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8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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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우리를 내려보고 계신다!”
베레트라가 개전 이래 지금껏 단 한 번도 씻지 않은 피비린내어린 전투망치를 번쩍 치켜들었다. 피에 굶주린 에키트 족들은 물론이고, 지금껏 불안감에 떨고 있던 2군단 보병들의 눈빛은 높은 누각에 우뚝 서서 아래를---어쩌면 자신을---보고 있는 황제를 스친 순간 모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직접 있는 이곳이 절대 무너질 리가 없다는 자신감, 그리고 황제에게 부대, 혹은 자신의 용맹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남은 평생을 영광으로 수놓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묘한 기대감이 지금껏 병사들을 흔들던 공포 대신 솟구치고 있었다.
실제로, 황제가 직접 지켜보았던 지난 욱리하의 전투에서 적의 머리를 10개가 넘게 베고 황제의 눈에 든 에키트 족 말단 전사 4명은 이미 황제에게서 순록 50마리, 그리고 ‘30호의 추장’ 지위를 받기도 했고, 남부 교위를 사로잡은 한 추장은 황제가 직접 공을 새겨 하사한 도끼, 그리고 200여 마리의 순록을 상으로 받기도 했다.
“이곳에서 우리가 폐하를 지킨다!”
베레트라의 포효에 뒤이어, 이미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 구석구석에 서 있던 병사들이 다가오는 근위대를 위협하듯 우렁찬 고함소리로 공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저놈들 사기가 생각보다 좋아 보이는데요.”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래 봤자지.”
베흔이 입을 씰룩거렸다.
“가디언들로 선봉을 세워. 보병들이 1차 교두보를 확보하면 네가 직접 들어가서 지휘해라. 나도 곧 따라서 들어가지.”
“대장이 그럴 것까지 있습니까. 그냥 저한테 맡겨주시죠.”
베흔이 직접 공성전에 서겠다는 말에 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지만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남부제후군 후방, 플라칼 가 보병대가 여전히 인형처럼 버티고만 서 있는 곳을 이를 갈며 돌아보았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상황만 허락한다면 말이야.”
사실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 근위대를 공성에 투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공성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니, 최소한 언젠가는 승전이 확실함을 증명해 보이지 않는다면 자칫 플라칼 가가 위험천만한 시한폭탄이 될 수 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근위대랍시고 몸을 사릴 상황이 아니었다. 밉든 곱든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제롬을 위해서, 그는 이번엔 어떻게든 나서야만 했다.
“발리스타 방열이 모두 끝났습니다.”
사역병단 장교의 보고와 동시에, 거의 5발의 ‘아나콘다’와 불덩이를 뿜는 위력적인 발리스타 30여발이 지축을 울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황성의 성벽 위를 때렸다. 어마어마한 불꽃이 공중으로 솟구치며 사방으로 파편---그것이 물건이건, 사람의 살점이건---이 날리는 모습은 공격하는 측에서 보기에는 속이 다 후련해지는 광경이었다. 물론, 거의 비슷한 순간, 성벽 위에서 날아온 동맹군의 T자 발리스타에 근위대 보병들 수십이 뭉개지는 끔찍한 장면을 무시할 수만 있다면.
“남부제후군의 첫 번째 공성탑이 성벽에 거의 닿았습니다!”
베흔이 문득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델루지 가의 공성탑들 중 사방에 널린 함정, 장애물과 부비트랩, 발리스타의 세례를 모두 뚫고 황성의 성벽에 도착한 건 고작 3대에 한 대 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별 것 아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동맹군 총사령관 페로가 한 손에 크래모어를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그의 시선은 자신이 지키는 황성의 동벽보다 황제가 가 있는 동북벽을 더 자주 향하곤 했지만 이젠 이곳에만 집중해야 할 순간이었다. 남부연합군의 공성탑이 바싹 접근하면서, 당장이라도 성을 다 때려부술 듯 쏟아지던 연합군 발리스타의 세례도 마치 마술처럼 딱 끊어졌다. 하지만 코앞에 다가온 공성탑을 부수어야 하는 동맹군 발리스타는 이제 더 바빠져야 할 순간이었다.
페로가 양팔을 앞쪽으로 향하며 우렁차게 고함을 울렸다.
“가디언부대! 1선으로!”
