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50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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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향해 선 카렐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드십시오.”
먼저 와 있던 니사의 안내를 받으며, 흰 베일과 망토로 온몸을 모두 가린 한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드리운 베일 너머,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유난히 빛이 나는 눈동자가 제일 먼저 카렐의 관심을 끌었다.
‘근친혼이 이유가 있었군.’
묘한 특별함이 느껴지는 상대의 눈빛을 바라보며 카렐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와 곧고 당당한 자세만으로도 수십 대에 걸쳐 세심하게 선별되어 내려온 전설적인 마구스 혈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이나마 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 소장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루토가 마지막으로 방을 비워주고 난 이후, 이 허름한 거실 안에는 황제와 흰 망토 차림의 손님, 그리고 이번 만남을 주선한 니사까지 단 세 명만이 남아있었다.
“이쪽은.......”
니사가 그 ‘손님’을 소개하려 했지만 카렐은 필요 없다고 손짓을 하고는 문가에 서 있던 그에게 기꺼이 먼저 다가섰다.
“빤히 알면서 그런 게 굳이 필요한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압적인 체구의 황제를 향해 그 ‘손님’은 기다렸다는 듯 얼굴에 드리운 하얀 베일을 걷어냈다. 그리고는 마주선 황제에게 자신의 맨얼굴을 보란 듯 그대로 드러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구스들이 외부인에게 맨얼굴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카렐은 잠시나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빛의 수호자인 트라카 교단을 이끄는 마구스 수나 빈트 트라카라고 합니다.”
굵고 힘이 있는 그의 목소리에 카렐이 눈가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확인해 드리나이다.”
수나 마구스는 손바닥을 펼치고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보였다. 반 뼘 정도 폭의 은빛 팔찌에는 12개의 교단을 상징하는 조각이 빙 둘려져 새겨져 있었고, 손등에 있는 가장 큰 혜성의 문장이 이 소유자가 트라카 교단의 마구스임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렇게 알현을 허락해 주신 데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바치옵니다.”
수나 마구스가 가슴에 X자로 팔을 교차시키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내 주치의에게 그 공을 돌리지요.”
카렐은 허리를 굽힌 수나 마구스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기품과 예법을 모두 겸비하였으니 역시 위엄을 잃지 않은 당당한 모습입니다.”
카렐도 마치 최고제후를 대하듯 그를 최대한 높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심 상대가 방자하게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던 그로서는 수나 마구스가 먼저 기꺼이 고개를 숙이자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쿠트라스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
“셔틀과 선편을 마련해 주셔서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날 만나자는 이유를 주치의 니사에게 묻지는 않았소. 직접 듣고 싶었으니.”
카렐은 거실 중간의 허름한 소파를 권하며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나 마구스는 황제 바로 맞은편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으며 카렐을 다시금 올려보았다. 탁자 위에는 이 비밀스런 만남을 위한 간단한 다과가 미리 차려져 있었다.
“소인 폐하의 용안을 감히 똑바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수나 마구스의 이상한 요구에 카렐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다른 건 몰라도 눈싸움에서만은 자신이 있는 그가 굳이 상대를 피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예법이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가능하다면 수나 마구스의 눈빛을 똑바로 확인하고 싶었다.
“원한다면.”
카렐이 가슴을 넓게 펴고 앉으며 보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수나 마구스의 검은빛 묘한 눈빛을 그대로 정면에서 받아들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딘지 익숙한 눈빛이군.”
먼저 입을 연 건 카렐이었다. 수나 마구스 역시 그제야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름다운 순혈 그레이오팔을 다시 보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무리한 청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둘은 서로에게 상대방의 느낌을 굳이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구구한 대화가 없이도 결론 따위는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 주치의 니사를 보낸 것도 그대요?”
카렐이 먼저 찻잔을 집어들며 물음을 던졌다.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수나 마구스가 눈썹을 내리깔며 황제를 따라 잔을 두 손에 공손히 들었다.
“그러면 지난 독감이 내게 치명적이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마구스가 되기 이전부터 병리학자이었고,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번 변종 바이러스가 S를 공격할 수 있는 특수한 기작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그대도 S의 특징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카렐의 질문에 수나 마구스가 그 붉은빛 입가에 가는 미소를 품었다.
잠시 후, 다시 밋밋한 표정으로 돌아간 수나 마구스는 황제에게 대답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혹시 ‘입실론’에 관해 아십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은 일단 교과서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파냐드 리쿠의 첫째 남편이었지? 중시조 샤미르의 조부였고.......우리 리쿠 가에 S를 처음 전해 준 당사자 아니신가.”
