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29화 (528/1,132)

< -- 529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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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성과 백암성에 편하게 ‘들어앉아’ 그간 연합군의 후방 보급선만 들볶으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아쉬드 하지즈 장군에게 페로의 ‘총출동’ 명령은 귀가 확 뚫리는 희소식이었다.

그가 주둔하던 건무성은 황도에서 관산수를 건너 바로 남쪽의 지척에 위치해 있다 보니 시계(視界)가 좋은 때는 황도를 포위한 연합군의 숙영지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역시 전투 초반에는 황성에서 계속해 들어오는 불길한 소식들에 애만 태우며 발만 굴러야 했다. 그는 누구처럼 전투에 굶주린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별난 의협심 때문인지, 궁지에 처한 아군을 보며 그저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만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다 보니 혹시 모를 비상상황을 대비해 건무성 주둔군 전군에 출동대기령을 내려놓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차였다. 덕분에 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건무성에 주둔하던 낙타병 3천, 그리고 정예 장갑보병 2천과 경보병 5천을 이끌고 배를 모조리 동원해 단 40분 만에 황도 남동쪽 강변에 바로 상륙할 수 있었다.

사실 당초 그에게 출동령을 내린 건 동맹군 총사령관인 페로 자이센 총리였지만 황성의 전투 자체가 피 말리는 혈전으로 흘러간 상황에서 그는 페로에게서는 세세한 명령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페로는 모든 예비대에 ‘출동령’만을 내렸을 뿐 사실상 세부명령은 내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하지즈 장군은 이런 상황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페로는 탁월한 정치가이고 전략가, 대담한 승부사이기는 했지만 이번 제위경쟁 이전까지만 해도 큰 회전(會戰)을 치러 본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전술, 특히 기병대의 운용에 있어서는 아직 많이 어두웠다.

‘적 후방을 쳐라’라는, 조금은 뜬구름 잡는 명령만 받고 온 그가 공성중인 남부제후군 후방을 기습하는 대신 연합군 사령부로 대담하게 목표를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의도하지 않았던 ‘자율권 부여’ 덕분이었다.

칼릴과 테나토에서 남부제후군과 이미 여러 번 싸워보았던 그인 만큼, 견고한---그리고 그만큼 둔하기도 한--- 남부 보병대가 후방에서 친다고 해서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롬이 근위기병대, 그리고 남부기병과 가디언 전차대까지 모조리 모아 슈로 기사단을 치러 가는 것을 확인한 그는 지금이야말로 ‘무주공산’이 된 적 사령부에 쐐기를 박을 순간임을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즉석에서 진로를 바꿔 휘하 군대에 ‘연합군 사령부를 직격해라’라는 대담한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눈앞에 적 사령부가 보입니다!”

부장의 고함소리에 하지즈 장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즈 장군을 선두로 돌격해 온 3천의 낙타병들은 연합군 사령부를 지키는 정면의 남부보병대를 향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쇄도해 들어왔다. 그들 모두는 서부낙타병의 상징인 모래빛 중장갑을 단단히 차려입은 무시무시한 베테랑 용사들이었다.

“낙타병이다! 대오를 지켜! 움직이면 다 죽는다!”

6천의 남부보병들은 사령부를 이미 사각형으로 에워싸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남부와의 싸움에 이미 닳고 닳은 낙타병들은 견고하기로 소문난 남부의 보병진에 정면 돌진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1, 4연대 우익! 2,3연대 좌익이다!”

측면을 지킬 기병대가 없는 상대의 약점을 파악한 하지즈 장군이 팔을 저으며 기수에게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기수의 신호를 확인한 낙타병들은 드넓은 평원 위의 누런빛의 무시무시한 물살을 그리며 상대의 양 측면으로 갈라져 나아갔다.

“돌격!”

두 갈래로 갈라졌던 낙타병들은 다시 거대한 원을 그리며 대오가 상대적으로 엷은 양 측면을 향해 땅을 울리며 돌진했다.

“움직이지 마라!”

