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39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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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공성전을 어렵게 버티어낸 동맹군 진영에는 이제 ‘지난 전투의 평가’라는 영광스런, 아니 누군가에게는 공포에 가까울 단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묘한 기대 혹은 걱정은 전투가 끝나고 난 다음번 아침, 막 떠오른 햇살 속에서 황궁 광장에 모여든 수비병들의 긴장어린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나오지 그러셨습니까.”
피묻은 튜닉을 보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비서관 우베에게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젠 거의 상설 구조물이 되어버린 황궁 광장의 제단에는 황제와 내각 사람들 같은 ‘산 사람들’ 외에도 이미 죽어간 용사들의 시체도 각각의 소속을 상징하는 고운 천에 덮여 있었다.
“갈아입으실 시간이나 있으셨겠나.”
베아트릭스가 즉시 황제를 변호했지만 황제 바로 옆에 있는 누군가의 말쑥한 옷차림 덕분에 바로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글쎄요, 누구는......”
우베가 옆의 총리 페로를 가리켰다.
“잔소리는......”
알았다는 듯 어깨의 먼지만 무성의하게 털어낸 카렐은 제단 아래 도열한 1만여의 수비병들을 죽 돌아보았다. 지난 저녁의 전투에서 수비병 3만 중 3천여명이 전사 혹은 한동안 복귀하기 어려운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외곽의 기습전에서 쓰러진 장병들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5천에 육박했다.
“별것 아냐.”
카렐은 죽은 자들의 의미없는 숫자를 머릿속에서 떨쳐내고는 일단 눈앞의 살아있는 병사들에게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들 모두는 지난 저녁의 승전에 고무된 듯, 피로도 잊은 환한 얼굴들이었다.
특히나 오늘의 제단을 빙 둘러선 70여명의 북부보병들은 당장이라도 황제를 위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수 있을 듯, 의기양양한 표정들이었다. 동북문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성 곳곳에서 자진해 모여든 이 병사들은 각각의 소속과 계급조차도 제각각이었지만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판과 함께 동북문을 지켜낼 수 있었던 진정한 영웅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이번에 새로 지급받은 1계급 높아진 새 계급장과, 제 10공신을 뜻하는 휘장을 아직 더러운 갑주 위에 당당하게 달고 있었다.
“탈라스의 귀족 라손 비에이라 바얀 장군.”
카렐은 첫 번째 단에 덮여 있던 황실 문양의 검은 깃발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전차대에 당한 다른 기병들의 시체처럼, 그의 유해 역시 그다지 온전치는 못했다. 징발된 민간의 장의사들이 나름대로 손보기는 했지만 갈가리 찢겨나간 팔과 다리, 그리고 조각난 머리는 그대로 남아 죽음까지의 그 지독한 고통을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스러진 라손 바얀 경을 제3공신 책봉과 함께 3품의 황실 대장군으로 추증한다. 바얀 경은 황실 사람들, 그리고 먼저 간 공신들과 함께 황실 묘지에 묻힐 영광을 얻을 것이다.”
제단 밑에 모여 있던 기사단 황궁 주둔부대 장병들이 각자의 방패와 창을 치켜들며 폭발하듯 함성을 질렀다. 그들이 치켜든 방패에서 반사된 환한 아침 햇살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부단장의 작은 시체를 환하게 밝혔다.
카렐은 라손의 조각난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젠장, 좀 빨아서나 하고 있을 것이지.”
두 번째로 나선 페로는 라손의 조각난 손목에 매여 있는 더러운 손수건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이거라도 가져가라지.”
그는 품에서 새 손수건을 꺼내 그의 성한 오른쪽 손목에 정성들여 매 주었다. 그리고는 오늘 새벽 제네르에게 부탁받은 대로, 죽은 라손의 입술에 기꺼이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단단하게 굳은 그의 입술에서는 차가운 냉기만이 느껴질 뿐, 아무 느낌도 오지 않았지만 페로는 마치 그가 자신에게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라손의 시체에 입을 맞추는 페로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렐은 등 뒤의 북부 무장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잔뜩 곤두세웠다.
“어쩐지, 왜 안 나왔나 했어.”
“나올 낯짝이 있었겠어?”
“지 혼자 안 나오면 되지 뭘 죄다......”
“어떤 새끼냐.”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직전에 카렐이 무섭게 눈을 흘겼다. 황제의 눈총에 그들이 당황한 듯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살기를 띠며 으르렁거리는 황제의 모습에 순간 당황한 우베는 제단의 제일 위쪽, 평소 내명부 4비빈들이 자리잡곤 하던 자리를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평소 같았다면 이 자리에 당연히 참석했어야 할 비빈들은 슬레이프니르 단장 자격으로 참석한 베아트릭스를 빼면 단 한 명도 그곳에 없었다.
