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23화 (522/1,132)

< -- 523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

.

.

“폐하께서 적 대장을 쓰러뜨리셨다!”

‘적 대장’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과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베레트라의 이번 함성은 돌무더기를 지키는 병사들의 사기를 꼭대기까지 끌어올리기는 충분했다. 그리고 또 다른 반가운 소리가 이들의 귓전을 흔들었다.

“슬레이프니르입니다!”

가디언의 고함소리에 카렐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재정비를 끝낸 슬레이프니르 궁기병 수백 기가 베아트릭스와 검은 깃발을 앞세우고 황성 안쪽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미에는 페로가 급한 대로 긁어모아 보내 온 다룬과 페로가디언 300여명, 그리고 황궁을 지키다가 달려온 아메샤 스펜타 보병들의 모습도 보였다. 놀란 근위대 가디언들은 다리를 잃고 쓰러진 셈과 그의 잘린 다리를 허겁지겁 추슬러 베흔이 있을 동북문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놈들 쫓아가!”

카렐은 돌더미를 달려 내려가며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지만 곧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돌더미 밑으로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던 황제를 가디언 한 명이 급히 부축했지만 그는 이미 반쯤 탈진상태였다. 카토가 데려온 힘이 넘치는 새 가디언들이 지금껏 이 돌무더기를 필사적으로 지킨 에키트 경보병들과 근위가디언들을 대신해 자리에 도열했다.

“폐하!”

웬 주머니 하나를 들고 말에서 뛰어내린 베아트릭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카렐을 와락 껴안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저놈들을 쫓아가라고.......동북문을 지키라고.......”

카렐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지 베아트릭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후에도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베아트릭스는 손에 들고 온 주머니에서 주스병을 급히 꺼내 피로 얼룩진 그의 입에 조심스레 흘려 넣어 주었다.

“한참동안 아무 것도 못 드셨군요. 가뜩이나 쉬이 지치시는 분께서.......몸도 아직 성치 못하신데.”

마른 양고기 몇 조각과 설탕 덩어리를 쥐어주는 베아트릭스에게 카렐이 비로소 가는 시선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계속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데다가 급히 동북벽으로 달려오느라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몇 시간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이 놀란 건 그걸 미리 예상하고 이렇게 모든 것을 챙겨 온 베아트릭스였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지만.......”

베아트릭스의 푸근한 가슴에 얼굴을 한 번 기댔던 카렐은 설탕 덩어리를 입에 넣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베아트릭스 역시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하들에게 돌아섰다. 힘드니 그냥 있으시라는 빤한 빈말 한 마디 건넬 줄 모르는 무뚝뚝한 그였지만 그의 속이 어떤지는 카렐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카렐은 갑자기 웅웅거리기 시작한 할룩스를 얼른 집어들었다. 그리고 얼굴에 피를 잔뜩 뒤집어쓴 페로 가디언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판 대장이 전사했습니다! 베흔에게 당했습니다! 동북문이 열리기 직전입니다!”

“판이.......판이.......제기랄, 썅.”

창백해진 카렐이 어깨를 잡아주는 근위가디언을 밀어내며 대뜸 욕을 내뱉었다. 그는 베레트라를 가리키며 갈라진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부르즈 교위! 몇 명을 쏟아 부어도 상관없으니 네 목숨을 걸고 이곳을 사수해라! 알겠나! 카토! 너도 나를 대신해 여기 남아서 알부르즈 교위를 도와라!”

“예!”

“아메샤 스펜타는 모두 나를 따른다! 궁기병대는 200기만 남고 나머지는 내 뒤를 따른다. 다룬, 너도 100명을 이끌고 나를 따라와.”

플람베르주를 등에 돌려 멘 카렐은 베아트릭스가 끌고 온 시알피의 등에 급히 뛰어오르며 그 옆에 실려 있던 ‘하메스타의 창’을 번쩍 뽑아들어 앞을 향했다.

“동북문을 사수한다! 나를 따라라!”

북쪽으로 돌진하는 카렐을 따라, 1천의 아메샤 스펜타 전사들과 페로가디언, 그리고 궁기병들이 지금까지 어렵게 버티어 온 동북문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카나르 경에 팔에 안겨 돌아온 누이동생 미노아의 시체를 본 순간, 헤즈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그는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실리적인 사람이었지만, 최소한 가족에게만은 그렇지 않은, 아니 그렇지 못한 것을 스스로도 흠으로 꼽고 있던 사람이었다.

