.
“네놈도!”
뒤이어 달려드는 또 다른 가디언을 힘으로 밀어내던 그는 할룩스를 통해 막 들어온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시 움찔거렸다.
“대장! 대장! 거기서 나왔습니까!”
너무도 반가운 그 목소리는 카타콤베 안에서 ‘행방불명’ 되었던 1소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어쩌다보니 조금 다른 곳으로 나왔습니다! 지금 황궁 본관 남서쪽 출입문을 통해 1층 로비에 막 접어들었습니다! 배신자 루토에 막혀서 잠시 시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만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일단 들여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데려온 2소대 외의 병력은 기대조차 않고 있던 베흔으로서는 1소대장의 보고에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타크마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지만 어쨌든 1백여명이 황궁 안에 난입한 것만으로도 일단 절반은 성공이었다.
바로 그때, 한참 기뻐하던 베흔의 온몸을 떨리게 할 정도의 소름끼치는 외침이 그의 등 뒤를 울렸다.
“궁으로 나가는 것만 막아! 내가 뒤에서 칠 테니!”
귀에 익은 그 굵고 거친 목소리에 베흔은 순간 오금이 바싹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의 가디언들의 뒤를 이어 달려나오고 있는 검은 튜닉의 전사는 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쓰러뜨려야만 할 숙명의 상대였다. 저 진절머리나는 적수가 자신의 뒤를 바싹 쫓아왔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 저놈을.......”
베흔은 지금 카렐을 상대해야 할지, 아니면 일단 그를 피해야 할지를 당장 결정해야 했다. 물론, 저 카렐만 죽인다면 전쟁은 사실상 끝이었다. 하지만 카렐 역시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퍼뜩 스쳤다.
‘제기랄,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명색이 황제라는 카렐이 데리고 나온 가디언이 설마하니 지금 함께 나온 4명이 전부이리라는 사실을 베흔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는 뒤에서 공격해오는 카렐, 그리고 자신의 돌격에 놀라 사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40명의 동맹군 가디언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3,4분대가 놈들을 막고 나머지 30명은 위로 올라가! 1소대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여기서 시간 끌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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