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9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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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기둥! 적 발리스타!”
한참 즐거움에 빠져있던 셈은 누군가의 외침에 기겁을 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5번 공성탑 측면에 또다시 명중한 동맹군 발리스타의 엄청난 충격에 모서리 한쪽이 무너지며 그곳을 받치던 금속제 골조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골조에 깔리며 바닥에 쓰러진 근위대 사역병 2명은 미처 응급처치를 받아 볼 새도 없이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제기랄, 빨리! 빨리 가란 말이야!”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는 생각에 셈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5번 공성탑에 명중한 발리스타만 30여발이 넘었다. 성과는 달리 공성탑은 움직이는 표적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서부 사역병단의 놀라운 솜씨에 셈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탑을 둘러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이렇게 느려!”
“거의 도착합니다!”
셈은 공성탑 꼭대기에서 달려 내려온 50여명의 선봉대 가디언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황성의 내부구조에 아직 익숙지 않은 남부제후군들과는 달리, 한때 이곳에 주둔했던 근위대였던 만큼 저곳 내부를 마치 제집처럼, 아니 어찌 보면 저곳을 지키고 있는 동맹군들보다 더 확실하게 꿰고 있었다.
베흔에게 1차 진입계획을 지시받은 셈이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너희 50명은 오른쪽 창고로 들어가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서 황성 동북문을 열어라! 너희 팀은 베흔 대장이 곧 달려와서 도와줄 거다! 나머지 50명은 나를 따라 왼쪽 숙소로 진입해서 외부계단을 통해 성벽 위의 적군 후방을 치겠다! 성 안쪽에는 정규군이나 사역병들이 대부분일 테니 무조건 전진해! 뒤에서 가디언과 정규군들이 계속 보충될 테니 아무 염려할 것 없다!”
“알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격앙된 근위대 가디언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또 한 발의 발리스타가 명중하면서 5번 공성탑도 드디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발리스타가 중간의 문짝을 비스듬히 관통하면서 놀란 사역병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반대편에 걸쳐져야 할 문짝 겸 발판이 산산조각나며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갑자기 확 밀려들어온 바람과 짙은 연기에 셈, 그리고 근위대 가디언과 병사들이 급히 얼굴을 가려야 했다.
“빌어먹을!”
셈이 움찔했다. 거의 동시에 황성 성벽에 부딪히는 큰 충격이 뒤이어 탑을 울렸다. 끌까지 오긴 왔지만 막판에 발판이 떨어진 덕에 성벽의 구멍과는 거의 15척(4.5m) 가까운 거리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선봉에 선 가디언들이라면 모를까 후위에서 보충되어 올 중무장의 정규군이 뛰어넘기는 너무 먼 거리였다.
“상관없어! 일단 가디언들부터 나가! 사역병들은 정규군들 오기 전에 아무 거나 넘을 수 있게 걸쳐! 가디언들부터! 빨리! 빨리!”
다급해진 셈이 칼을 겨누며 악을 썼다. 성벽 위의 동맹군들이 이 구멍을 향해 소나기처럼 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건장한 가디언들이 머리 위를 보병용 방패로 가린 채 그 사이를 훌쩍 뛰어넘어 부서진 폐허 위로 뛰어올랐다. 황성을 빼앗긴 이후 그 내부에 발을 디딘, 최초의 연합군 병력이었다. 문 쪽에서 서성거리던 동맹군 보병 3명이 급히 대오를 이루며 그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이미 가디언들에 대한 공포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씨발! 비켜! 시간 없어!”
5척이 넘는 양손검을 뽑아든 셈은 그들이 내민 창을 단번에 조각조각 부수어버리며 복도를 향해 그대로 몸으로 돌진했다. 3명의 동맹군 보병들은 그의 거구에 받히며 비명과 함께 반대편 좁은 복도에 나동그라졌다.
“뒷놈들이 알아서 처리해!”
마음만 앞섰던 셈은 그들을 한쪽으로 차내며 무조건 복도 안쪽으로 먼저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쓰러진 동맹군 보병 중 한 명이 막 다리에 힘을 주던 셈의 무릎을 와락 껴안으며 악을 썼다.
“안돼! 안돼!”
고개를 휙 돌리던 셈은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셈이 넘어지면서 그를 따라 달리던 근위대 가디언들까지 잠시 자리에 멈춰야 했다.
“이 새끼가!”
마찬가지로 달려가려다가 멈춰선 다른 근위대 가디언들이 잔혹한 난도질이 그 병사의 몸을 갈가리 찢어내 버렸다. 셈은 3토막이 나 죽어버린 그 병사의 시체를 신경질적으로 떨쳐내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0.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빌어먹을 병사 때문에 적어도 4, 5초는 허비한 셈이었다.
“씨발! 빨리 따라와!”
