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3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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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을 3개로 나누어 정북쪽, 에아 신전을 향해 나아가던 베흔은 이곳이 자신이 온 길과 어딘지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밝기만 하다면 무엇이 다른지를 금세 알아챘을 그였지만 어둠 속에서 랜턴에 기대 움직이다보니 그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기까지는 10분이 넘게 걸려야 했다.
“이게........우리가 왔던 길 맞아?”
베흔이 랜턴으로 벽 곳곳을 비추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주 복잡한 미로도 아닌데 잘못 들 리도 없고........”
그는 지도를 펼쳐들며 자신이 그려놓은 ‘왔던 길’을 다시금 확인했지만 길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다하카르 신전에서 옆으로 빠지지 않고 계속 북진했고, 옆으로 빠진 일은 없었다.
“빌어먹을, 내 길찾기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는 줄은 몰랐어. 이봐, 여기가 우리 온 길이 맞던가?”
자신이 ‘지휘’하는 상황에서는 웬만해서는 아랫사람의 의견을 잘 묻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은 그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당초 함께 왔던 부하가디언 중 한 명을 붙들고 다짜고짜 물었지만 그 역시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그도 벽을 더듬거리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도.......좀 이상합니다.......아무래도 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걸.......”
베흔은 자신만을 믿고 뒤따라오고 있는 50여 가디언들을 돌아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행여 길을 잃을까, 그들은 앞 사람의 어깨를 붙든 채 2열, 혹은 1열의 종대로 최대한 바싹 붙어서 전진해오고 있었다.
“짐도 있고.......빨리 나가야 할 텐데.......”
2소대장이 등에 멘 배낭을 다시금 추스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각자의 무기만 들고 전투에 나가던 평소의 가디언들과는 달리, 적진 후방에 들어온 이번에는 그들의 짐이 유난히 많았다. 이들 대부분이 ‘거추장스런’ 랜턴을 빼놓고 온 것도 짐 부피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욕심과 무관치는 않았다.
그들의 짐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며 베흔이 나누어 준 큰 상자 하나씩이었지만 그 내용물이 무언지는 간부들 외에는 알지 못했다.
“몰라, 일단 앞으로 가 보자. 안되면 그때 가서.......”
베흔은 일단 걸음을 바삐 옮겼다. 하지만 그의 이런 고집이 절망감으로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흔은 눈앞을 떡하니 가로막은 막다른 길을 바라보며,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앞을 막은 벽을 짚은 베흔은 뒤따라오는 가디언들이 행여 들을세라, 이를 빠드득 갈며 혼자 중얼거렸다.
“몇 시냐?”
“3시 35분입니다.”
바로 그때, 5분마다 반복되는 짜증스런 진동음이 다시 그들의 발밑을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동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가디언들이 중심을 잃으며 순간 잠시나마 한쪽으로 쏠렸지만 운동감을 느낄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 베흔에게는 당장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어쩌죠?”
2소대장의 물음에 베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쪽으로 돌아가자. 다하카르 신전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길을 되돌아가야 했던 베흔의 2소대, 오른쪽 우회로로 갔다가 저승사자와 마주친 타크마에 비하면 왼쪽 우회로를 택한 1소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7시 바유 신전 앞을 통해 전진했던 그들은 중간중간 몇 군데의 함정이나 눈속임용 길을 만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딱히 큰 문제없이 황궁 지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소대장은 타크마처럼 안쪽 순환복도를 타고 우회할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결국 ‘그냥 중앙을 관통하자’고 결정한 후였다.
사실 중앙을 관통한다면 그가 가진 지도에 따르자면 베흔의 2소대와 교차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1소대장은 ---그의 생각에는---그다지 좋지 않은 길을 계속 통과해 온 자신의 부대가 3부대 중 제일 뒤처진 것 같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그렇다면 괜히 우회할 필요 없이 그냥 베흔 뒤를 따라가는 편이 낫다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소대가 세 부대 중 가장 운이 좋다는---최소한 지금까지는---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베흔이 막힌 길에 절망하며 뒤돌아서야 했던 같은 시각, 카타콤베 중앙부를 관통하는 ‘분침’ 부분에 성공적으로 접어드는, 1/6의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12방향으로 구멍이 나 있는 카타콤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정지! 정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사방으로 난 출구들에 순간 당황한 소대장이 급히 대오를 정지시켰다.
“나침반도 못 쓰는데 잘못하면 방향을 잃는다.”