“또 지껄여대는 놈이 있으면 무조건 끌고 나가서 태형에 처해라.”
카렐이 이를 드러내며 보안국장 루토에게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사실 어느 정도의 눈치가 있는 황실 사람이라면, 저 자리들이 모두 비어있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황비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내 외부와 접촉을 피하고 처소에 있으라 했거늘.”
표정을 가다듬은 카렐이 낮은 한숨을 지으며 우베에게 물었다.
“상장군님의 병상을 밤새 지키고 계십니다. 들어가시라 말씀드렸지만 전혀......”
카렐이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들 제롬이 저질러놓은 일들을 전해들은 황비 네페티가 혼절했다는 소식도 그를 탐탁지 않아하는 세력의 입을 막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북부, 그리고 동부 출신들은 이 일로 두고두고 네페티를 몰아붙일 것이 뻔했다. 물론 카렐은 이 일과 황비를 연계시키는 발언을 하는 자는 무조건 목을 베겠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모든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오늘 행사에 비빈들이 불참한 것도 황비 네페티가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어색할뿐더러, 그렇다고 황비만 빠지는 건 모양이 더 이상하니 모두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우베의 제안 때문이었다.
“상장군은?”
“황비 전하를 도리어 달래주셨던 걸로 압니다.”
내심 제네르의 반응을 걱정했던 카렐이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론 제네르 역시 네페티를 대하기가 편치만도 않겠지만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이런 데 가져다 붙일 경솔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가디언 판. 비록 쓰러졌지만 그의 노력으로 동북문을 결국 지켜낼 수 있었으니 이런 숭고한 희생이 어디 있겠는가.”
카렐이 두 번째로 선 건 동북문 앞에서 베흔에게 죽음을 당한 판의 시체 앞이었다. 산산조각나 버린 라손에 비하면 그의 시체는 거의 멀쩡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언뜻 온전해 보였다.
“이번에도 내 일인가......”
페로에게서 작은 키를 건네받은 카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페로 가디언 시절부터 진절머리 치도록 해 왔던 일임을 나타내듯, 카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의 키를 한쪽 팔찌에 끼워 넣었다. 철컥 하는 짧은 기계음과 함께, 판의 평생을 함께 해왔을 파란빛 팔찌가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디언에게는 그 잔혹한 태생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나도 죽는 순간에나 이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판의 팔찌를 집어든 카렐은 자신의 손목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가디언의 흔적을 잠시 응시했다. 팔찌를 페로에게 넘겨준 카렐은 한때 동료였던 그의 이마에도 정성어린 입맞춤을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가문 묘지에 내 손수 묻어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다오.”
페로가 입술을 꽉 깨물며 판의 텅 빈 손목을 꼭 붙들었다. 지난해 아메스를 살리고 카인의 손에 죽은 엘러에 이어 그로서는 두 번째 특등급 가디언을 잃은 셈이었다. 그는 어깨에 걸고 있던 붉은 황소 문양 머플러를 벗어 죽은 판의 가슴에 손수 걸어 주었다.
“네 원수를.......”
페로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린 시절,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했던 판은 그에게는 다른 가디언들과는 다른 의미였다. 페로는 판의 큰 손을 붙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렐은 그를 그대로 놔둔 채 다음 순서로 움직였다.
“잊혀질 뻔했던 작은 영웅들이군.”
다음 순서에 놓여 있던 3구의 시체는 라손의 것보다 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새벽에 무너진 동북벽 터에서 돌더미만 남은 폐허를 헤치고 어렵게 찾아 끄집어내 온 것들이었다. 검은빛 북부보병 갑옷 차림의 이 말단 보병들은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무너진 성벽으로 막 진입하던 셈과 근위대의 발목을 처음으로 잡았던 바로 그들이었다.
“계급과 지위에 관계없이, 너희들 모두는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카렐이 마지막 한 마디에 힘을 주며 광장의 장병들에게 외쳤다.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의 용감한, 아니 멍청함에 가까운 저항은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셈의 전진을 늦추었고, 그들이 성벽 위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무너지는 성벽과 함께 자칫 묻힐 뻔했던 이들의 공은 사로잡힌 근위대 가디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밝혀질 수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눈높이에 맞는 영웅’이 절실히 필요했던 동맹군 지휘부는 한밤중에 폐허를 모두 뒤지는 한바탕 소동을 벌여가며 3명의 병사들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주연으로 어렵게 데려올 수 있었다.
