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5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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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 상태는......”
한쪽에 치워져 있던 유시프 장군의 할룩스에서 막 나타난 건 아래층에서 헌병들을 재정비하고 있던 사에나 쉐너 중랑의 모습이었다. 관제실의 상황을 확인한 그는 하려던 말을 급히 멈추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막 하려던 질문을 모두 생략한 채 오난 중랑장에게 대신 물었다.
“시로 대장군의 지원군은 언제 도착합니까?”
“15분 정도 후. 크샤트라 연대 5천명.”
오난 중랑장이 감정을 애써 감추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입술을 잠시 깨물었던 사에나가 스코프를 고쳐쓰며 역시 감정이 배제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들이 3차 공격을 개시하려는 것 같습니다. 적 일부는 배에 타고 상륙을 시도하려는 것 같고, 주력병력은 방파제를 통해 다시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15분을 버티기는 불가능합니다.”
“알았다.”
유시프 장군의 피범벅 얼굴 위에 담요를 덮어 준 오난 장군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관이 쓰러지면서 이제 부사령관인 그가 이곳의 지휘권자였지만 그는 야전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관제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선 장교들을 둘러보았지만 이곳 관제실의 장교들 역시 결국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에나를 가리켜 ‘정은 안 가지만 정말 쓸 만한 여자 같아.’라고 말하던 유시프 장군의 말을 문득 떠올렸다.
“그곳 전투는 그대에게 맡기겠네.”
“알겠습니다.”
명령권을 위임받은 사에나는 예상했었다는 듯 형식적으로 경례를 올렸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적의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의 10배 가량입니다. 그곳에서도 ‘준비’해 주십시오.”
사에나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대답 대신, 이 짧고 애매한 대답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했다. 오난 중랑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관제실과 연결된 문을 모두 잠그겠다. 1분이라도 더 벌 수 있겠지.”
오난 중랑장은 싸늘하게 번지는 사에나의 쓰디쓴 미소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관제실과의 연락을 끊은 사에나는 포구 안쪽에서 다가오는 근위대의 배를 향해 똑바로 돌아섰다. 수비탑 한쪽에는 아샤 연대 지원군들이 타고 온 소형 수송선, 그리고 수비탑 옆에 정박되어 있던 보트들이 한데 묶여진 채 불에 타고 있었다. 조금 전, 사에나의 명을 받아 헌병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보안국 소속 요원들은 어차피 포로가 된다 해도 제대로 목숨을 건사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눈물을 훔쳐내고 있는 수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밤 수고 많았다.”
그는 팔에 대강 묶은 피묻은 손수건을 이로 꽉 잡아당겨 묶고는 뒤에 선 부하들, 얼마 남지 않은 보안국 헌병들을 문득 돌아보았다. 2번까지는 버티어냈지만, 이젠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그가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배에 불을 지르라는 극단적인 명령을 내린 것도, 극한의 상황에 몰려 도주를 시도하는 바보짓을 아예 차단해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 지원부대가 복수를 하는 통쾌한 광경을 저승에서 볼 수 있을 거다.”
사에나는 석궁의 시위를 힘껏 당겨 걸며 턱을 꼿꼿이 치켜들었다.
아케메니아 포구에서 3번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베흔은 함께 온 소수의 가디언들과 함께 욱리하와 연결된 황궁 지하의 수로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가 이곳까지 타고 온 보트는 이미 물속에 수장시켜버렸고, 이제 남은 건 가디언으로서의 강인한 체력에 기대 이 칼날같이 에이는 물을 뚫고 황궁 안에 잠입하는 것뿐이었다.
“아주 쓸모없는 정보는 아니었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베흔의 첫 번째 한 마디였다. 그의 눈앞에는 오래된 조각품, 그리고 옛 제단 등등의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어두컴컴한 옛 사교 성소가 펼쳐져 있었다. 베흔이 이곳의 주인으로 있던 시절에 이미 질리도록 많이 보았던 곳이었지만 기분 탓인지, 아니면 워낙 이곳에서 오래 떠나 있던 탓인지, 마치 익숙지 않은 남의 집처럼 보였다.