소대장이 랜턴으로 12개의 출구를 차례대로 비췄다. 정신없는 방향도 문제였지만 어둠에 익숙지 않은 그들에게는 랜턴에 의지한 한정된 시야 또한 큰 적이었다.
힘들게나마 방향을 파악한 소대장은 베흔에게서 받은 지도를 급히 확인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니까 여기서.......우리 정면으로 난 길이 아니고.......그 왼쪽 출구를 통해 쭉 전진하면 에아 신전이다. 맞지?”
사방으로 12개나 되는 출구를 보며 갑자기 방향에 자신이 없어진 소대장은 함께 있던 선임 가디언에게 지도를 내보이며 물었다. 그들이 이 거대한 시계의 정중앙 갈림길에 있는 만큼, 지금 길을 잘못 들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터였다.
“예. 맞습니다. 그러면 에아 신전 맞습니다.”
“됐어, 그럼.”
소대장은 그제야 자신만만하게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런데 여길 아무도 안 지나갔나본데?”
1소대장이 바닥에 난 발자국들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베흔의 부대가 조금 전 이곳을 이미 통과해 지나갔어야 했다.
“사정이 있어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선임 가디언이 랜턴을 사방으로 비추며 걱정스레 대답했다. 어깨를 으쓱 해보인 소대장은 부하들에게 따르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정면 왼쪽’의 출구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소대장의 자신만만한 걸음이 멈춘 건 그들의 ‘운’도 이제 끝까지 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막다른 길을 마주한 소대장은 순간 당황하며 다시 지도를 펼쳐들었지만 최소한 지도에 따르자면 그들은 제대로 온 것이었다.
“이게 뭐야?”
소대장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중간에 혹시 다른 갈라지는 길 있었어?”
“아뇨, 전혀 없었습니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제자리를 서성거리던 소대장은 일단 방향을 돌렸다. 허탈해진 표정의 1소대 가디언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라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12개의 구멍이 있는 ‘중심’ 홀로 다시 돌아온 소대장은 한 칸 더 옆의 출구로 급히 뛰어들었다. 그곳 역시 다른 길처럼 지독한 상하 기복, 구부러진 길과 갖은 함정으로 소대원들을 10분 가까이 괴롭혔지만 결국 ‘막다른 길’로 보답하고 말았다.
“무언가 이상해. 이대로는 한도 끝도 없겠다.”
중심 홀로 힘없이 돌아온 소대장은 차마 부하들을 볼 면목이 없을 지경이었다.
“별 수 없지.”
일단 머리를 쥐어짜낸 그는 백묵 하나를 꺼내들고 조금 전의 막다른 길로 향하는 2개의 출구 옆에 크게 X자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지나 온 출구 옆에 큰 O자를 일단 표시했다.
“그럼 남은 출구는 9개로군.”
소대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뒤의 소대원 중 18명을 차례대로 불러내 각자에게 출구 하나씩을 가리켰다.
“2인 1조로 한 곳씩 들어가 본다. 막다른 길을 보면 바로 돌아오도록 해.”
어찌보면 무식하기까지 한 방법으로 가디언들을 일단 보내놓은 소대장은 ‘길을 알기나 하는 거야?’하는 부하들의 곱지 않은 눈총 속에서 힘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잠시 짬을 얻은 가디언들은 애꿎은 소대장만 탓하면서 어두컴컴한 홀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 동료들이 돌아오기만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 진동이 뭐죠?”
“내가 알 게 뭐야.”
선임 가디언의 물음에 소대장이 짜증스레 대꾸하며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야속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 어느새 접선시각에 거의 가까워진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기랄.”
“여기도 막다른 길입니다!”
한 출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대장이 벌떡 일어섰다. 첫 번째로 돌아온 팀이었다. 소대장은 백묵으로 그 출구 앞에 재빨리 X자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에 뒤질세라, 나머지 팀들도 속속 도착했다.
“여기도 막혔습니다.”
각 팀들이 차례대로 돌아오면서 X를 표시한 출구가 하나둘씩 늘어나갔고, 소대장의 얼굴도 백묵의 흰빛만큼이나 점점 창백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온 팀이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 여기도.......”
“뭐야, 도대체.”
소대장이 다시 지도를 확인했지만 지도의 그림은 보고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지도에 따르면 12개의 출구들은 모두 어딘가로 ‘열려’ 있어야만 했다. 물론, 그는 조금 전 지나간 ‘3시 45분’이 이곳의 12개 출구가 모두 닫혀있게 되는, 1시간마다 2번씩 있는 ‘암흑시간’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소대가 이번에는 지지리 운이 없었다는 것을 소대장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까 다하카르 신전으로 되돌아가야겠다.”