셈이 뒤따르는 가디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바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황성 안쪽으로 이어진 큰 문과 계단이 보였다. 곧 들어올 베흔의 팀이 황성의 동북문을 열어버리든, 자신의 부대가 성 위로 올라가 동맹군의 후미를 찌르든, 그 둘 중 하나만 성공한다 해도 적 진영이 산산조각나는 건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저 문이다! 저길 지나가면 오른쪽에 계단이.......뭐야!”
열려있는 막 문에 쇄도하던 셈은 앞쪽 문 반대편에서 불쑥 나타난 서너 개의 검은 그림자에 순간 주춤거렸다. 조금 전 죽은 병사의 미미한 저항이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제길!”
셈이 짧은 검을 뽑아들었다. 문을 가로막은 그 우람한 체구의 전사들은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틀림없는 페로 가디언이었다.
“여기다! 근위대다!”
그들 역시 셈의 존재를 알아챈 듯, 검과 도끼를 뽑아들며 이 좁은 복도와 문을 몸으로 막아섰다. 이번 전투를 손쉽게 끝낼 줄로 알았던 셈의 기대는 일단 첫 번째 난관에 봉착해야만 했다.
셈이 예상외로 쉽게 성 안에 진입하는 것을 확인한 베흔은 넘치는 기쁨에 입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방금 성벽을 무너뜨린 발리스타 팀 전원을 1계급 특진시키겠다!”
베흔의 파격적인 선언에 근위대 진영에서 큰 함성이 솟았다. 부서진 성벽의 구멍을 통해 가디언들이 속속 뛰어들면서, 성벽 위의 동맹군들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셈! 넌 절반을 이끌고 지체하지 말고 빨리 성벽 위로 올라가! 나머지 절반은 동북문 쪽으로 보내라! 내가 곧 뒤따라가서 그놈들을 지휘해서 안쪽으로 가서 성문을 열 테니!”
“알겠습니다!”
셈의 조금의 당황한 대답이 뒤늦게 돌아왔지만, 베흔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기에서 성패가 결정난다! 나 역시 들어갈 테니 가디언들은 모두 날 따라와!”
베흔 역시 50명의 가디언을 거느린 채 칼을 쥐고 5번 공성탑에 뛰어들었다. 문제의 ‘구멍’이 있는 곳까지 신나게 뛰어올라온 그는 하마터면 발판도 없는 모퉁이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 했다. 조금 전, 발리스타에 부서진 발판자리에는 아직도 별다른 대용품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아앗!”
가까스로 벽을 잡고 몸을 일으킨 베흔은 옆에서 어물대는 사역병들에게 버럭 신경질을 냈다.
“뭐야! 발판이 없으니 보충 병력이 제대로 투입되지 못하고 있잖아!”
베흔이 공성탑 계단에 개미떼같이 서 있는 정규군들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셈과 함께 1진 선봉대로 들어와 있던 1백여의 가디언들은 어찌저찌 뛰어서 건너편으로 갔지만 뒤이어 투입되어야 할 근위대 정규군 보병들이 고작 15척의 간격을 넘지 못해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역병들이 한쪽에서 방금 무너진 철골을 연결해 발판을 놓으려 하고 있었지만 길이가 짧아 애를 먹고 있었다.
“도끼로 벽을 뜯어내서라도 연결하란 말이다!”
“하지만 벽을 뜯으면 양쪽에서 적의 사격이.......지금 로프를 가져오라 했으니 곧.......”
사역병 장교의 변명에 베흔이 그의 멱살을 쥐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막 승기를 잡았는데 고작 수십 놈 더 죽는 게 문제냐! 로프 따위로 어느 세월에 병력을 다 투입해!”
“아, 알겠습니다.”
파랗게 질린 장교의 눈짓에 사역병들이 공성탑의 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흔은 그들을 놔둔 채, 50여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그 사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동북문으로 간다!”
먼저 지나간 50여명의 가디언들이 복도에 흩어놓은 수십 구의 동맹군 시체가 동북문으로 달려가는 베흔의 앞길에 널려있었다. 대부분이 성 안쪽에서 일하던 사역병들, 혹은 군속과 노예들이었지만 군데군데 제대로 무장을 갖춘 보병들의 시체도 보였다. 미처 싸워 볼 새도 없이 도살당했는지, 시체에 남은 상처는 하나같이 1,2개의 치명상이 전부였다. 성 안쪽 복도를 가로질러 거의 반대편, 안쪽으로 뚫린 문까지 달려온 베흔은 그제야 비로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장의 지원군이다!”