페로의 명령에 지금껏 참호 안에서 기회만 기다리던 다룬의 페로 가디언부대 1천이 지금껏 1선을 버티어주던 아메샤 스펜타를 대신해 제일 앞으로 나섰다. 적들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공성탑의 제일 선봉에는 근위대에서 파견해 준 가디언들이 중간중간 자리를 잡고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아니, 당연한 예상이었다.
“반복한다! 내 가디언 부대는 공성탑 앞을 지킨다! 아메샤 스펜타 가디언들은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저지하고 보병들은 2선에서 창으로 가디언들을 돕도록!”
페로가 성벽에 거의 접근한 20개가 넘는 공성탑을 가리키며 일렬로 도열한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이 열리며 쏟아져 나올 근위대 정예 가디언들을 기다리며, 긴장한 페로 가디언들, 그리고 아메샤 스펜타들의 긴장된 숨결이 이 황성의 동벽 위를 휘감았다.
“온다!”
다룬의 외침, 그리고 공성탑이 성벽과 부딪히는 둔중한 충격음이 병사들의 귓전을 뒤흔들었다. 성벽을 때려 부수듯 열리는 문과 함께, 1선의 페로 가디언들이 일제히 악 소리를 지으며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와아아!”
공성탑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백의 사람들 모습에 페로 가디언들이 움찔했다. 그들이 놀란 건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뭐야!”
당황한 다룬이 페로가 있을 뒤를 휙 돌아보았다. 공성탑에서 선봉으로 몰려나온 건 그들이 이를 갈며, 아니 반쯤 걱정에 빠진 채 기다리던 근위대 가디언들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은빛 중갑주를 입고 짧은 검을 든, 남부제후군 보병들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충격을 받은 페로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가디언들은 탑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병들을 무자비하게 도살하는, 보기에도 시원스런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런 작은 승리에 속아 넘어갈 페로가 아니었다.
“우리로서는 다행 아닙니까. 적은 보병뿐이고, 우리는 가디언들이니 쉽게.......”
함께 있던 사역병단 장교가 별 생각없이 중얼거렸지만 그에게 쏟아진 건 페로의 무시무시한 호통이었다.
“저게 제대로 싸우는 거냐! 가디언이 보병들에게 말려든 거지!”
말뜻을 그제야 알아들은 장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보병들을 가디언들만으로 상대한다면 적들을 신나게 잡아 죽일 수야 있겠지만 보병만으로도 남부제후군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동맹군 입장에서는 ‘효율’이라는 면에서 어마어마한 손해였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급히 정리한 페로의 시선은 거의 본능적으로 동북벽, 카렐이 근위대와 맞설 동북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맙소사.......”
페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근위대와 연합군은 자신이 있는 동벽 돌파는 사실상 포기하고 가장 취약한 동북벽에 모든 힘을 쏟아 부으려는 것이 확실했다. 이런 가능성을 상정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제롬처럼 욕심이 많은 자가 자신의 보병들을 무더기로 저승에 몰아넣을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 지휘부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성벽 아래로 접근하고 있는 보병들 중 가디언들은 한 명도 섞여있지 않았다.
머릿속이 아찔해진 페로가 목이 찢어져라 악을 썼다.
“다룬! 여기는 아메샤 스펜타에게 모두 맡기고 가디언부대를 모두 빼서 동북벽을 지원해라! 빨리!”
“알겠습니다!”
다룬의 힘찬 대답이 바로 들려왔지만 이미 20개가 넘는 공성탑이 계속해 성벽 위에 남부보병들을 쏟아내고 있다보니 그들에게 교두보를 내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물러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로의 표현대로, 압도적인 숫자의 보병들과의 싸움에 ‘말려든’ 가디언들은 제대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 귀한 시간만을 계속 까먹고 있었다.
“카렐! 조심해! 그쪽으로 근위대 가디언들이 모조리 다.......”
다급해진 페로는 황제에게 경칭을 붙이는 것도 잊은 채 무조건 할룩스를 켜고 소리부터 질렀다. 하지만 근위대의 첫 번째 공성탑은 이미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성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페로는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페로가 다급한 연락을 보내기 이전, 눈이 좋은 카렐은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있었다. 동벽을 공격하는 남부제후군에 가디언이 전혀 없음을 확인한 순간, 카렐은 자신이 동벽에서 데려온 판의 가디언부대 1천을 손짓해 불렀다.
