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38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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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짓이냐!”
솔로스 중장이 하급자인 베흔에게 호통을 쳤지만 먹힐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이 아기가 ‘리쿠’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지켜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베흔, 그리고 그를 따라 자신에게 달려드는 3명의 X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씨발! 다.......”
격분한 나머지 칼을 뽑아들고 그들을 모조리 도살하려던 베흔은 솔로스 장군 측근들의 격렬한 저항에 바로 생각을 접었다.
‘괜히 적을 만들 건 없지. 급한 것도 아닌데.’
베흔은 대번 표정을 가다듬으며 조금 전까지도 때려죽일 듯 달려들었던 솔로스 장군에게 느닷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기만 넘겨주시면 됩니다.”
베흔이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지만 오르마즈가 그의 손에 쓰러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확인한 솔로스 장군이 그의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 베흔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오르마즈의 뒷덜미를 거칠게 붙들고 재갈을 채우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오르마즈 카파키 전 장군은 돌아가신 지도자의 유지를 마음대로 어기려 해서 어쩔 수 없어 저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해를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무슨.......말씀이십니까.”
참모 한 명이 덜덜 떨며 물었다. 솔로스 장군의 참모들 역시 베흔의 말이 수상쩍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지금 같은 정세에서 감히 싸움을 벌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도 궁 뒤편 후원에서는 이번에 참살당한 강경파의 수하들 수백이 베흔 휘하 특무대 요원들의 손에 계속해 처형당하고 있었다.
“충성스런 영웅인 줄로 알았지만 이자도 권력에 미쳤기는 강경파들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같이 목을 쳐 버려야겠습니다.”
베흔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솔로스 장군이 움찔했다.
“자기가 키우고 있던 저 핏덩이가 지도자 전하의 후계자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고작 마시야스 왕제께서 버리신 서녀에 불과한 것을 말입니다. 자기가 그간 후견인으로 키우고 있던 것을 이용해서 전하의 사후 권력을 장악하려는 수작이 틀림없습니다.”
베흔은 리쿠 가 사람들 사이에서 겁에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마시야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역시 베흔의 그릇된 야심을 눈치 챈 듯, 표정이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경솔하게 누군가의 편을 들 바보는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 조사하면 밝혀질 일이야.”
베흔이 나름대로 설득하려 했지만 고집 센 솔로스 장군은 아기를 달라며 손을 내미는 그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아직 아기일 뿐이다. 이분께서 무얼 주장하셨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이 아기를 네가 데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생각지도 못했던 솔로스 장군의 저항에 베흔의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저 아기는 이번 기회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설사 아기를 받는다손 쳐도 이곳의 많은 눈앞에서, 그것도 아기의 ‘서류상 아버지’인 마시야스의 눈앞에서 저 아기를 쳐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면 아기 문제는 나중으로 미뤄두죠.”
잠시 이를 갈던 베흔은 오르마즈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를 개처럼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때, 민병대 특명 헌병감인 바스토프 베멜러 준장이 굳어진 얼굴로 베흔의 앞을 불쑥 막아섰다. 죽기 전, 이번 사건의 모든 시나리오를 짜 두었던 샤미르가 ‘강경파 잔여세력 처벌에 관한 사안을 일임한다’며 친서를 하사했던 인물이었다.
“헌병대에서 자초지종을 조사할 것이니 이분도 넘겨주십시오. 지도자께서 생전에 장군께 수여하신 ‘즉결처단권’은 회의장에서 사살하신 강경파와 그 수하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지 않는 인물들은 헌병감인 제 관할입니다.”
베멜러 준장의 반발에 당황한 베흔이 대번 언성을 높였다.
“이자는 현역 군인이 아니니 헌병대 관할이 아니야.”
계속해서 일이 꼬여가자 베흔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르마즈의 말대로, 특무대를 빼면 별다른 지지 세력이 없는 베흔의 욕심은 기대처럼 쉽사리 풀려가지는 않았다. 베멜러 준장은 오르마즈의 고향 코윈과 인접한 쿠트라스 출신이었고, 오르마즈가 사령관으로 있었던 시절에 그의 보좌관으로 재임했던 측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 오르마즈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장군님의 관할은 더더욱 아닙니다.”
베흔의 협박에도 베멜러 준장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던 베흔이 생각지도 않은 지원군을 얻은 건 바로 그때였다.
“정권교체기인만큼, 딴생각을 품는 자들은 단호하게 처단해야 돼.”
베멜러 준장은 뒤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을 붙들자 순간 당황했다. 그를 말린 건 형제들과 함께 올라온 17살의 왕제, 마시야스였다. 그는 아직 어린 청년이었지만 오르마즈만 제거된다면 자신이 ‘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그가 베흔의 과도한 야심까지 제대로 꿰뚫어볼 정도로 똑똑하지는 못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마시야스가 함께 온 형제들에게 자신을 따르라며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저 아기가 아무리 내 피가 섞인 딸이지만 세상엔 상식이라는 게 있는 거 아냐? 안 그래?”
유평이 새 지도자가 된다면 ‘뭐 하나 좋을 것이 없는’ 마시야스의 형제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를 따라 베멜러 준장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샤미르가 생전에 자신의 후계구도에 관해 가장 걱정했던 상황이 지금 채 식지도 않은 그의 시체 앞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베흔의 변심 그 하나 때문이었다.
