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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35화 (534/1,132)

< -- 535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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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십시오! 적 가디언 시로입니다!”

라손의 수급을 막 거두던 제롬은 뒤늦게 달려온 부장들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가디언들이 섞인, 1천이나 되는 아메샤 스펜타 보병대가 들이닥치면서 전차대가 크게 당황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와 근위기병들은 결국 당초 목적했던 기사단 붕괴만은 실패한 셈이었다.

“제기랄.”

제롬은 손에 들린 라손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이번 돌격에서 그가 거둔 제대로 된 소득은 이 머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엔지, 이 수급은 쳐다보기가 끔찍하게도 싫었다. 제네르와 동거하던 시절, 가끔 집에 놀러와 ‘제네르한테 잘 해 줘’라며 환한 얼굴로 술잔을 내밀던 그때의 라손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빨리요!”

“왜?”

고개를 들던 제롬은 멀리서 말을 타고 돌격해오는 웬 기병, 아니 가디언의 모습에 움찔했다.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악을 쓰며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그자는 근위대 시절 이미 눈에 익은 시로였다. 그리고 그의 양쪽으로도 가디언 사관들과 아메샤 스펜타의 전사들이 악 소리를 지르며 함께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제롬은 수급을 급히 챙겨 허둥지둥 자신의 말로 향했다.

“제롬 이 개새끼!”

시로가 한 손에 손도끼를 치켜들어 도망치는 제롬을 향해 힘껏 던졌다. 제법 거리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 도끼는 바람을 그대로 가르며 제롬의 등을 향해 매섭게 꽂혀왔다.

“최고제후님!”

근위기병 중 한 명이 몸을 날려 도끼를 막아냈지만 힘에 밀려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방패를 따라 미끄러지며 방향이 꺾인 도끼는 막 달려가던 제롬의 뒤꿈치 부근 바닥에 딱 소리를 내며 박히고 말았다.

“앗!”

발밑에 꽂히는 도끼에 놀란 제롬은 그만 발을 헛디디며 앞으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라손의 단검에 찍혀 인대와 근육이 찢겨나간 그의 손목이 문제였다.

“악!”

넘어지며 손목을 접질린 제롬이 비명을 질렀다.

“이놈!”

공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시로의 고함소리에 지레 놀란 제롬은 허둥지둥 일어나려다가 라손의 수급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다급한 그는 이미 죽은 머리를 주워드느라 자신의 산 목숨까지 내버릴 생각은 없었다. 수급을 내버린 채 급히 도망가 말에 뛰어오르던 제롬은 등 뒤의 서늘한 느낌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끄아아아악!”

등에 정통으로 도끼가 박힌 제롬이 등자에서 미끄러지며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놀란 남부 근위기병들과 전차들이 모여들며 그의 주변을 에워쌌지만 시로, 그리고 아메샤 스펜타의 악에 받친 전사들 앞에서 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최고제후님을 모셔! 퇴각! 퇴각한다!”

제롬의 부장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번 기습대의 대장인 제롬이 쓰러졌고, 두 번째 명령권자인 가디언 전차대장 또한 라손 때문에 죽음을 당했으니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하는 건 어려웠다.

“빨리! 빨리!”

등에 도끼가 박힌 제롬은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이 떨고 있는 그를 말 위로 힘껏 밀어 올렸다.

“악!”

제롬을 밀어올리던 병사 중 한 명이 뒤에서 날아온 도끼에 머리가 두 조각이 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발밑에 쓰러지는 사람에 놀란 말이 제자리에서 맴돌면서 등의 제롬은 하마터면 말에서 다시 떨어질 뻔했다.

“도망가! 일단 도망가!”

부장이 제롬의 말 엉덩이를 힘껏 후려치자 기병 한 명이 말의 고삐를 대신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차대! 전차대가 시로 저놈을 좀 막아 봐!”

몇 기의 기병들까지 거느리고 돌격해오는 시로의 모습에 기겁을 한 제롬의 부장들이 급히 말을 달려 대장을 쫓아 달아나며 악을 썼다. 지시를 받은 2,3대의 전차들이 시로의 앞을 막아섰지만 시로는 그들을 상대하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슬픔과 죄책감에 잠겨 있는 제네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롬을 따라잡아야만 했다.

“비켜! 이 새끼들아!”

시로는 마지막 남은 도끼를 전차마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보통 기병들이 던지는 것과는 위력부터 다른 그 매서운 일격은 전차마의 갑주를 일격에 박살내고 그 두개골까지 두 조각으로 쪼개놓았다.

“앗!”

