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7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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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벽으로 멀어져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페로가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베흔 그 개새끼, 기껏 여기 가디언들 죄다 모아놨더니 여기로나 오지 왜 저기는 가고 지랄이야........이, 썅! 너희 빨리 근위대 포격하랬더니 왜 아직까지 꾸물거리고 있냐! 우라질, 팔모가지를 비틀어 버릴까보다!”
페로의 감정섞인 고함소리에 당황한 서부 사역병들이 허둥지둥 발리스타의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는 막 불꽃이 일기 시작한 발리스타의 레버를 확 당겼다. 성벽을 떨리게 할 정도의 엄청난 진동과 함께 웬만한 건물의 기둥만한 거대한 발리스타가 마치 괴수의 울음소리 같은 찢어지는 마찰음을 내며 흐린 하늘로 솟았다. 인화물질이 포함된 머리가 터지며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그 거대한 괴물은 북소리에 맞춰 진군하고 있는 델루지 가 보병들의 대오를 비스듬히 스쳐 북동쪽, 근위대 병사들의 머리 위로 날았다.
“발리스타!”
근위대 1군단 가디언 사관들의 찢어지는 고함소리에 근위대 병사들이 일제히 신개대형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9대대 쪽이다!”
경직되고 둔중한 남부제후군 보병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베테랑 병사들로만 구성된 근위대들은 발리스타에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귀청을 찢는 울음소리를 내며 작열한 발리스타 역시 쓸모없지는 않았다. 막판에 지면에 평행하게 확 꺾인 발리스타 머리의 큰 날은 궤도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한 운, 혹은 능력이 부족했던 근위대 병사들 십여 명의 몸통과 허리, 다리를 갈가리 찢어놓고 뒤이어 사방으로 파편과 불똥을 폭발하듯 날렸다.
“이런 개떡같은! 저 십새끼들 우리 있던 곳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바닥에 엎드렸던 근위대 병사들이 토막나 흩어지는 동료의 시체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의 말대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성벽 위에 있던 건 동맹군이 아닌, 바로 근위대 1군단이었다.
“계속 전진! 전진! 후미에 위생병이 있으니 너희는 계속 진군하란 말이다!”
사관과 장교들의 외침은 옆쪽 남부제후군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외침, 그리고 계속해 날아드는 발리스타의 폭음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병사들은 마치 본능처럼 계속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빨리 접근해! 빨리 접근하는 것이 살 길이다!”
선봉대 가디언 장교들이 사방을 오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최소한 이들의 앞에는 제대로 장비를 갖춘 사역병들, 그리고 노예들이 부족하나마 여러 개의 방어시설물들을 해체하면서 길을 뚫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비록 늦게 도착했지만 그들은 앞서 공성을 시작한 둔한 남부제후군을 조금씩 따라잡고 있었다.
“지난번에 저놈들이 황궁을 차지할 때 공격했던 곳이지?”
전차에 오른 베흔이 꺼칠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황성의 동북벽을 가리켰다. 그의 곁에는 지난번 이곳의 수성전을 직접 수행했던 셈이 역시 전차를 몰고 서 있었다.
“물론 놈들이 나중을 생각해서 공격을 소극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일 많이 파괴되었던 곳이지.”
“한 달은 그걸 복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아니죠. 게다가 여기는 황성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고.”
간만에 돌아온 전장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셈은 주변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키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처럼, 황성의 동북쪽은 동맹군의 입장에서는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지난 공성전에서 페로가 나름대로 주의를 했었지만 당시 퇴각하던 근위대가 수성장비와 성문, 성벽 일부를 파괴하고 물러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일부가 붕괴되었던 성벽은 급한 대로 복구는 되어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일부가 가설 성벽이다 보니 다른 곳에 비해 강도가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그런 지점들은 육중한 수성장비의 하중을 감당할 수가 없다보니 병사들이 사격으로, 아니면 몸으로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5번 공성탑에 성패가 걸렸다.”
베흔이 중간쯤에 위치한 가장 거대한 공성탑을 가리키며 눈을 부릅떴다. 바로 5번 공성탑이 공격할 곳이 성벽이 무너졌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리고 베흔이 배치한 것도 근위대가 가져온 공성탑 중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황성 높이에 맞춰 제작된 이 괴물은 한 번에 2백 가까운 병사를 성벽 위에 쏟아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건이었다.
“‘아나콘다’ 조립 끝났나?”
“2분 정도면 방열까지 끝납니다.”
“끝나는 즉시 40대 정도 동원해서 저 한곳만 집중적으로 때려. 알겠나?”