누이의 시신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쳐다보던 그는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며 말없이 돌아섰다. 죽은 누이처럼 ‘전사다움’을 어릴 때부터 세뇌받아 온 그인 만큼 내놓고 울 수는 없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시신을 눈앞에서 외면해 본 일이 없었던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도 처음이었다.

“말씀하신 대로.......전군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떡할까요.”

헤즈가 자꾸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울먹였다. 카나르 경은 딸의 뻣뻣해진 손을 잡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떡하실.......거죠?”

헤즈가 다시 물었다. 5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는 델루지 가 보병대와 근위대가 벌이는 처절한 공성전을 멍하니 지켜보며 카나르 경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나르 경이 갑자기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런데.......저자는 누굽니까.”

헤즈가 카나르 경의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뒤에는 근위기병대 중대장으로 즉석에서 특진한 후스 콘스탄츠 중랑이 얼굴과 다리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채 서 있었다. 헤즈가 그에게 자리를 비우라 눈짓을 보냈지만 카나르 경이 자리를 지키라며 다시 손짓했다.

“히르직스 새끼는 지금 어디 있나?”

“델루지 가 숙영지 인근에 2군 숙영지를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이리 불러와라.”

“안 올 겁니다. 2군 사령관 예르마크 경이 부친 요아킴 경의 제례가 있어서 이암성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조금 전에도 잠깐 오라고 전갈을 보냈지만 그쪽 일이 바쁘다고......”

헤즈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 그놈이.......”

“그래, 바보가 아니니 여기 오면 내 손에 뒈질 거라는 건 아나보지.”

카나르 경이 이를 빠드득 길며 허리춤의 메이스를 다시 움켜쥐었다. 뭉개진 살점과 피, 머리칼이 그대로 붙어있는 아버지의 메이스를 힐끔 돌아보았던 헤즈는 격앙된 감정을 애써 누르며 동생의 시신에 힘겨운 시선을 잠시 주었다.

“사인이.......뭡니까?

“간하고 장이 파열됐고 태아 때문에.......바로 응급처치만 받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걸.......그 자리에 의사도 함께 있었다는데.......”

카나르 경이 차마 말을 맺지 못한 채 얼굴을 감싸 쥐며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죽은 누이동생의 찬 뺨을 짚은 채 말없이 서 있던 헤즈가 더듬더듬 말했다.

“전군 퇴각령을 내릴까요?”

“아니.”

카나르 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누구 좋으라고.”

아버지의 눈가에 흐르는 무서운 살기에 헤즈가 움찔 놀랐다. 카나르 경은 딸을 혼자 놔둔 채 천천히 막사 밖으로 나섰다. 헤즈 역시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동벽은 동맹군이 선전중입니다만 동북벽은 성벽 한쪽이 생각 외로 빨리 무너지면서 지금 아군에 넘어오기 직전입니다.”

“아군?”

카나르 경이 짜증스레 되묻자 당황한 헤즈가 급히 말을 수정했다.

“지금 같아서는 연합군에 유리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동맹군이 카렐.......아니 황제까지 몸소 나와 동북벽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어떡하실 겁니까?”

헤즈가 다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적장자 아들의 물음에 어느새 제후다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간 카나르 경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라면 어떡하겠느냐?”

“.......전황이 전황인 만큼.......이번 일은 가슴 아프지만 철군을 하겠다고 최고제후를 협박해서 최대한의 사과와 보상을......”

“너라면 자기만의 힘으로 다 이긴 전투에서 막판에 2제후가 빠지려 한다고 콧방귀나 끼겠느냐? 파이를 먹을 입이 줄어드니 신나면 신났지.”

오판을 깨달은 헤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에서 한 지역 제후의 위치로 돌아간 카나르 경이 밋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령부와 각군에 파견된 우리 가문 병력과 공식 파견인원들을 모두 이곳에 불러들여라. 지금 당장.”

“예?”

“우리 가문 병력을 모두 여기 모으라고! 당장! 보병대도 모두 불러! 우리 가문 전군을 여기에 주둔시킬 테니 당장 숙영지를 조성해라.”

카나르 경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가 가리킨 곳은 동벽과 동북벽의 중간쯤 위치, 플라칼 가가 원래 주둔지로 삼았던 곳이었다.

“여기 계속 주둔한다고요?”

“그리고 우리 기병대 전체를 지금 공성전 중인 근위대 후방으로 이동시켜라. 내가 직접 이끌겠다.”

