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7 회: 파트 6. 신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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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피곤하다고 회의도 다 안 끝내고 들어간 사람이 무슨 뜬금없이 문신이야?”
저녁회의를 다 끝내고 황제 처소가 있는 150층에 찾아갔던 페로는 이라즈가 카렐의 처소에 있다는 우베의 보고에 불같이 화부터 냈다. 안 그래도 이라즈나 노에누스 가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반응을 보이던 그였지만 그가 다른 곳도 아닌 황제의 침소에 들어갔다는 말에 어느새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라즈 경께서 지난번 말씀하신 문신 도안이 완성되었으니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우베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페로의 노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하여간 아프면 아픈 대로 속 썩이고 성하면 성한 대로.......”
혼자 이런저런 불평을 중얼거리던 페로는 옆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우베의 모습에 결국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질투가 뒤섞인 그의 짜증이 다음으로 향한 표적은 주치의 니사였다.
“아니, 몸도 다 낫지 않으신 분이 엉뚱한 행동을 하시면 당연히 주치의가 말릴 것이지 그걸 그냥.......”
성을 못 이기고 씩씩대는 페로에게 니사가 웃음까지 띤 얼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겉으로는 웃고 계시지만 지난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면서 속으로는 많은 부담감에 눌려 계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밝은 모습을 보이셨지만 홀로 계실 때마다 우울한 모습이셨습니다. 기분전환 겸해서 몸단장이라도 하시면 좋을 것 같아 소인이 먼저 권해드렸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나 한 시간 더 자는 게 낫지!”
페로는 계속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며 다시 소리를 질렀지만 니사의 대답은 이미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어차피 주무시는 동안 새깁니다.”
“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던 우베가 재빨리 입을 가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페로에게 니사의 능청스런 대답이 이어졌다.
“소인이 가벼운 마취성분이 있는 수면제를 처방해 드렸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페로가 그들의 곁을 급히 지나 황제의 처소로 향했다. 그런 그에게 니사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쯤 졸고 계시겠죠. 심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걱정되신다면......”
순간 당황한 페로가 니사를 휙 돌아보았지만 그는 가벼운 웃음만을 지은 채 페로에게 들어가도 된다며 손짓을 보냈을 뿐이었다.
황제의 처소로 종종걸음을 치는 페로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니사는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게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건넸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스메르디스님.”
“그까짓 수면제 처방? 훗, 감격스럽군.”
어느새 그의 등 뒤에 닿을 듯 다가온 밀리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시커먼 속내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폐하의 약을 가져오시면 이라즈 경 대신 당신이 뜻을 이를 수 있게 도움을 드리겠다고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고마워 죽겠군.”
“제가 드린 약속은 ‘도움’이 전부지요. 그럼 당신에게만 음욕을 품는 최음제라도 개발할까요??”
니사가 빈정거렸지만 밀리타 역시 지지 않았다.
“허, 지금 꼬리치고 있는 게 누구였더라?”
밀리타의 공격적인 말투에 니사가 갑자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쓸데없는 망상은 집어치우시죠. 저분의 운명에 제가 있을 자리 따위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밀리타가 니사의 귀에 입을 가져가며 소름끼칠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도 그런 소리를 해 놓고 나를 감쪽같이 속였지.”
“오르마즈님을 치료할 생각이라고 거짓말을 한 건 그쪽 아니던가요? 당신과 니딘투벨은 제가 가지고 있던 그분 이마의 다하카르 조각이 필요했고, 그분께 접근하기 위해 친분이 있던 절 이용해먹었죠.”
이번엔 니사가 갑자기 눈에서 살기를 띠며 밀리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지만 그도 순순히 밀려주지 않았다.
“너도 우리의 약물 조합 기술을 빼가려고 했으니 할 말은 없을 텐데?”
“전 당신같이 ‘특별한 존재’는 아니지만 죽어가는 환자에게 당신처럼 엉터리 처방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학박사 밀리타 레즐린님.”