“그 입실론은 이마 480년.......그러니까 기원전 9년에 우리 교단에서 TSG 민병대에 납치되었습니다. 당시 26살의 젊고 활달한 청년이었지요.”
순간, 카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나, 납치? 지금 납치라고 했는가?”
“그리고 12년 후에 TSG-제니안의 첫 번째 통합 지도자인 파냐드 리쿠와 강제로 혼인했습니다. TSG민병대가 유학자집단 제니안과 전략적 제휴를 하면서 통합을 위해 한 정략혼........아니 우수한 2세를 위한 씨내리였다는 편이 더 정확했겠군요.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폐하의 고조부이신 에르네스토 리쿠가 태어났습니다.”
순간 카렐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마주앉은 이 마구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내 알기로 S와 X는 고향 행성 돌연변이 생존자 중에서 특별히 선별되어서 TSG의 유전자 연구소에서 개량된.......아니, 아니, 모든 게 엉망이군.”
알고 있던 모든 지식들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모조리 꼬여버린 카렐이 이마를 싸쥐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황제에게 수나 마구스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민병대 연구소라고 하셨습니까? 당시까지 그곳은 연구소라고 이름붙이기도 민망한 시설이었습니다. 그곳엔 우리 연구소에서 훔쳐간 고물 합성기와 현미경, 냉장고 1대가 전부였습니다.”
“.......”
“그 정도로는 개량은 고사하고.......의학교 1학년 실험수업조차 할 수 없는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자그룰라 모렌 박사에게 확인해보신다면 바로 아실 것이옵니다. 입실론과 함께 납치되어 갔던 자이니.”
수나 마구스의 입에서 자신의 측근 이름까지 흘러나오자 카렐의 표정이 순간 백짓장이 되었다. 그가 아는 자그룰라 모렌 박사는 공립 교육기관인 콜로니 아카데미 출신이었고, 민병대에 의무관으로 자원입대했던 공신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당시만 해도 2류 의학교로 치부되던 학력으로 제국의 지도층에 오르고, 심지어 상급귀족 반열에까지 올랐던 것도 그가 ‘교단과 전혀 관계가 없는 최고 수준의 의사’라는, 보기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자그룰라 모렌 박사는 하오마 교단 의학교 출신 초급 연구원이었습니다. 입실론의 관리를 위해 함께 납치해간 것으로 압니다. 이후 민병대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전력을 ‘세탁’할 수 있었지만.”
순간 카렐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도 보안국장 시절, 극비로 관리되고 있던 당시 시설물들의 기록을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수나 마구스와 똑같은 의문을 그 역시 가졌던 터였다. 일개 게릴라 집단이 그런 형편없는 시설에서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냈다는 것부터가 무언가 찜찜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카렐이 수나 마구스가 알려준 사실에 크게 당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카렐은 내친 김에 모든 의문을 풀어보기로 맘먹었다.
“입실론에게는 S-2-5라는 꼬리표가 있었으니 다른 S도 최소한 4명 이상 있었다는 뜻이겠지?”
“.......”
“입실론이 납치 당시 26살이었다면 기원전 35년에 태어났다는 뜻이니 어쨌든 수명개조 이후 세대로군. 그렇다면 함께 태어난 다른 형제 S들이 자연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하군. 그들이 어찌되었소?”
황제의 물음에 수나 마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물음이 폐하의 증조부이신 샤미르를 생각해서 하신 것이라면 폐하께서 몸소 알아보심이 더 낫지 않을까 하옵니다.”
수나 마구스의 냉담한 대답에도 카렐은 눈을 부릅뜨며 계속 물었다.
“내 증조부 샤미르는 SS호모였다네. 고조부 에르네스토 리쿠가 S의 보인자였지만 그것만으로 SS호모인 아들을 얻기에는 부족해. 그렇다면 내 고조모이신 파란기스 카이 부인 역시 S 보인자였다는 결론은 쉽게 나오는군.”
“소인이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파란기스 카이 부인 역시 S로 추정된다는 것뿐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알고계신 대로.”
수나 마구스는 이 빤한 대답만 던져놓은 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파냐드가 며느리를 모질게 들볶았었다는 소문도 그 정도면 동기가 충분해지는군. 더 이상 자식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는 것도.......”