“저 핏덩이가 지도자라니, 말도 안 되지. 설마하니 형님께서 그런 유언을 하셨겠어?”
마시야스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인 리쿠 가 사람들은 고집을 부리는 베멜러 준장의 앞을 막아서며 도리어 베흔에게 오르마즈를 빨리 끌고 가서 죽이라며 눈짓을 보냈다.
“장군 뜻대로 집행해. 이런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저런 자를 살려둘 필요는 없잖아.”
“아, 악.......”
입이 틀어막힌 오르마즈가 핏발이 선 눈으로 마시야스를 노려보았다. 재갈이 채워진 그의 입 속에서는 ‘저 멍청한 새끼’라는 욕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이럴 때는 지도자와 피를 나누신 분들께서 진정한 힘이 되어 주시는군요.”
베흔은 동기들에게 오르마즈를 잡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베멜러 준장이 오르마즈를 막 끌고 나가려는 8그룹 동기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자신에게 당장으로서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음을 실감한 베멜러 준장이 이를 빠득 갈며 베흔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후원으로 끌고 가. 강경파 떨거지 놈들하고 같이 목을 잘라버려.”
베멜러 준장의 심상치 않은 시선을 무시하며 베흔이 손짓을 보냈다.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채워진 오르마즈는 거친 X들의 손에 붙들려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흰 천에 덮인 샤미르의 시신은 수선화 꽃밭 중간에서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이렇게 되는군요......’
옥상 밖으로 끌려나가는 오르마즈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베흔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마시야스에게 다가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관례에 따라 왕제께서 상주가 되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흔의 눈웃음을 받은 마시야스의 아직 앳티어린 얼굴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상주가 된다는 건 샤미르의 후계자로 적어도 절반은 지명받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족한 ‘정당성’을 자신을 통해 얻어내려는 베흔의 더 큰 야심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쨌든 마시야스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리쿠 가에서 그나마 가장 큰 지지층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 상주라......”
마시야스는 다른 사람들을 물린 채 한쪽에 있는 샤미르의 병상에 다가갔다. 오르마즈가 덮어놓은 흰 천은 지금껏 비밀에 가려 있던 형의 얼굴을 아직 덮고 있었다.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외부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던 샤미르가 ‘도대체 얼마나 흉측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까지 오가고 있었다. 마시야스 역시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기형적인 얼굴, 혹은 표독하고 무서운 인상을 머리에 떠올리며 그 흰 천에 조심스레 얼굴을 가져갔다.
“흐읍.”
마시야스가 어깨를 움찔했다. 비록 오랜 투병으로 많이 여위기는 했지만 누가 보아도 ‘살만 붙으면 정말 미남이겠네’라는 말이 나올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그 천 밑에 미소 띤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맙소사.”
마시야스는 급히 천을 다시 덮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은 샤미르의 모습은 사람들이 상상해 온 ‘핏빛 비수’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에게 형의 ‘기형적이고 추한’ 모습을 내보이고 자신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보이려던 그는 급히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오지 마십시오.”
그는 급히 뒤돌아서며 다가오는 형제들, 숙모, 숙부들에게 손을 저었다.
“고인께서 생전에 모습을 보이기를 원치 않으셨으니 그 뜻을 죽어서도 받드는 것이 산 자들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대다수는 ‘차마 보일 수 없는 지경인가 보군.’이라며 넘겨짚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시야스의 재빠른 임기응변을 한쪽에서 지켜보며, 베흔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너무 똑똑한 놈도 쓸모없지만 너무 멍청한 놈도 짜증이 나지. 저 정도면 쓸 만할지도 몰라.’
그는 허리에 찬 큰 칼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조금 전까지도 오르마즈를 지키겠다며 날뛰던 헌병감 베멜러 준장의 모습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마즈가 끌려 나가던 그 시각, 누군가에게 급한 연락을 받은 베멜러 준장 역시 계단으로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그래, 어쩌면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는지도 몰라.”
오르마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베흔이 수염으로 꺼칠해진 턱을 어루만졌다. 오르마즈의 말대로, 그에게는 힘이 있지만 명분, 혹은 정치적인 지지 세력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옥상에서의 이 작은 충돌은 그에게 자신의 지금 처지를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일단은 오르마즈만 없애고........저놈을 앞세워 잠시 시간을 벌어 볼까나.’
베흔은 솔로스 장군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유평을 다시금 돌아보았다. 저 아기는 장기적으로는 위험천만한 씨앗이었지만 아직은 너무 어렸다. 그렇다면 오르마즈가 없는 이상 당장 큰 위협이 될 존재는 아니었다.
‘어쩌면 내 손을 굳이 더럽히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지.’
베흔은 아기 유평을 곱지 않은 눈으로 쏘아보고 있는 마시야스를 비롯한 리쿠 가 사람들을 쳐다보며 다시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 핏덩이를 죽이고 싶어 할 놈들은 어차피 넘쳐나니......”
베흔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아섰다. 어쨌든, 그는 승자였다. 최소한 지금은.
“그래, 다 잘 됐어. 내가 원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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