니사는 ‘의학박사’라는 말에 잔뜩 힘을 주어 강조했다. 창백해진 밀리타에게 니사가 계속 빈정거렸다.
“아니, 다하카르 교단 의학교 수석 졸업생이고 유전학 연구소 부소장이셨던 ‘스메르디스’라고 할까요? 아니면 코드명대로 ‘델타’라고 할까요? 이런, 이런, 도대체 이름이 몇 개이신지 이젠 헛갈려 미치겠군요.”
니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놓고 키득거리자 밀리타는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벌개진 얼굴로 목소리를 결국 한 톤 높이고 말았다.
“네 그 잘난 환자에게 꼬리를 친 건 그럼 의사로서 할 도리였던가?”
순간 니사가 눈꼬리를 가늘게 떨었지만 마주선 다혈질의 밀리타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오호? 도리라고요?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고 ‘람다’와 ‘붙어먹었다는’ 소문이 그럼 틀린 것이었던가요?”
순간 짝 소리와 함께 니사의 뺨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맞은 건 니사였지만 그의 앞에 두 손을 벌벌 떨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는 건 도리어 밀리타였다.
니사는 터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더듬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셨으니 그 애송이에게 운명을 빼앗기셨어도 할 말이 없죠. 지금 당신의 뒤늦은 수작도 옆에서 보니 정말 애처로울 지경입니다. 뭐, 지난번 약속이 있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도와는 드리겠습니다만.”
니사가 밀리타에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휙 돌아섰다. 그리고 치욕감과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밀리타를 자리에 놔둔 채 페로가 조금 전 향했던 카렐의 처소로 태연하게 걸었다.
황제의 처소에 든 페로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안락의자에 등받이를 보고 뒤돌아 앉은, 괴상한 자세로 졸고 있는 카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격분하게 만든 건 상의를 모두 벗은 카렐의 등에 다른 남자, 그것도 유달리 예쁘장하고 앳된 모습의 한 미청년이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얼굴을 바싹 붙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
무어라 한 마디 하려던 페로는 혀끝에 걸려 있던 거친 말들을 일단 목구멍 뒤로 삼켰다.
“응?”
잠에서 반쯤 깬 카렐이 졸음이 가득 든 눈을 비비며 물었다.
“페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폐하.”
깜짝 놀란 이라즈가 황제의 등을 손으로 얼른 짚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카렐이 키득거리며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턱을 기댔다. 황제의 맨살을 만지고 있는 이라즈의 모습에 페로의 눈에서 또다시 불똥이 튀었다.
“미안해, 페로, 내가 졸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아참, 여기서는 황제 행세해야 하는 거였나? 아, 놀라지 말게, 이라즈 경. 나와 총리는 사석에서는 원래 이러니까.”
카렐이 등 뒤의 이라즈를 잠시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이 ‘살아있는 화폭’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이라즈가 그제야 페로의 존재를 깨달은 듯, 잉크와 기계를 급히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총리 각하.”
페로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카렐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흘끗 쳐다보았다.
“어때? 맘에 들어?”
카렐이 페로를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무언가.......익숙지 않은 냄새가 나는군. 그림이라기보다는 무슨 상징 같은.......”
“모든 그림은 상징이지요. 그것이 자아든, 남몰래 나타내고픈 메시지든, 숨겨져 있던 본능이든.”
이라즈는 페로의 사나워진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의 등을 계속 어루만지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등과 어깨가 유난히 희어서 그곳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몸 자체의 선이 아름다우셔서 색조와 디테일이 화려한 그림보다는 단순화한 검은 단색 문신으로 했습니다.”
마치 화폭을 느끼듯 카렐의 등을 쓰다듬는 이라즈의 손끝을 노려보며 페로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지만 그 순진한 청년은 무언가에 반쯤 취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혼자 말을 이었다.
“등은 목 뒤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는 칼 문양입니다. 그리고 칼을 감아 올라간 용이 어깨를 거쳐서 가슴까지 내려옵니다. 용의 뿔이나 불꽃 문양은 혈관이나 근섬유가 두드러진 부분을 따라가며 덮도록 문양을 도안해 보았습니다.”