“정보가 꽤 정확한 거 보니 그 새끼 보안국에 써 주기는 해야겠군요.”
함께 온 부하 가디언의 농담에 베흔이 피식 웃음을 지었지만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공짜 밥상 너무 좋아하다가는 체할 수 있으니 더 꼭꼭 씹어 먹어야 해.”
베흔은 한 손에 단검을 뽑아들며 재빨리 물 밖으로 나섰다.
베흔이 ‘공짜 밥상’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것처럼, 황궁 지하의 이 에아 신전까지 들어오는 길은 계획대로 일사천리였다. 보안국 소속의 소형 화물선은 예정시각에서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수로에 접근했고, 접근시각, 심지어 접근 방법까지도 미리 알고 기다리던 베흔과 십여 명의 가디언들은 어렵지 않게 뱃바닥에 무임 승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로에 잠입한 베흔의 팀은 짐을 내리던 하역장에서 빠져나와 다시 수로를 타고 더 전진해 이 텅 빈 옛 신전 터에서 비로소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물에서 빠져나온 베흔은 축축하게 젖은 잠수복을 벗어던지고 품에서 옛 지도의 사본을 꺼내들었다.
“저쪽이야.”
베흔은 신전 한쪽의 작은 신상을 가리켰다. 그는 지친 숨을 애써 가다듬고는 신상에 조심스레 다가섰다. 그가 신상 밑의 기단 한쪽을 힘껏 밀어내자 사람 딱 한 명이 통과할 만한 좁고 어두운 틈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랫동안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던 듯, 곰팡내가 지독하게 풍기는 음산한 공기가 안에서 확 뿜어나왔다.
“지하 카타콤베에 온 걸 환영하네. 수백 년 만에 드신 손님들을 환영해 주는 것 같군.”
가디언들이 어두운 카타콤베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벽은 별다른 표식 없이 대강 다듬은 화강암으로 밋밋하게 마무리되어 있었고, 바닥 역시 크고 울퉁불퉁한 돌이 그대로 깔려 있다 보니 별 생각 없이 걷다가는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후우, 대장이 왜 가디언만 가야 한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군요. 그런데.......”
따라온 가디언들이 조심스레 발을 디디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 어두운 공간은 사람의 육안으로는 아무 것도 구분할 수 없는 암흑 그 자체였지만 선천적인 적외선 시야를 지닌 가디언들에게는 걷지 못할 지경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지금, 열린 문으로 희미하나마 빛이 들어오고 있는 지금까지는.
“앗.”
베흔이 문을 닫은 그 순간, 발을 헛디딘 가디언이 놀라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 바보 같으니. 그것도 못 봤냐?”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주려 다가가던 다른 가디언조차 욱 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씨발, 구멍이 어디 있었지? 안 보이는데?”
당황한 가디언은 바닥의 움푹 들어간 작은 구멍에서 발을 빼내며 대번 욕을 내뱉었지만 곤경에 처한 건 그 한 명 뿐만이 아니었다.
“대, 대장,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동안 ‘어둠’이라는 것을 거의 겪어 본 일이 없던 가디언들이 갑자기 당황한 듯 손을 사방으로 저었다. 그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당황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부딪혀 넘어지고 주저앉으며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병신새끼들 봤나.”
베흔이 혀를 끌끌 차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여긴 교단 놈들이 만든 곳이야. 그 똑똑한 놈들이 여기로 민병대 X들이 들어올 가능성을 생각지 않았을 것 같나?”
“예?”
“목적지까지 막 가려다가는 우리 모두 이마하고 발목이 성하게 남아나지를 않을 걸.”
“하지만 우리는.......”
“그래, 암흑 속에서 적외선 시야가 쓸모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특징을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놈들이라면 몇 개의 간단한 장치만으로 적외선을 차단하고 잘못된 착시를 일으켜서 자빠지게 하기엔 충분하지. 어쩌면 중간중간 치명적인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예?”
