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57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
.
.
타르서스 직할군 사령관 수레드 알 유시프 장군은 지난 전투 이후 며칠째 계속 우울했다. 황제와 페로의 자비 덕분에 어떻게 지위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무장으로서 그의 자존심, 아니 부대 전체의 명예는 이미 바닥까지 곤두박질쳐버린 후였다.
“휴우.”
아케메니아 포구의 수비탑 꼭대기, 15층 관제실 구석에 임시로 만들어진 집무실에 앉은 그는 다 식어버린 씁쓸한 찻물을 삼키며 차가운 겨울비가 후둑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한 바깥을 힘없이 응시했다.
“딱 내 기분 같군.”
오늘 역시, 지난 며칠간과 별다를 바 없이 우울했지만 옛일을 후회하며 속만 썩이고 있기에는 황성의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아들 제롬의 폭주 때문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황비 네페티를 위해서라도, 무능하고 사분오열된 부대원을 탓하며 힘없이 주저앉을 수만도 없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도, 네페티는 혼자 있는 그와 부하들을 위해 마련한 저녁식사를 이곳까지 가져왔던 터였다. 아랫사람들에게 유독 자애로운 황비답게, ‘그대가 언젠간 큰일을 해 줄 것이라 믿고 있다네.’라며 축 처진 그의 어깨를 안아주며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었다.
그가 타르서스 별궁에 있는 안락한 사령관실, 그리고 그곳 관사에 있는 처자식의 곁을 떠나 이 포구 수비탑에 허름한 임시 사령관실을 꾸미고 상주하는 것도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황제령 남반구에 위치한 타르서스는 면적만으로는 황제령에서 가장 거대한 대륙이었지만 원주민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그리고 대부분 사막이라는 불리함 덕택에 여전히 저개발지역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한술 더 떠, 타르서스는 제국이 성립되고 세나우스 2세가 황제령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이후로도 부패한 지방 호족들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황실에서 임명된 지방장관의 역할도 그런 호족들을 다독이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 정세는 3만이나 되는 타르서스 직할군의 조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서, 그들의 편제도 호족의 사병(私兵)들에게 통일된 군복을 입혔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명목상 지휘권자인 직할군 사령관보다 자신들에게 ‘봉급을 주는’ 출신지역 호족 가문의 지시를 더 중요시했고, 걸핏하면 호족들간의 권력싸움에 개입해 내분을 일으키거나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했다.
게다가 피해의식 때문에 유난히 폐쇄적인 타르서스인들의 성향 역시 이런 문제를 가중시키곤 했다. 매번 내분으로 속을 썩이는 그들이었지만 외부인들이 자신들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극도로 싫어했다. 우스운 건, 자기들끼리 당장 죽일 듯 싸우다가도 자신들을 말리겠다며 나선 외부인들의 옆구리에 비수를 찌르는 데 있어서는 바로 손을 잡는 그들의 묘한 기질이었다.
카렐의 황실내각에도 황제의 비서실장인 우베, 이부대신 볼토 트라우제까지, 2명이나 되는 타르서스인이 핵심요직을 차지했지만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는 고사하고 더 흠집을 내고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거칠고 호전적이기로 소문난 타르서스인으로 조직된 부대가 우습게도 제국 정규군 중 최악의 오합지졸 부대가 된 것도 피해의식과 동족간 경쟁심이 괴상하게 뒤섞인,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성향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되는 게 없어.”
신경이 곤두선 유시프 장군은 지긋지긋한 서류를 동댕이치며 평소 침착한 그답지 않은 욕을 내뱉었다. 그가 내던진 서류 중 절반은 근무지이탈, 혹은 보급품을 빼돌린 장병들에 대한 처벌 사안들이었고, 나머지는 인수인계에 관한 것들이었다.
“선단도 들어오는데 바빠지기 전에 따뜻한 코코아나 한 잔 드시죠.”
귀에 익은 목소리에 유시프 장군이 고개를 들었다. 김이 솟는 따뜻한 잔을 들고 문 너머에서 나타난 깡마른 흑인 남자는 직할군 부사령관인 페나페 줄루 오난 중랑장이었다.
그는 지난해 네페티 부인과 카렐, 기사단 부단장이 된 발리와 함께 아켐의 그 지독한 사막에 버려져 함께 사투를 벌였던 동지였다. 그런 만큼, 유시프 장군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전우였다.