“뭐.......괜찮네.”
페로가 마지못해 수긍하자 카렐이 아직 어눌한 음성으로 웃기 시작했다.
“푸훗, 멋쟁이 총리가 괜찮다는 거 보니 정말로 괜찮은 모양이야. 지금까지 2시간이나 고생했는데 맘에 안 들면 큰일이지.”
카렐이 거울에 비치는 반쯤 완성된 등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페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도안 자체는 그의 맘에도 꼭 들었지만, 무엇이라도 꼬투리를 하나쯤 잡고 싶은 맘에 그는 머릿속을 최대한 굴리고 있었다. 그것이 말이 되던 안 되던.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용이냐?”
“예?”
페로의 엉뚱한 물음에 이라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상께 어울리는 문장이 그럼 또 무어가.......”
“어깨를 타고 올라간 용 문장은 사교 초기에 다하카르의 문장이었다는 걸 자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사교 시대 미술을 전공했다며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나?”
페로의 생떼에 이라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하카르의 문장은 초기에는 양 어깨에서 돋아난 2마리의 뱀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이 이후에는 어깨에 용을 감은 남자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기원전 259년 교리개혁과 천도 이후로는 사람의 형상이 없어지고 머리 3개가 달린 용으로 바뀌었지요. 정확히 아시는군요.”
“어깨에 용이 얹힌 건 느낌이 좋지 않아.”
페로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이라즈도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상께서 전통적으로 입어오신 용포에는 양 어깨에 용의 문장이 하나씩 들어갑니다. 어깨에 얹힌 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400여년간 입어오신 용포부터 바꾸셔야 할 것이옵니다.”
“흐음.......”
자신의 빈약한 지적이 대번 반박당한 페로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카렐까지 한 술 더 떴다.
“생각해보니 양쪽에 하나씩 얹고 있는 것도 정말 잘 어울리겠어. 용포하고 딱 어울리잖아.”
“카렐.”
페로가 대번 눈을 흘겼지만 카렐은 뻔뻔한 얼굴로 이라즈에게 작업을 계속하라며 손짓을 보냈을 뿐이었다.
“지금 보니.......”
페로가 카렐의 등에 반쯤 새겨진 칼을 유심히 살펴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지금 옆에 있잖아.”
“응?”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페로에게 카렐은 안락의자 옆에 기대 세워져 있는 카타나를 가리켰다.
“아까 대전에서 봤던 오르마즈 경의 칼이야. 그런데 신기하지? 이라즈 경이 원래 도안했던 칼 모양이 지금 이 칼하고 똑같지 뭐야. 그때는 칼이 황궁에 도착하기도 전인데 말이야. 이라즈 경은 오르마즈 경을 만난 일도 없는데.”
카렐의 이런 당연한 의문에 대답한 건 당초 도안자인 이라즈였다.
“아마도 옛날에 자료 같은 것에서 보았던 것이 무의식중에 도안으로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분께선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카파키 가에 있는 그분 기념관에 갔을 때 봤을지도 모르고요.”
이라즈의 대답에 카렐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양반 갑주하고 무기는 근위대 눈치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전시하지 못했을 텐데?”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아까같이 잠이나 자. 그게 아니어도 이 칼 볼 일은 많았을 테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카렐에게 페로가 괜한 신경질을 버럭 냈다. 그는 작은 의자를 하나 끌어다가 카렐 바로 옆에 가져다놓으며 마치 감시하듯 눈을 부릅떴다. 그런 페로에게 카렐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계속 있게? 다 되려면 내일 새벽이나 되어야 할 텐데.”
“보조침대에서 자지 뭐. 어차피 비상대기라 편하게 자긴 틀렸는데.”
그 조그만 의자에 쭈그려 앉은 페로가 이라즈를 살짝 흘겨보며 냉큼 대답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자기 여자의 곁에 다른 남자는 용납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에 카렐도 장난스레 웃음만 지었을 뿐 더 이상 뭐라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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