남부 사관들의 고함소리가 흙먼지와 눈가루로 뒤덮인 사방에서 울렸다. 낙타병들이 보병대의 코앞까지 근접한 순간, 하지즈 장군은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1열 정지!”

언뜻 공격포기로 들릴 그 명령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당장이라도 덮칠 듯 돌격해 온 그들은 창을 세운 채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보병들을 향해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를 그대로 실어 들고 있던 돌격창을 힘껏 던졌다.

“우악!!!”

원거리에서 날리는 경기병의 사격과는 그 무게, 위력부터 다른 이 일격은 남부보병의 큰 방패를 일격에 산산조각 내며 그 뒤의 병사, 심지어 그 두세 명 뒤의 동료까지 충격에 튕겨나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로 칼릴에서 남부와 무수하게 싸워가며 터득한 서부 낙타병 특유의 남부보병대 공격방법이었다. 낙타 등에만 두세 개의 육중한 돌격창을 한 번에 실은 낙타병들은 바로 방향을 들려 보병대 앞에서 재빨리 물러났다.

“2열 돌격!”

바로 그 뒤에서 돌격창을 들고 바싹 따라온 2열 낙타병이 앞의 공격에 잠시 무너진 대오로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파고들었다. 낙타에 채이며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보병들, 그리고 돌파에 실패하고 멈춰서거나 적병 위로 동댕이쳐지는 낙타병들의 악을 쓰는 욕지거리가 위기에 처한 연합군 사령부 전체를 일순간 공포에 몰아넣었다.

“뚫고 지나가!”

강한 서부 억양의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낙타병들 중 일부는 돌파에 실패했고, 일부는 보병들을 짓밟고 그대로 돌파해냈고, 또 일부는 흐트러진 대오 사이로 교묘하게 파고들어 방어선을 재빨리 넘었다.

“보병대를 돌파한 놈들은 뒤는 신경쓰지 말고 무조건 적 사령부부터 돌진해! 적 보병 잔여병력은 어차피 뒤따라오는 장갑보병과 경보병들이 맡을 테니!”

하지즈 장군은 전격전 명령과 함께 남부보병대 팔랑크스 사이를 그대로 질주했다. 사령부를 지키던 남부보병들은 이 한 번의 공격에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기병이 없는 그들의 약점을 이미 간파한 하지즈 장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병대 사이를 돌파하거나 그들 측면을 통과한 낙타병 수백이 유난히 둔탁한 특유의 진동으로 바닥을 울리며 연합군의 총사령부를 마치 홍수처럼 휩쓸었다.

“보급품과 숙소, 병원은 다 태워버려! 지휘 막사는 사관이 직접 들어가 확인하고 자료부터 탈취해!”

기세가 오른 낙타병부대 장교들이 사방에서 고함을 질렀다. 평소 같았다면 후방에 적병, 그것도 남부보병들을 그대로 놔둔 채 무조건 전진만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거의 같은 시각, 낙타병부대에 뒤이어 돌진해 온 서부 장갑보병과 경보병 7천여 연합병력이 그때까지 그럭저럭 건재하게 남아있던 6천여 남부보병대와 충돌하며 교전을 개시했다. 사령부를 지키던 6천의 남부보병대는 등 뒤를 휘젓는 낙타병들을 빤히 보면서도 눈앞의 서부 보병 때문에 손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보병대를 묶어놓은 하지즈 장군과 낙타병들의 앞에는 연합군 사령부 외곽의 야전병원과 이런저런 막사, 보급품 창고, 그리고 중앙의 핵심지역에 자리잡은 지휘탑들, 그리고 수십 채의 사령부 장교들의 막사와 각종 통제소들이 널려있었다.

“장군님! 공성 중이던 적 보병대가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장이 동벽 남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최대한 확대시킨 스코프 너머, 연합군의 공성부대 중 제일 남쪽에 위치했던 2개 군단 정도가 공성을 포기하고 사령부를 구하기 위해 급히 회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하지즈 장군은 참모들을 돌아보며 일렀다.