베흔은 몸이 근질거리는지 연신 칼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허리춤에 찬 새 칼은 아무리 손때를 묻혀 봐도 어딘지 어색했다. 베흔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우라질 년, 잡으면 지 이모처럼 그 칼로 온몸을 후벼서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려야겠어.”
그때, 막 방열이 끝난 첫 번째 발리스타에서 울린 탁 하는 짧은 충격음에 베흔과 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제국의 군 조직 중 오직 근위대에서만 보유하고 있는 이 위력적인 발리스타 ‘아나콘다’는 다른 것들처럼 불꽃, 혹은 귀를 찢는 소음을 내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예리한 관통력과 무시무시한 정확도를 자랑하는 소리없는 살인마였다. 무광 처리된 그 괴물은 별다른 소음도, 무시무시한 불꽃도 내지 않은 채 요란스런 불꽃과 연기로 온통 칠해진 하늘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나콘다다!”
성벽 위에서 그 소리 없는 괴물을 제일 먼저 감지한 건 동맹군 보병 2군단 소속의 가디언이었다.
“어디야!”
당황한 동맹군 북부 보병들이 사방을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괴물을 그 짧은 순간에 잡아낼 수 있는 병사는 많지 않았다. 예민한 가디언들, 그리고 반사신경이 빠른 병사들은 늦으나마 몸을 날려 한쪽의 참호로 피했지만 아직 많은 병사들이 성벽 위에 몸을 그대로 내놓고 있었다.
“저기......”
초병의 외침은 짧은 비명과 함께 끊기고 말았다. 소리도 없이 날아온 ‘아나콘다’는 미처 완공이 되지 않은 성벽을 대신 메워놓은 인조석 구조체와 금속제 보강물을 비웃듯 박살을 내며 관통해서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구조체가 붕괴되면서 그 위에 세워졌던 임시 관측탑,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초병 3명이 찢어지는 비명을 남기며 까마득한 성벽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씨발, 뭐가 그리 궁금해?”
이암성에 이어 이번에는 황도의 수성 임무를 맡은 타슈카 라코타 교위는 겁에 질린 얼굴로 성벽 밑을 내려다보려는 부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또 온다!”
그때, 또 한 발의 ‘아나콘다’가 날아와 빈 참호 하나를 산산조각내는 광경에 병사들이 벌벌 떨었다. 그나마 눈으로 보고 ‘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발리스타와는 달리, 저 괴물은 바로 코앞에 꽂히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자리를 지켜! 물러나는 놈들은 무조건 벤다!”
타슈카가 칼을 꽉 쥐며 한쪽 어금니를 드러냈다. 그때, 유난히 큰 덩치에 정규군이 맞나 싶은 지저분한 갑주 차림의 전사 3명이 이 긴장된 전장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잔뜩 일그러져 있던 타슈카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허어, 너 정말 잘 어울린다. 며칠이라고 그쪽 사람 다 됐구나.”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있던 타슈카는 오랜만에 만난 이 든든한 동지의 모습에 그나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2명의 에키트 족 경호병을 동반한 베레트라 알부르즈 교위는 머리에 두른 에키트 족의 사람가죽 머리띠를 삐딱하게 돌려쓰며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만 끝나면 탈라스 남자랑 결혼해서 거기 별장이라도 사야겠어. 아아, 만지지 마, 벗겨져.”
베레트라의 뺨에 요란스레 그려진 원색의 그림들을 만져보던 타슈카는 그의 넉살에 짧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지금 남편하고 자식들은 어쩌고?”
“출세하거든 하나쯤 더 두지 뭐.”
“이 지옥에 또 오다니, 우리 팔자도 정말 뒤옹박인가 보다.”
“황도라고 좋아라 했더니 이번에도 아주 빌어먹을 곳이어서?”
베레트라는 반쯤 무너진 성벽을 돌아보며 키득거렸다. 타슈카는 어느새 정말로 ‘에키트 족처럼’ 전투를 무슨 장난 바라보듯 하는 이 옛 동료를 쳐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였다. 그때, 또다시 찢어지는 굉음과 동시에 가설벽 한쪽이 그대로 주저앉으며 병사 몇 명을 삼켜버렸다.
타슈카는 평소의 그 진지한 성격답게 다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병사들이 이암성에서보다 도리어 더 불안해 해.”
“너희 부대가 몇인데?”
“6대대 1266명, 투창병 857명. 지금은 좀 줄었겠지만.”
“우리 부대가 1301명이니까 합치면 뭐 넉넉하네.”