“판! 공성탑 선봉으로 근위대 가디언들만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희 부대가 1선을 맡아라! 당장!”
이미 오랫동안 카렐과 손발을 맞춰왔던 판은 황제의 말투만으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를 바로 깨달았다. 동맹군 보병대에도 초급 사관을 맡은 가디언들이 물론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은 옛 전사단 출신들이다보니 근위대 소속 가디언들에 비하면 상당수가 그 수준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밀리지 않고 상대할 만한 건 결국은 페로가디언뿐이었다.
“빨리! 1선으로! 분대별로 공성탑 앞에 헤쳐모여!”
갑작스런 명령을 받은 페로가디언들은 1선에 서 있던 동맹군 북부보병대를 급히 밀어내고 공성탑이 들이닥칠 곳 앞에 황급히 자리를 잡았다. 카렐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는 서 있던 누각에서 급히 뛰어내려 각 부대를 손짓했다.
“북부보병대! 너희는 공성탑 앞에서 2선을 형성하고 가디언들을 도와라! 에키트 보병대! 가디언들이 싸울 동안 근위대 보병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올 테니 너희가 그놈들을 맡아!”
카렐이 목청을 높이며 바삐 지시를 내렸다. 페로 가디언들이 재빨리 자리를 잡으면서, 상황은 한결 나아지는 듯 싶었다. 하지만 동북벽의 수비군에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또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북쪽 벽 모서리가 무너졌습니다!”
타슈카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 그리고 무언가 부서져 내리는 굉음에 카렐이 고개를 휙 돌렸다. 거의 50발 가까운 ‘아나콘다’에 집중적으로 난타당한 가설 성벽 한쪽, 3층과 4층 부분이 결국 우루루 무너져 뻥 뚫린 큰 구멍을 적에게 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5번 공성탑, 근위대의 것 중 가장 큰 그 공성탑이 바로 그 위치의 무너진 성벽에 계속 접근해왔다.
“저 큰 공성탑이.......”
타슈카가 입을 쩍 벌렸다. 외벽이 무너진 성벽 안쪽에는 병사들의 숙소로 쓰이던 3층의 방과 창고가 이미 무너진 폐허를 뒤집어쓴 채 성벽 안쪽으로의 길을 그대로 열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5번 공성탑’에는 마치 치밀하게 계산이라도 한 듯, 성벽 위가 아닌, 성벽 중간으로도 내릴 수 있는 발판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씨발! 이렇게 빨리 무너지면 어쩌라는 거야!”
카렐은 만류하는 카토를 거칠게 밀어내며 악을 쓰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의 보수공사가 부실했든, 아니면 근위대의 아나콘다가 생각보다 위력적이었든 간에, 성벽 위가 아닌 성벽 중간이 붕괴되었다는 건 적에게 나의 심장을 찌르라며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렐이 아직 둔한 걸음을 바삐 옮기며 할룩스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판! 성벽이 뚫렸다! 적들이 저곳으로 진입해서 동북쪽 성문을 열려 할 테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켜내라! 알았나! 조금 전 퇴각한 궁기병대도 재정비가 끝나는 대로 동북문으로 오라고 해!”
5번 공성탑의 중간쯤에 서 있던 근위대 가디언 셈은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황도의 성벽을 본 순간, 지금 자신의 역할이 이번 공성전의 승부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두터운 황성 성벽의 내부는 수많은 병영과 복도들로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미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저곳으로 근위대가 진입한다면 그 많은 복도들을 통해 황도의 성벽 전체를 뒤흔들 수 있을 터였다.
그는 공성탑 꼭대기에 배치했던 50여명의 최정예 가디언들을 불러내며 소리를 질렀다.
“1소대! 빨리 내려와서 내 뒤를 따라 저기로 나간다!”
셈은 마치 천상의 입구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황성의 무너진 구멍을 가리켰다. 구멍의 폭이 거의 60척(18m)은 되다보니, 적들로서도 막기에 쉽지는 않을 터였다. 동맹군 병사들 서너 명이 3층의 무너진 방 안에서 놀란 듯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앞장서 나아갈 가디언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할 존재들이었다.
적의 보충 병력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의 입가에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저곳만 돌파해서 성 안쪽으로 가디언들이 진입한다면 절반의 승전은 따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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