하지만 셔틀 조종사, 항해사라는 그의 특이한 출신에서 보이듯, 그는 야전이 아닌, 병참, 지원업무 쪽에서 경력을 쌓아 온 전형적인 ‘후방형 장교’였다. 동맹군의 병참업무를 맡은 직할군 부사령관으로 그를 선임한 것도 ‘야전 무장’인 유시프 장군을 도우라는, 카렐의 선택이었다.
“내가 맡은 마지막 선단인가. 누가 아니라고 할까봐 빌어먹을 날씨까지 고약스럽군.”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선 유시프 장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뿌연 빗줄기, 그리고 희미한 물안개에 휩싸인 포구를 지켜보았다. 오늘 밤 들어오는 저 선단을 마지막으로, 다음 선단부터는 서부연합군 사역병단이 보급품 수송 업무를 인계받기로 되어있었다.
“우리 부대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데 사실입니까?”
오난 중랑장이 유시프 장군에게 잔을 넘기며 조심스레 물었다.
“글쎄, 직할군 자체가 호족들 사병조직을 양성화시키려는 정치적인 의도로 만들어진 거였으니.......호족들 반발 때문에라도 해체가 쉽지는 않겠지.”
“길게 보면 그 때문에라도 언젠간 해체해야 할 부대겠지요. 천하의 황상께서 호족들 설치는 저 흉한 꼴을 계속 보시겠습니까?”
“자네도 절반은 타르서스 사람이 다 됐군?”
유시프 장군의 물음에 오난 중랑장이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로 올 식량하고 일반 보급물자에서 1할 가까이가 운송 과정에서 매번 증발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상께서도 많이 참으신 거지. 북부보병대가 직접 수송하는 작전물품 중에서는 아직 한 건도 도난이나 분실 사고가 없었는데 말이야. 듣자하니 요즘 타르서스 시장에서 식료품 값이 많이 떨어졌다지?”
“그랬군요.”
오난 장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시프 장군은 코코아 한 모금을 꿀꺽 삼키며 오난 중랑장에게 서류 한 장을 내보였다.
“어쩌면 해체시기가 생각보다 빠를지도 모르겠어.”
“뭡니까?”
“나한테 온 거야. 그 뒤에는 자네한테 가는 것도 있으니 봐봐. 똑같은 내용이야.”
오난 중랑장이 펼쳐든 서류에는 ‘보직이동 예고’라는 도장이 큼직하게 찍혀 있었다.
“지난 일의 간접적인 처벌일까요?”
“그건 아닐 거야. 밑에 후임자가 누구인지 안 적혀 있잖나. 자네도 마찬가지고.”
“......”
“뭐 이번 일 덕에 이 자리가 중앙군 사이에서는 기피 1순위가 되기는 했지만 중앙군으로 오고 싶어하는 제후군 출신들한테는 제일 좋은 꽃가마 아닌가.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황상께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다음 보직이.......”
“난 주류성 수비대장일세. 지난번 전사한 사르키스 세호 경 후임이지. 자네는 사령부 군수참모인 것 같더군.”
“사고 낸 부대 지휘관 치고는 후한 보직이군요.”
오난 중랑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병사들의 지휘 임무보다는 수송 실무를 맡고 있기는 했지만 그도 부사령관인 이상, 지난 일의 책임에서 그다지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였다.
“상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으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 봐야지.”
힘없이 중얼거리던 유시프 장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보급선단의 입항 허가 요청입니다.”
입항 통제를 맡고 있던 직할군 장교가 유시프 장군에게 사무적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모두 몇 척이냐?”
유시프 장군은 서류를 받아들며 한손으로 펜을 집어들었다. 평소처럼 기계적으로 서명을 하려던 그는 갑자기 눈가를 찡그리며 일단 손을 멈추었다.
“모두 타르서스 선적이군. 그런데.......”
유시프 장군이 눈가를 찡그렸다.
“오늘 검문 담당관이 타르서스식 이름이군? 타르서스 선적의 배들을 타르서스 출신 검문관한테 맡긴다고?”
“지금까지는 관례적으로.......”
서류를 가져온 직할군 장교는 어차피 곧 물러날 사령관의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에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안 그래도 타르서스에 독기가 잔뜩 올라있던 그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건 다른 지역 배와 묶어서 선단이 만들어졌을 때 이야기지. 타르서스 배로만 이루어진 선단은 다른 지역 검문관이 맡았어.”