베레트라가 마른 꿩고기를 질겅거리고 씹으며 대답했지만 타슈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상대가 지난번처럼 남부제후군이라면 모르지만 이번엔 근위대야. 1대1로 붙으면 도리어 우리가 불리할지도 몰라.”
“걱정 마, 우리 부대는 안 불리하니까. 뭐, 가디언만 아니라면 말이야.”
베레트라가 다시 넉살을 떨었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위치를 배정받은 데 대한 불만, 그리고 하필 근위대를 맞서야 하는 2군단 보병들의 공포는 이미 극에 달해 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하임달에서도 붙어 봤던 근위대들인데 별것 아니더구만 뭐.”
“대대장님! 저 공성탑을 보십시오! 우리만으로는 버티기......”
제대장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와 반대편 근위대 진영을 가리켰다. 성벽이 무너졌던 곳을 향해 다가오는 근위대의 5번 공성탑은 도대체 발리스타를 몇 발을 쏟아 부어야 부서질까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제기랄.”
타슈카가 이를 갈았다.
“지원병력을 더 요청하는 편이.......”
“이 성벽 위에 병사들을 더 풀어놓는다고 사정이 나아지는 건 아냐. 밀도만 높아져서 포격에 더 취약해지기만 한다.”
그는 지난 이암성에서처럼 칼을 번쩍 치켜들고 성벽 위에 뛰어올라 겁먹은 병사들에게 함성을 질렀다.
“폐하께서 우리 부대를 믿으시니 이곳에 보내셨다! 그러니 모두........”
병사들에게 나름대로 힘을 주려 고함을 외치던 그는 자신의 말이 별 필요없는 것임을 바로 깨달았다. 남쪽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가디언들 중앙에는 지금껏 그가 영상으로만 보아왔던 낯익은 얼굴이 검은 튜닉자락을 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별 생각 없이 꿇어앉으려 했던 그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호위가디언들은 놀라 돌아서는 병사들에게 ‘움직이거나 경례를 붙이지 말라.’며 경고를 주고 있었다.
타슈카와 베레트라는 입고 있던 옷을 허둥지둥 정리하고는 이곳까지 나와 준 황제를 맞았다.
“라코타 교위와 알부르즈 교위인가?”
“폐하, 어찌 이곳까지.......”
타슈카가 난생 처음 마주한 황제에게 당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베레트라 역시 생각보다 훨씬 장신의 황제를 힐끔 올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웬만한 사람들과, 심지어 가디언들에 비교해서도 최소한 덩치에서는 밀리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만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고작 교위에 불과한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에 내심 놀란 타슈카가 베레트라에게 짧은 눈짓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근위대 ‘아나콘다’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상께서 옥체를 두시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타슈카가 황제의 옷자락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발리스타가 계속해 내리꽂히는 전장을 가로질러 달려온 탓인지, 군데군데 해진 흔적이 있는 황제의 가죽 튜닉에는 더러운 검댕이와 회색빛 먼지, 심지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그가 함께 온 다른 가디언과 구분되는 건 긴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이마에 맨 용 문양 비단 머리밴드가 전부였다.
카렐은 눈에 낀 노란빛 스코프를 고쳐쓰며 전장을 잠시 주시했다.
“근위대장 베흔이 아마 이곳으로 올 거다.”
타슈카의 표정이 순간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는 무장으로서 거의 습관처럼 입에 밴 말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본심이든 아니든 간에.
“이곳은 저희가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 폐하께선 안전한 황성 안에서.......”
“내 명색이 ‘등급 없는 가디언’ 아니었던가?......응?”
문득 고개를 든 카렐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서는 눈 깜짝할 순간이 지난 후, 시커먼 무언가가 획 모습을 나타내며 성벽의 가설물, 그리고 누각 한 채를 무섭게 후려쳤다.
“당하는 입장이 되니 정말 빌어먹을 무기로군. 뭐, 한때는 나도 저걸 운용해 보았지만.”
깜짝 놀라 자리에 움츠렸던 타슈카와 베레트라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며 얼른 다시 일어섰다.
“이곳은 지금부터 짐이 직접 지휘한다. 라코타 교위, 알부르즈 교위.”
타슈카와 베레트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카렐은 그런 그들의 옆을 태연하게 스쳐 동북성벽 중앙의 반쯤 부서진 누각에 보란 듯 자리를 잡고 우뚝 섰다. 바로 조금 전, ‘아나콘다’가 떨어져 병사 한 명의 목숨과 함께 무너졌던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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