“그리고, 여기서 할룩스로 통신이 왜 안 되는 줄 알아? 여기의 벽 마감 안쪽에는 대전처리된 자철석이 함께 들어있어. 강한 자기장 때문에 통신은 고사하고 나침반도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 교단의 지하 구조물로 잠입했던 민병대 특무대원들이 채 절반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게 이유가 있었지. 그런데도 교단 시설물들을 제 집처럼 누비고 다녔으니 오르마즈 그놈도 정말 대단하긴 했지.”
베흔이 ‘오르마즈의 지도’를 새삼스레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도 꽤 오랜 동안 오르마즈의 암살팀 일원으로 이런 곳들을 함께 ‘누볐던’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너무도 쉽게 풀린 상황에 내심 안도하고 있던 근위대 가디언들의 표정에 그제야 긴장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그럼 어쩌죠? 3시까지 가서 타크마 팀을 맞아 줘야.......”
“이런 한심한 놈들.”
베흔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내가 너희들 장비 목록에 이것도 적어주지 않았던가?”
베흔은 등에 지고 있던 배낭에서 태연하게 랜턴을 뽑아들었다. 가디언들의 황당해하는 시선 속에서, 그의 손에서 나온 환한 불빛이 끝도 알 수 없는 긴 복도의 한쪽을 파랗게 비췄다.
“때로는 제일 원시적인 게 제일 효율적이지.”
순간, 가디언들이 당황한 듯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7명 중 명령대로 랜턴을 가져온 건 고작 2명에 불과했다.
“그, 그게 지금까지 필요가 없었어서.......대장이 정규군 장비를 실수로 적어놓은 줄로.......”
“뭐?”
그들의 변명에 베흔이 대뜸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지금껏 적외선 시야, 혹은 스코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왔던 그들에게 이런 ‘원시적인’ 장비를 자신들이 챙겨야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화가 치솟은 베흔이 그들 중 한 명의 종아리를 힘껏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지만 이제와 랜턴을 가지러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랜턴 가진 사람 뒤로 따라가. 떨어지지 말고.”
애써 표정을 다잡은 베흔은 지도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다시 품에 감추었다. 그리고 함께 온 가디언들도 생전 처음 ‘자신들을 위해’ 사용해보는 랜턴 불빛 속에서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5천의 아메샤 스펜타 크샤트라 연대를 이끌고 포구에 들어선 시로가 발견한 건 빗속에서 이미 열려 있는 1번 도크, 그리고 온통 피에 뒤덮인 수비탑 주변의 끔찍한 광경이었다. 비록 마지막은 끔찍했지만, 수비탑의 요원들은 지원군이 와 줄 때까지는 그곳을 지켜낸 것이었다. 아메샤 스펜타를 태운 100여척의 크고작은 선단은 열려있는 도크를 새카맣게 뒤덮으며 포구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다 죽은 것 같나?”
시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 ‘수비군 전멸입니다. 적이 수비탑에 진입했습니다.’라는 오난 중랑장의 마지막 연락을 받은 이후, 몇 분 동안 수비탑과는 아무런 연락이 되고 있지 않았다. 수비탑 주변에는 ‘확인사살’을 하며 돌아다니는 근위대 병사들만 군데군데 보일 뿐, 살아있는 동맹군은 보이지 않았다. 근위대들은 대규모 선단에 놀란 듯, 배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수비탑 내부에서는 아직 산발적인 저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크샤트라 연대장이 수비탑 옥상의 관제실을 가리키며 외쳤다. 관제실의 까마득한 창으로 격투를 벌이는 희미한 그림자, 심지어 누군가 산 채로 창밖에 내던져지는 끔찍한 광경까지 보였지만 그 옥상의 등대는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여전히 선단의 앞을 비추고 있었다. 이미 아비규환이 되었을 관제실에서 누군가 아직까지 선단을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울컥 해 온 시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수비탑을 원래 지키던 150여명의 수비병들도, 그들에게 보내어졌던 120여 아샤 연대의 증원군들도 모두 전멸이었다. 그들의 처절한 저항에 격앙된 아메샤 스펜타의 광신도 병사들 역시 무섭게 술렁이고 있었다.
순간, 선단의 앞을 밝히던 불이 결국 꺼지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병사들 사이에 탄식, 혹은 울음소리까지도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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