말이 쓰러지면서 놀란 전차가 잠시 자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선 전차는 이번에도 기병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가디언과 전차병을 무자비하게 도살했다. 성난 기병들은 적이 이미 쓰러진 후에도 난도질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지만 시로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막아! 이놈들을 늦춰!”

뒤처진 제롬의 부장들이 시로를 막아보려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함께 온 기병들의 차지였다. 제롬의 마지막 ‘방어선’을 뚫어낸 시로는 멈춰선 전차 옆을 빙 돌아 제롬을 쫓았지만 그 사이 제롬은 어느새 조금 멀리 달아나 있었다.

“서지 못해!”

시로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공기를 울렸다. 하지만 아직 서툰 그의 기마술 때문인지, 달아나는 제롬과의 거리가 도무지 가까워지지를 않았다.

“제기랄, 포기해야 하나,”

시로가 자신의 한심한 기마술을 원망하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반대편,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제롬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남부기병 한 부대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추격을 포기하고 막 돌아서려던 시로는 무언가 쌕 하는 느낌과 함께 낯익은 얼굴 하나가 그의 옆을 스쳐 무섭게 앞서 달려가는 것을 알아챘다.

“맙소사! 자, 장군님!”

순간 경악을 한 시로가 말에 더 박차를 가했지만 그로서는 아타르에 오른 제네르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제발! 제게 맡기시고 제발 멈추십시오! 장군님!”

시로가 팔을 뻗으며 악을 썼지만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성을 잃고 질주하는 제네르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도 않았다.

말의 갈기에 기댄 채 가까스로 힘겨운 호흡을 잇고 있던 제롬은 왼쪽, 뒤에서 조금씩 가까워오는 말굽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독한 년.......”

제롬이 등을 움츠리며 이를 갈았다. 공포어린 그의 초록빛 눈동자에 비친 건 얼굴과 한쪽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말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옛 연인의 살기어린 모습이었다.

“내 너 같은 개새끼하고 한 침대를 썼던 걸 이렇게 후회해 본 건 처음이다!”

붕 소리와 함께 제롬의 뒷머리로 서늘한 검풍이 스쳤다. 깜짝 놀라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렸던 제롬은 달리는 말에 몸을 바싹 붙인 채 무기를 뽑아들고 반격을 하려 했지만 도끼가 박혀 있는 등 때문에 상체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아타르보다 둔하게 달리는 자신의 말을 탓하며 급한 대로 왼손에 단검을 뽑아 저항을 하려 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쾅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그의 팔꿈치께를 후려쳤다.

“으아악!”

제롬이 지레 놀라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그의 팔은 멀쩡했다. 그의 팔을 친 것은 틀림없이 제네르의 칼이었지만 이미 기진맥진해진 그가 휘두르는 칼은 제롬의 두꺼운 갑주를 파고들 정도의 힘이 없었다.

“이년이 미쳤나!”

제롬은 거의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제네르의 칼에 다시 팔을 얻어맞고는 반사적으로 욕을 내질렀다. 갑주에 금속이 스치는 듣기싫은 마찰음이 다시금 울리며 제네르의 칼은 힘없이 튕겨나갔지만 이번엔 그의 갑옷 한구석이 작게나마 찢겨나가 있었다.

“썅! 질기기도 하네!”

제네르가 악을 쓰며 제롬의 왼쪽을 향해 마치 장작을 패듯 칼을 마구 내리찍었다. 가뜩이나 둔해진 제롬의 짤막한 단검은 두세 번의 공격은 쳐낼 수 있었지만 제네르가 긴 장검으로 마구 휘둘러대는 칼질 모두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악!”

찌익 하고 갑옷이 찢기는 소리, 그리고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화끈한 느낌에 제롬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제네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같은 자리를 칼로 내리찍었다. 그다지 힘이 없는 공격이었지만 계속해 내리치는 칼질은 제롬의 팔꿈치 살점과 인대, 뼈를 갈가리 조금씩 찢어내고 부수어 피와 함께 공중에 날렸다. 계속 베어져나가는 자신의 팔을 빤히 보면서도, 제롬으로서는 힘없이 내젓는 왼팔 외에는 목숨을 지킬 다른 방어수단이 없었다.

“제발! 제발, 제네르, 제발.......”

지독한 고통에 제롬이 고개를 저으며 필사적으로 빌기까지 했지만 이미 눈이 뒤집어진 제네르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씨이, 그 더러운 팔 치워!”

칼을 높이 치켜든 제네르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기합소리를 내며 마지막 힘을 온통 쏟아부어 칼을 내리찍었다. 반원을 그리며 공중을 가른 제네르의 칼놀림과 동시에 도끼 찍는 소리 같은 둔탁한 울림이 공기를 울렸다.

“하, 하아아악......”