“그건.......”
보통 때라면 ‘알겠습니다. 검문관을 교체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어야 정상일 그 장교는 무슨 이유엔지 사령관의 불호령에도 계속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유시프 장군은 그다지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랜 군 지휘관 경험으로 얻은 나름의 동물적인 직감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있었다. 그것이 ‘어차피 곧 물러날 서부 출신 사령관’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이든,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이든.
“그러니 이 빌어먹을 부대가 오합지졸 소리를 못 벗어나지.”
이를 갈던 유시프 장군은 벌떡 일어나서는 망원경을 집어들고 도크 부근을 살폈다. 잡비품, 식료품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배들이 빗속에서 도크에 늘어선 채 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시프 장군은 구석에 앉아있던 부관에게 눈짓으로 도크를 가리켰다.
“가서 검문관 곁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근위병들도 데려가.”
“알겠습니다.”
상관의 뜻을 알아챈 부관은 서류를 싸들고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페나페.”
유시프 장군은 이번엔 반대편에 서 있는 부사령관 페나페 오난 중랑장을 힐끔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무언가 눈치를 챈 오난 중랑장이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가며 보고서를 가져온 직할군 장교의 뒤에 마치 위협하듯 똑바로 섰다.
유시프 장군이 그 장교의 칼을 덥석 붙들며 굵게 낮춘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곧 물러날 사람이라고 네놈이 지금 항명을 하자는 거냐?”
“무, 물론 아닙니다.”
“수송선단의 제일 선두와 제일 후미는 누가 맡아야 하지?”
“그, 그건.......사령관 직속 헌병대가 함께 탑승해서.......”
“그런데 서류상 후미에 있어야 할 헌병대 선박이 왜 뒤에서 세 번째에 있는 거냐?”
유시프 장군은 창밖으로 보이는 선단의 모습을 가리키며 버럭 화를 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그 장교가 부동자세를 잡으며 또렷또렷하게 대답했다.
“그, 그러시면 검문관을 즉시 교체하겠습니다.”
그 장교의 변명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유시프 장군은 할룩스로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짧은 침묵, 그리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 후, 유시프 장군이 할룩스를 탁 끄고는 신경질적으로 칼을 집어 허리에 찼다.
“필요 없어. 바람도 쐴 겸 내가 직접 나갈 테니. 검문관이 이미 일을 시작한 모양이니 내 옆에서 지켜보면 되지.”
그 장교를 한쪽으로 거칠게 떠밀어낸 유시프 장군이 사령관실에서 성큼성큼 나서며 부사령관 페나페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그는 페나페의 귀에 대고 귀엣말로 일렀다.
“보안국에 연락해서 저 장교놈 미행하도록 해. 아무도 모르게 하는 거 잊지 말고.”
“다른 증거가 있는 겁니까?”
“아직은 그저 느낌일 뿐이야.”
“선단에 아크반 가문에서 징발한 배가 2척이나 있어. 알겠지만 거기는.......”
“도망간 장교놈 가문이군요. 그럼 방금 검색하신 건.......”
“이번 검문관 놈도 아크반 가문에 10년이나 있던 놈이더군. 자넨 당장 가서 검문관 녀석 관련 자료를 모조리 검색해서 나한테 알려줘. 아크반 가 그 개새끼들 이번을 마지막으로 수송업무 허가를 취소당했거든. 마지막으로 한건 해 먹으려는 모양인데 내 가기 전에 새끼들 버릇을 확 고쳐놔야겠어.”
이번 일의 배후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유시프 장군에게는 당장은 '군수품 밀반출' 정도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응?”
엘리베이터 앞에 선 유시프 장군은 조종 판넬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엘리베이터 카(Car)가 탑 중간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페나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방금 보낸 부관하고 근위병들이 저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니겠죠?”
“빌어먹을!”
다급해진 유시프 장군은 엘리베이터를 놔둔 채 계단에 뛰어들었다.
“자네가 여기서 내 대신 관제실을 지켜. 관제소에서 보안국 요원 몇 명만 뒤따라 내려 보내고, 혹시 모르니까 보안국 헌병대에 병력지원 좀 요청해. 뭔가 이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