망가져 있는 병사들의 이마에 한 번씩 입을 맞추어 준 카렐은 마지막에 있던 토막난 시체 위에 황실 문장의 깃발을 정성껏 덮어 주었다. 셈의 발목을 잡고 난도질당해 죽어간 그 병사는 자신이 ‘비세습 귀족’에 해당하는 6공신에 책봉되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제국민으로서 가장 영광스런 곳에 묻히리라는 것을 생전에는, 아니 죽는 순간까지도 단 한 번 생각해보지 않았을 터였다.
“나 때문에 죽은 자들의 얼굴을 대하는 건 고통스런 일이야.”
카렐이 늘어선 시체들에서 돌아서며 낮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들은 건 바로 옆에 있던 우베뿐이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못 들은 척 넘길 정도의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타슈카 라코타 교위와 베레트라 알부르즈 교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베가 침울해진 황제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심사가 불편해진 황제의 앞에는 이제 ‘산 영웅들’을 치하하는, 그나마 덜 불편한 일이 남아있었다. 우베의 손짓을 받은 그 두 명의 무장들이 단 위로 조심스레 걸어 올랐다.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는 타슈카 라코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베레트라 알부르즈. 나에스탄의 이 두 시민은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더군.”
카렐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선 그 둘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었다. 황제의 손길에 놀라 움찔했던 그 둘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대들 모두를 이번에 중랑장으로 삼겠다.”
‘중랑장’이라는 말에 2군단 병사들 사이에서 큰 환호성이 올랐다. 베레트라와 타슈카 모두 하임달의 결전에도 참전했던 베테랑들이었지만 변변한 배경도, 연줄도 없는 평민, 그것도 말단 사병에서부터 시작했던 속칭 ‘사다리 장교’였다. 그렇다보니 동맹군, 아니 전사단 시절 북부보병대를 조직했을 당시만 해도 특별할 것 없는 하급 장교에 불과했던 무장들이었다.
그나마도 타슈카는 고등교육까지 받은 북부 중산층 출신의 문학도였지만, 베레트라는 악명높은 광산 컴플렉스에서 노예에 가까운 광부 생활을 해 가며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북부 밑바닥 하층민 출신이었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폐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천한 몸이 부서질 때까지 충성으로 보답하겠나이다......”
타슈카가 더듬거리며 자리에 먼저 꿇어앉자 베레트라도 허둥지둥 바닥에 무릎을 가져갔다. 지난번 이암성에서의 공훈으로 교위가 되었던 그들이었기에 이번의 거듭된 승진은 자신들에게도 놀라운지 멍해진 표정들이었다.
“라코타 중랑장, 그대를 1군단 2연대장으로 삼겠다. 이번에도 일선 무장으로 병사들을 이끌어다오.”
카렐의 조치에 동맹군 수뇌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둘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으려 하는 황제의 속내가 확실한 이상, 보통의 엘리트 코스대로 저들을 중앙으로 불러올릴 것이라 예상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카렐은 그를 일선 보병대, 그것도 지난 탄현성의 전투에서 그 무시무시한 가디언 전차대를 무찌르며 용명을 날린 부대의 지휘관으로 배치한 것이었다.
자신이 북부보병대에서도 황제가 가장 믿는 부대에 배치된 것을 깨달은 타슈카가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한 영광에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베레트라 알부르즈 교위, 에키트 족보다 더 에키트 족 다운걸.”
카렐은 타슈카의 옆에 있는 베레트라에게 씽긋 미소를 지었다. 더러워진 갑주 위에 에키트 족의 털모자와 사람가죽 머리띠를 두른 그는 덩치까지 크다 보니 그 휘하의 야만족 전사들과 언뜻 구분이 되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베레트라의 행색을 살피던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무기는 다 어디로 갔나?”
카렐의 물음에 베레트라가 자신의 허리춤을 새삼스레 다시 확인했다. 명색이 대대장인 그의 허리춤에 무기라고는 달랑 손에 익은 전투망치 하나가 전부였다.
“그게.......타바진 도끼는 병사에게 빌려줬는데 녀석이 절 지키다가 죽어서 부장품으로 그냥 줬습니다. 단검은 왼손에 방패 대신으로 쓰는데 아무래도 지급받은 제식 단검이다 보니 계속 주워서 써도 세 번이나 거듭 부러져서 결국 버렸습니다.”
“하긴, 제식 무기로 가디언의 공격을 막기는 역부족이긴 하지. 그런데도 살아있는 게 행운이네. 알부르즈 중랑장.”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난한 그가 다른 귀족 출신 무장들이 쓰는 값비싼 사제 무기를 손수 마련할 돈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매번 전투에서 제일 앞장서 튀어나가곤 하는 이 다혈질 무장에게 변변한 무기 하나 없다는 것도 사실 아이러니였다.