카렐이 그답지 않게 떨리는 손끝으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둘 사이에는 그렇게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 입을 연 카렐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민병대의 기술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형편없었다고 하니 새로운 궁금증이 생기는군. 최종개량형인 5세대 X들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 한동안 민병대는 새로운 X를 만들어내지 못했소. 100년이 넘게 지나 세나우스 2세 시대에야 비로소 6세대 합성이 시작되었지만 이전에 합성된 5세대보다도 도리어 질이 떨어졌지. 그건 도대체......”
카렐의 계속된 물음에 수나 마구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언뜻 공손한,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폐하께서 이번 전쟁에서 이기시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온 것이지 제게도 상기하기 고통스러운 옛날 일을 넋두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카렐이 천천히 눈을 치켜뜨며 수나 마구스를 돌아보았다. 그와 잠시 시선을 주고받던 카렐은 그를 더 이상 추궁하는 것을 일단 접었다.
“그럼 조금 전 정보는 내게 준 첫 번째 선물로 알지.”
“두 번째, 세 번째를 기대하시는 것입니까.”
“그대 역시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를 바보는 아니오. 아마 다른 이유가 있어 밝히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쨌든 내 인내심은 충분하고, 제국의 황제로서 그 누구에게서든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이니.”
수나 마구스의 입가에 순간 묘한 웃음이 번졌다.
“저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126년 전에 그랬듯이.......”
수나 마구스의 첫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마치 입 안에서 맴도는 듯한 그의 두 번째 중얼거림은 카렐의 예민한 청각으로도 알아들 수 없었다.
“고맙소.”
연륜이 묻어나는 수나 마구스의 중후한 얼굴을 바라보며, 카렐은 어쩌면 자신이 저 당당한 사람을 꽤 좋아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본능적인 예감을 품었다.
“그래, 그러면 날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이야기해 주면 좋겠군.”
“저 역시 이곳에 남아있는 신도들을 통해 이런저런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렐이 쿠키를 집어 입에 넣으며 조금 전보다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옆에 있는 니사를 잠시 스치고 있었다. 당황한 니사가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소인, 그 본분에서 어긋난 행실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사옵니다.”
니사의 변명에 카렐이 껄껄대며 손을 저었다.
“의심하자는 게 아니니까 지레 놀랄 건 없네. 난 누군가를 의심할 것 같으면 아예 쓰지 않는 사람이야.”
수나 마구스가 말을 이었다.
“플라칼 가만 움직여 준다면 폐하의 군대가 능히 승리할 수 있을 텐데, 지금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있는 줄로 압니다.”
“.......”
“사자를 보내자니 포위망 때문에 갈 수가 없고, 비엔에 있는 플라칼 본가의 저항 때문에 무선 연락 또한 어려우시겠지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어려움이지.”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하며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하지만 근위대 또한 카나르 플라칼의 격렬한 적대감 때문에 사자를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사자들이 제후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돌아오고 있으니 다급한 입장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직은 너무 성급해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대의 정보망은 생각 외로 다양한 곳까지 뻗어있는 모양이군?”
카렐의 물음에 수나 마구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카나르 경에게 잘려 돌아온 근위대 사자의 손목 역시 의사가 치료하니까요.”
“푸핫.”
카렐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그대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요?”
“첫 번째로, 카나르 경과 직접 연락하실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순간, 카렐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수나 마구스가 여전히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카나르 경은 무성의한 연락보다는 연합군의 포위망을 목숨을 걸고 뚫고 들어와 줄 폐하의 특명 칙사와, 이후 약속이 담긴 공식적인 칙서를 더 원할 것입니다. 근위대장 역시 그것을 알기에 손목이 잘릴 것을 알면서도 사자를 계속 보내는 것이고요.”
“......”
“조만간.......부마 예르마크 경이 연합군 측 사자로 갈 것입니다. 근위대장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지요. 카나르 경이 절대 접견을 거부할 수 없을 테니.”
“그것도 그대의 정보망을 통해 들어온 정보입니까.”
카렐의 냉소적인 물음에 잠시 미소를 지었던 수나 마구스가 대뜸 뚱딴지같은 말을 꺼냈다.
“이쪽에서는 제가 폐하의 칙사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카렐의 놀라움에 찬 시선을 무시하며, 수나 마구스가 그 검은빛 눈동자를 묘하게 꿈틀거렸다.
"앞으로 절대 배반하지 못할 폐하의 충직한 종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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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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