“낙타병 1개 연대는 적 사령부를 쓸고 나머지는 적 보병대 측면과 후방을 쳐라! 포로는 어차피 못 데려간다! 부상병이든 비전투요원이든 군속이든 고위급 장교가 아니면 가리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이 기습공격의 ‘한계’를 잘 아는 하지즈 장군은 바로 극단적인 명령부터 내렸다. 그는 나름대로 정의감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도덕에 얽매여 결정적인 때에 실리를 놓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즈 장군의 ‘전원 사살 명령’이 내려진 이상, 이제 연합군 사령부에 있던 장병들의 목숨은 칼날 위에 얹힌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자료부터 빼서 도망쳐! 안되면 다 태워버려! 적에게 뺏기면 안 돼”

궁지에 몰린 연합군 장교들이 곳곳에서 돌격하는 낙타병들을 피해 사방에서 뛰어다니며 목숨을 건 숨바꼭질을 벌여야 했다.

“탑 부근으로 도망쳐! 탑 부근으로 가!”

중요한 문서와 자료들을 품에 끌어안은 연합군 장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 뛰어올라 물러나려 했지만 모두가 도망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자료가 있는 막사에 횃불과 기름통을 던지려던 장교 한 명은 커다란 창끝에 목이 찢겨나가며 자리에 주저앉았고, 부상병을 업고 도망가던 의무병들은 육중한 낙타의 발에 밟히고 채이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중환자가 있던 병동에서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부상병들이 불타는 병실 안에서 살려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령부 장병들은 사령관 지휘탑 부근으로 앞다투어 도망쳤다.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그들의 지휘관은 적들이 들이닥치기 직전 참모들과 함께 도주하면서 그곳에는 그들을 지켜 줄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외곽의 야전병동, 보급품 창고를 이미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하지즈 장군의 낙타병들은 도주하는 그들의 뒤를 악착같이 쫓아오며 얼어붙은 바닥을 온통 시체와 피로 물들여 흔적을 남겼다.

어느새 지휘탑 바로 아래까지 돌진해 온 하지즈 장군이 탑 위를 올려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적 지휘부는 이미 도망갔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장군님! 여긴 아무도 없습니다!”

먼저 도착해 그곳을 덮쳤던 낙타병 한 명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한발 늦었음을 깨달은 하지즈 장군이 이를 빠드득 갈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대답하는 낙타병부대 사관 역시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왔는지 투구와 어깨에 뒤집어쓴 피와 정체모를 살점으로 부대 휘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기 있는 서류와 물품을 모조리 챙겨서 빨리 내려와라! 이게 불타서 쓰러지는 꼴도 볼만할 거다.”

탑을 뒤지고 돌아온 4명의 병사들이 한 꾸러미의 서류와 잡동사니들을 짊어지고 내려오기가 무섭게, 다른 낙타병들이 기름과 함께 횃불을 확 던졌다. 그리고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20만이 넘는 연합군의 ‘머리’역할을 했던 이 높은 탑은 아래부터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어두컴컴해진 전장에서 불타는 연합군 사령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일 높은 이 50척(15m) 높이의 탑이 불꽃을 내며 타는 광경은 공성중인 연합군, 그리고 필사의 수성전을 벌이고 있는 황도 수비군들의 눈에도 똑똑히 보일 어마어마한 장관이었다.

“무너진다! 무너져!”

지휘탑 주변을 빙빙 돌며 이 장관을 지켜보던 낙타병들이 환호성에 가까운 함성으로 피로 물든 이곳을 흔들었다. 불길 속에서 조금씩 기울어가던 탑은 어느 순간, 끼이익 하는 괴물의 울음소리 같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려하기까지 한 불꽃, 귀청을 찢는 듣기 싫은 소음을 공중에 남긴 채 천천히 가속을 붙여 쓰러져갔다.

“우와아!”

연합군 사령부를 둘러싼 서부연합군 장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며 그들 특유의 목을 울리는 긴 함성으로 밤공기를 울렸다. 쓰러져 산산조각난 지휘탑의 파편들이 불꽃과 함께 공중으로 확 솟아오르며 동맹군에게는 개전 이래 최대의 환희를, 그리고 연합군에게는 최악의 절망감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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