“이 망치가 그래도 제일 튼튼하지요. 날이 나갈 일도 없고......”
“설마 그 때문에 망치를 쓰는지는 몰랐는걸.”
베레트라에게 맞장구를 쳐 주던 카렐은 마찬가지로 허전해진 자신의 허리춤을 문득 내려다보았다. 페로에게 선물받았던 카타나는 이번에 또 못 쓰게 되어버렸고, 이젠 짧은 와키자시와 단검만 남아있었다.
“단검이라......”
카렐은 손에 익은 자신의 단검을 불쑥 뽑아들었다. 파란빛으로 코팅된 이 큰 단검의 날에는 그 첫 주인인 GOE부대 사령관 셀룬이 세나우스 2세 황제에게서 하사받으며 새겼던 ‘충성의 다짐’ 문장, 그리고 두 번째 주인인 카렐의 이름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니 황제인 내가 ‘충성의 단검’을 갖고 있는 것도 좀 웃긴 일이야.”
단검을 다시 집에 꽂아넣은 카렐은 이 오랜 단검을 눈앞의 무장에게 서슴없이 내밀었다.
“이젠 어울리는 새 주인한테 시집보내는 게 좋겠어.”
“예.......에?”
깜짝 놀란 베레트라는 황제가 내민 단검을 차마 받아들지 못한 채 잠시 머뭇거렸다.
“날이 커서 세 번째 주인 이름을 새길 자리도 충분하네. 시민이 쓰긴 좀 묵직할지 모르지만 자네 정도면 상관없을걸.”
생전 처음으로 이런 명검을 만져보았을 베레트라는 아직 황제의 체온이 남아있는 단검을 품에 꼭 안아들었다.
“소인.......성심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나이다.”
카렐이 그런 그에게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그래, 좋아. 이젠 에키트 경보병단 부사령관이 되어서 이 은혜에 보답하게나.”
움찔한 베레트라는 황제의 얼굴을 잠시 올려보았다. 그간 에키트 보병단을 이끌던 네피가 이암성에서 쓰러지면서 사령관 자리가 한동안 공석으로 남아있었던 데다가 ‘부지휘관’ 자리는 지금껏 아예 있지도 않았다.
네피가 한동안 복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베레트라를 부사령관으로 삼는다는 건 사실상 그에게 에키트 보병대 전체의 지휘를 맡기는 셈이었다.
베레트라는 황제의 앞에 엎드리며 축축해진 눈을 꽉 감았다. 그간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영광이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이 혼란기를 기회로 뒤바꾼 소수에 이젠 그가 포함된 것이었다.
“폐하, 단검까지 내 주시오면 이제 어검(御劍)은.......설마 베흔이 쓰던 검을 어검으로 하시려는 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베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카렐은 등에 멘 베흔의 플람베르주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이거? 아무리 그래도 대대로 반역도들이 써 온 검을 어검으로 삼을 수야 있나. 역도들을 신나게 두들겨 잡는 데야 딱 안성맞춤이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렐은 황실 묘지가 있는 북쪽 언덕을 문득 올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다시금 우베를 돌아보았다.
“생각해보니 오르마즈 경의 칼 세트가 아직 카파키 가에 있었지? 카타나하고 크리스 단검이 한 세트인 것 같던데, 딱 좋겠군. 어검으로 삼는다면 얼씨구나 하고 내놓을 테니 당장 보내라고 해.”
“아, 그렇군요. 그럼 카파키 가에......”
“저어, 폐하. 송구하오나.”
막 결론을 얻으려는 찰나, 둘 사이에 끼어든 건 법무대신 두겐이었다.
“응?”
“오르마즈 경의 칼은 어검으로 삼기는 좀 문제가.......”
“왜, 자네도 다른 서부 사람들처럼 오르마즈 경을 싫어했던가? 제국 제1개국공신이 쓰던 칼만큼 어검으로 어울리는 게 또 어디 있다고?”
카렐의 성마른 대꾸에 두겐이 당황한 듯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 그, 그런 것이 아니옵고 그분의 칼은 개국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온데 어찌 어검으로......”
“문제? 무슨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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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를 마지막으로 [파트5. 떡갈나무처럼]이 끝을 맺게 됩니다. 중간을 적당히 나누다보니 이번 회는 어쩔 수 없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다음다음 회부터는 황도의 전투가 마무리되는
[파트6. 신(神)께서 쥐신 검은 튜울립.]
이 이어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