헤즈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지금 2군에 소속되어 있던 플라칼 가 중장기병을 모두 불러들인다면 1만 2천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대군이었지만 2군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지금 당장은 다 합쳐도 3천 정도가 전부였다. 헤즈가 벌벌 떨며 물었다.

“공성중인 그, 근위대를 후방에서 공격하시려고요?”

“못할 것도 없지.”

아버지의 대답에 헤즈의 표정에 공포와 경악이 스쳤다. 그는 행여 누가 듣지 않나 얼른 주변을 둘러보고는 당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 아버지, 노하신 심정은 이해를 합니다만, 그건 너무 위험.......”

“많은 것을 걸수록 얻는 것도 큰 법이지.”

카나르 경이 후스에게서 건네받은 투구를 머리에 눌러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전쟁, 아니 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손쉽게 이긴다면 우리로서는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근위대와 델루지 가가 앞장섰고, 우린 한 게 아무 것도 없어. 제롬 그 개새끼가 이번에 승전을 거두고 좋아라 폭죽을 터뜨리게 놔둘 수는 없지.”

“그렇다고 고작 기병 3천으로 근위대를 공격하는 건.......”

헤즈의 설득에 카나르 경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되물었다.

“공격?”

카나르 경이 갑자기 서늘한 코웃음을 쳤다.

“패전은 저런 놈한테는 과분한 처분이야.”

“예?”

헤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 난 근위대를 공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저 잘난 근위대장하고 제롬 새끼는 이번에야말로 우리 가문의 가치를 깨닫게 될 거다. 언제 뒤에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린 채로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하면서 말이다.”

어찌 보면 ‘가장 잔혹한’ 복수를 명하면서 카나르 경이 이를 갈았다.

“앞으로도 우리의 눈치를 보며 계속 벌벌 떨게 해 주겠다. 어차피 적의 코앞에서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

아버지의 모험에 가까운 선택에 헤즈는 걱정스런 얼굴로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도 아버지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플라칼 가는 공성하는 연합군의 배후를 바라보며 서 있고, 굳이 대놓고 비수를 들어 그들을 찌르지 않아도 비수를 뽑아드는 시늉만으로도 제롬과 베흔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헤즈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합군에는 2만의 동부기병이 예비대로 있습니다. 그네들이 우리를 봉쇄할 수도 있습니다.”

“동부기병들하고 또 싸워야 하나. 그런데 각자 편만 뒤바뀌었군.”

카나르 경이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들을 돌아보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동맹군도 제네르 하크로딘 상장군이 이끄는 기병대 1만 5천하고 아메샤 스펜타 1만이 외곽에 예비대로 있다지?”

“수성전으로 계속 버티다가 결정적인 때 등 뒤에서 비수를 박을 병력은 따로 둬야 했을 테니까요.”

“그네들이 어디 있나?”

카나르 경이 눈가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샤먀시 평원에 있습니다. 1시간 정도 거리입니다. 건무성에 있는 아쉬드 하지즈 장군의 서부연합군 1만 3천도 움직이기만 하면 비슷한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푸훗.”

카나르 경이 코웃음을 쳤다. 연합군이 워낙에 서둘러 황도만 노리고 전력 질주해 온 터라 주변의 군소 성들 중 근위대가 점령한 탄현성만 제외하고 모두 동맹군의 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렇다보니 황도의 동맹군을 포위한 연합군과, 그런 연합군을 사방에 산개한 동맹군들이 완전치는 않으나마 다시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편이 정확했다.

제롬이 동부 기병대를 공성전에 전혀 투입할 수 없었던 것도 외곽의 동맹군 병력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본가를 통해서 동맹군측에 우리 계획을 ‘비공식적으로’ 알려라. 카렐 황제가 바보가 아니라면 예비병력을 모조리 여기 불러들여서 연합군 배후에 비수를 박으려고 하겠지. 아주 큰 판이 제대로 벌어지겠구나.”

카나르 경이 음험하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곧 어마어마한 대 전투가 벌어질 황궁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헤즈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이제 우리 마음대로 결정한다.”

무장을 마친 카나르 경이 한쪽에 세워두었던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다리를 다친 후스 역시 말에 힘겹게 올라 제후를 대신해 플라칼 가의 사자문양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카나르 경이 팔을 번쩍 치켜들며 참모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부터 우리는 연합군이 아니니 사령부의 명령 따위는 무시해라! 플라칼 가의 이름을 단 자들은 모두 나를 따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