어려움에 처해있었던 듯, 그들이 베흔을 돌아보며 반가움의 고함을 질렀다. 성 안쪽으로 뚫린 문 바로 앞에서, 십여 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황도 안쪽으로 향하는 철제 외부 계단을 몸으로 막은 채 동북문으로 진출하려는 근위대 가디언들을 막으며 필사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흔에게는 그들을 도와주며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그놈들을 물리치거든 너흰 이 일대에 모조리 불을 지르고 내 뒤를 따라와라!”
베흔은 뒤따르는 50여 가디언들에게 자신을 따르라며 손짓을 보냈다. 그와 가디언들은 한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계단을 무시하고 난간을 넘어 옆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정규군 보병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3층 가까운 높이를 마치 고양이처럼 그대로 날아서 뛰어내린 베흔의 앞에는 동맹군의 후방 보급품 적치장인 듯 이런저런 물자가 잔뜩 쌓인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맙소사! 적군이다!”
성 안쪽에 들어온 베흔과 근위대 가디언들에 놀란 동맹군 사역병들과 노예들이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막 돌진하려던 베흔은 사방에서 창을 들고 달려오는 거의 150여명의 보병들에 놀라 움찔거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동맹군 북부보병대나 아메샤 스펜타는 아니었고, 동맹군 병참선 호위를 맡고 있는 타르서스 직할군의 경보병들이었다.
“이런, 제기랄! 뭐 이리 많아!”
베흔이 양손검을 번쩍 뽑아들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금 그에게는 50여 가디언들이 있었고, 저 정도 보병들을 처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저들에게 붙들려 시간을 까먹는다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디언’들의 모습에 당황했기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군이야! 적들이 성 안에 이미 들어왔나 봐!”
적들이 자신들을 저지하기 위해 당장 달려들 줄로 알았던 베흔은 그 보병들이 난데없이 저희들끼리 혼란에 휩싸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동맹군에 가담한 군대들 중 가장 ‘부실한’ 것으로 알려진 타르서스 직할군은 이 상황에서 뜻밖에도 베흔의 편이 되어 주었다.
‘적군이 성 안에 들어왔다’는 말에 지레 겁먹은 타르서스 직할군 제대장은 자신의 보병들을 놔둔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혼자 뒷걸음치고 있었다.
“이런, 씨이.......”
그때, 성벽 조금 남쪽으로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셈과 가디언들이 성벽 위와 직결되는 외부 계단 바로 앞에서 몇 안 되는 페로 가디언들과 격전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공포처럼, 성 안으로 적군이 몰려들어온 것이 확인된 셈이었다. 언뜻 숫자만으로 보아도, 셈이 저곳을 뚫고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다.
“이미 끝났으니 뒈지기 싫으면 당장 꺼져!”
베흔이 양손검을 번쩍 치며들며 적치장 전체가 쩌렁쩌렁 울려라 고함을 질러 적을 협박했다.
“제길!”
겁먹은 제대장이 제일 먼저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에 다른 병사들까지 앞다투어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몇 사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를 붙들려 했지만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해버린 병사를 붙들기는 역부족이었다.
“휴, 십년감수했네.”
베흔은 도망치는 적병들에게서 일단 관심을 끊었다. 지금 저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그는 전력을 그대로 보유한 50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북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멀리, 대로와 150척(45m) 가까운 폭의 거대한 금속제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황실 묘지, 그리고 황궁과 직결된 황성의 핵심 시설, 동북문이었다.
“저기다!”
다른 황성의 성문들처럼, 이 문 역시 성벽 바깥문이 돌파당할 때를 대비해 2중의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깥의 큰 문 안쪽으로는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진 작은 광장이 보였고, 그 안쪽으로 두 번째 성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지난번 근위대가 완전히 불태워 파괴해버린 것이 복구가 조금 덜 된 모습이었다. 문은 한쪽만 세워져 있었고, 나머지 한쪽은 급한 대로 가설 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원활한 병력이동을 위해 안쪽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보니 안에서 적이 접근하는, 지금같은 상황에는 있으나마나한 장애물이었다.
“여기도 적군들이 제법 있습니다.”
성문을 지나 ‘광장’에 진입하자마자 가디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성 안에 주둔하던 동맹군 북부보병대가 사방에서 이 ‘동북문 광장’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대오를 갖추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조금 전, 그들의 2배에 달하던 타르서스 직할군들처럼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깨에 어깨를 단단히 맞댄 채 성문의 잠금 크레인 구동장치 앞을 굳게 가로막고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밀리면 다 죽는다!”
소대장 가디언의 고함에 보병대가 악 하는 찢어지는 함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정면에서 돌격해오는 근위대 가디언 50명 앞에서 그들의 저항 따위는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베흔은 할룩스를 열고 성 밖에서 공성전을 펼치고 있을 근위대 정규군 부대에 알렸다.
“동북문 앞에 모든 공격을 집중해라! 적군의 저항은 미미하다! 지금 도착했으니 안에서 곧 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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