제롬이 팔을 움츠리며 온몸을 떨었다. 그의 잘려나간 팔꿈치 아래가 바닥에 구르며 아타르의 말굽 아래에 굴렀지만 제네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팔뚝 말고 대가리를 내놓으란 말이야! 씨발!”

제네르가 다시금 휘두른 칼이 제롬의 뒷목 가리개를 꽝 하며 후려쳤지만 잘라낼 정도의 위력은 없었다. 대신 노란 불꽃과 함께 앞으로 죽 미끄러지며 제롬의 귀와 뺨 가리개를 조각내서 공중에 날려버렸다.

“에잇!”

칼이 미끄러지며 잠시 중심을 잃었던 제네르는 아타르의 갈기를 움켜쥐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칼을 휘두르는 제네르도, 팔이 잘려나간 제롬도 이미 모두 탈진상태였고, 하고 있는 몰골조차 비슷했다.

“장군님! 앞으로 적병들이 옵니다!”

그새 뒤를 바싹 따라온 기사단 기병들이 제네르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말대로, 정면에서는 제롬을 지키기 위해 달려오는 수십 기의 남부기병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제네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외침이었다.

“이씨!”

놀란 아타르가 잠시 속도를 늦춘 사이, 제롬을 실은 말은 다시 속도를 붙여 몇 발짝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으로 돌진해오고 있는 남부기병들이 빤히 보였지만 제네르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도 않았다.

“씨발, 어딜 도망가냐! 이 개새끼야!”

다급하게 아타르의 배를 힘껏 걷어차던 제네르는 뒤로 중심이 쏠리며 안장에서 넘어질 뻔했다. 자칫 안장 뒤로 구를 뻔했던 제네르는 누군가의 크고 굳건한 팔에 안기며 가까스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제발, 제발 진정하세요!”

시로가 버둥대는 제네르를 와락 껴안으며 그의 폭주를 가까스로 중지시켰다. 하지만 제네르는 그의 팔에 안긴 후에도 칼을 허공에 마구 휘둘러대며 계속 고함을 질렀다.

“저 개새끼, 모가지를 다 땄단 말이야! 저 새끼 모가지를 가져오라고!”

“이미 도망갔습니다. 호위병들이 몰려들어왔으니 이젠 못 잡습니다!”

시로가 제네르의 왼팔에 감겨 있던 아타르의 고삐를 확 빼앗으며 눈이 돌아간 제네르를 달래려 애를 썼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버둥거리던 제네르는 결국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진 듯 자리에 갑자기 축 늘어졌다.

“빌어먹을.......저 새끼 머리, 저 새끼 머리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온 제네르는 아타르의 갈기를 움켜쥐며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왼팔이 잘리고 얼굴까지 피투성이가 된 제롬은 자신의 애마에 실린 채 남부기병들의 전열 속으로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적 총사령관 제롬의 팔입니다!”

뒤따라온 기병이 바닥에 뒹굴던 통나무처럼 굵직한 잘린 팔을 내밀며 힘있게 말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온 다른 기병은 푸른빛 망토에 싸여 있던 무언가를 조심스레 내놓았다.

“바얀 부단장님의 수급을 찾았습니다! 그분의 잘린 시신도 대강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만 팔은 워낙 크게 손상되어서 큰 조각만......”

보고를 계속하려던 기병은 시로의 눈짓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라손의 잘린 망토자락에 싸여 있던 그 주인의 잘린 머리, 그리고 토막난 팔을 급히 감추려 했다.

“라손.......”

제정신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제네르가 친구의 남은 흔적에 천천히 팔을 뻗었다. 쭈뼛거리던 기병은 시로에 기대 힘겹게 앉아 있던 단장에게 라손의 유해 조각을 올렸다.

“이 망할 년, 누가 이렇게 되라고 여기까지 불러왔냐.”

라손의 잘린 유해를 받아든 제네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각만 남은 라손의 왼쪽 손목에는 그가 이번 전투 직전,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었던 더러워진 페로의 손수건 조각이 여전히 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미 몸에서 잘려나간 그의 작은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은 제네르는 마지막 웃음이 어린 친구의 잘린 머리를 품에 꼭 껴안으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이제, 아니 최소한 그의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장군님?”

조금씩 비틀거리는 제네르를 시로가 급히 다시 안았다. 탈진 때문인지, 아니면 쇼크 때문인지, 기를 쓰며 울음을 참던 제네르는 결국 온몸이 축 늘어지며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의무병을 찾는 시로의 다급한 외침도, 팔이 잘린 채 도망가 버린 제롬도, 피비린내가 어린 친구의 마지막 체취 속에서 조금씩 지워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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