이곳 중심 홀에서만 30분 가까이를 헤매면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1소대장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베흔과 마찬가지로 왔던 길로 걸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우리가 왔던 길이었던가요?”
소대장을 따라 한참을 걷던 1소대의 선임가디언이 소대장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행여 부하들이 들을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안 그래도 잔뜩 굳어있던 소대장은 부하들의 눈치를 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일단 가 봐. 끝까지 가다보면 아무 신전이라도 나타나겠지.”
소대장도 자신의 대답이 무책임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제와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대로 되짚어 돌아온 길이 처음 왔던 길과 다르다는, 황당한 상황이 다른 소대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대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길은 좋군. 좋은 걸 보니 우리가 온 길은 아니야.”
소대장이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올 때 지나 온 토굴 수준의 미로 같은 통로들에 비한다면 지금 이 회랑은 무슨 눈속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이 좋았다. 바닥과 천정, 양쪽 벽은 말끔한 화강암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별다른 갈래길이나 함정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미심쩍은 ‘좋은 길’에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가디언들도 이제는 ‘시간을 단축해야겠다’며 속력을 내 달릴 정도의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덕택에 그들은 중앙의 그 정신없던 홀에서 겨우 10여분만에 끝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어쨌든, 1소대에는 아직까지는 행운이 따르고 있었다.
멀리,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웬 신전 하나가 보였다.
“일단 저기가 누구 신전인지만 확인하면 무조건 시계방향으로 외곽 순환복도를 타고 빙 돌아가야겠어. 빌어먹을 미로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길도 좁고 거리까지 멀긴 해도 그편이 제일 안전할 것 같다.”
회랑 끝 신전에 랜턴을 비춘 소대장은 지도에서 외곽의 순환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임가디언 역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
정신없이 달려온 소대장은 회랑 끝의 신전에 발을 들여놓으며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온 50여명의 소대원들도 잠시 숨도 돌릴 겸, 이 넓고 근사한 신전에 차례대로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들의 시야라고 해 봤자 랜턴이 비추는 좁은 공간에 한정될 뿐이었지만.
“이건 또 무슨 빌어먹을 신의 신전이냐?”
온 길이 왔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1소대장에게 눈앞에 나타난 이 낯선 신전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홀을 빙 둘러보던 그는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도에 있는 12개 신전 중에 하나겠죠.”
선임가디언이 군색한 대답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들 모두 사교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보니 천장화는 물론이고 벽화, 기둥에 가득 새겨진 바람 문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천정화의 ‘마디가 진 풀 다발’ 문장이 어느 신을 뜻하는지 아는 자도 없었다. 물론 안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겠지만.
“지금 몇 시지?”
“04시 정각입니다.”
선임가디언이 어깨를 툭툭 털어내며 대답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어선 한 젊은 가디언이 랜턴으로 천장을 비추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우리가 하오마 신전에 와 있죠?”
“하오마?”
바로 그때, 쿠르릉 하는 유달리 강한 진동이 그들의 발밑을 울렸다. 그다지 심각치 않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조금 전의 그 젊은 가디언은 자신이 들어온 회랑 깊숙한 곳을 무심코 돌아보았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비명같은 고함을 꽥 질렀다.
“길이 막히고 있습니다! 소대장님!”
“무슨 소리야?”
회랑 안쪽을 향해 생각 없이 랜턴을 돌렸던 소대장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출구 안쪽 깊숙이, 자신들이 지나 온 그 ‘기분좋은’ 회랑은 어느새 사라지고 거친 화강암 벽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뭐야! 뭐야!”
당황한 몇몇 젊은 가디언들이 회랑 안으로 허둥지둥 뛰어들어서는 움직이는 벽을 힘으로라도 붙들려 했다.
“위험해! 떨어져!”
후배들의 위험천만한 시도에 놀란 고참들이 허둥지둥 그들을 그곳에서 잡아당겼다. 바닥에 나뒹군 그들의 망연자실한 눈앞에서, 그 육중한 돌벽은 한참을 돌아서야 멈춰 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새로운 출구 대신, 육중한 화강암이 앞을 완전히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갈 곳이 아예 없었다.
정각 04시, 4시의 수호신 아나히타와 10시의 수호신 하오마가 1시간 동안의 ‘조용한 휴식’을 시작할 시각이었다.
한참동안, 하오마 신전에 우두커니 선 이 가디언들 중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좋았던 그들이었지만, 이번 한 번으로 최악의 불운과 마주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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