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13화 (512/1,132)

< -- 513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

.

.

카나르 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200여기의 가디언 근위기병, 다라프시 카비아니를 쥔 경호대장 카토 앞에는 검은빛 벨벳 망토를 어깨에 걸친 장신의 전사가 마찬가지로 검은빛 말에 올라 다가오고 있었다.

“기세 한 번.......”

카나르 경은 포위당한 황도의 황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허영에 가까운 화려함에 어처구니가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그를 둘러싼 경호 가디언들과 깃발까지도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인 그의 기세는 훨씬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의 그것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검은 망토를 가득 수놓은 번쩍이는 순금 자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파이어가 박힌 이마의 화려한 백금 서클렛만으로도 황제는 그 많은 거구의 가디언들 사이에서도 그 누구보다 눈에 확 들어왔다.

“기다려라.”

카렐은 뒤따라온 호위 가디언들을 물린 채 앞으로 몇 발짝 나섰다. 카렐과 코앞에서 마주한 카나르 경은 조금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지금껏 체격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온 그였지만 이번만은 마치 건장한 어른을 올려보는 설익은 청년처럼 상대를 우러러보아야만 했다. 물론, 굳이 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마주서서 이렇게까지 위압적인 공기를 느껴보기는 그도 처음이었다.

“카나르 델루지 플라칼 경.”

카렐이 그 차가운 표정에 잠시 미소를 지었다. 카나르 경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야 했다. 마땅한 인사말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다른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조금 전 보내신 문서는 사령부에서.......”

“상관없다. 어차피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니까.”

카렐이 어깨를 들썩이며 비웃듯 키득거렸다. 순간 카나르 경은 카렐의 용의주도함, 그리고 그의 묘하게 살기어린 미소에 온몸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어떻게 웃음만으로도 상대를 겁에 질리게 만들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대에게 줄 게 있네.”

카렐은 뒤에 선 카토에게 손짓을 보냈다. 지시를 받은 카토가 들고 온 건 작은 상자, 아니 언뜻 관 같은 느낌을 주는 보존캡슐이었다.

“릴라크 경이 그대에게 전해주라더군.”

“으읍!”

별 생각 없이 캡슐을 받아든 카나르 경은 하마터면 말 아래로 집어던질 뻔했다. 투명한 유리 안쪽으로 보이는 건 한때 그가 그리 예뻐했던 친손녀의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찢긴 상처가 남아있었지만 이미 손을 본 듯 아기의 모습은 그럭저럭 깨끗했지만 아기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가.......아가........”

손녀의 죽음을 확인한 카나르 경의 두툼한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왜 이리 되었는지는 며느리와 직접 이야기를 해 보게나. 상태가 상태다보니 여기 직접 나올 수는 없었네.”

카렐은 한 손에 할룩스를 집어들고는 작동 버튼을 눌렀다. 거의 동시에, 병상에 누워있는 릴라크의 모습이 한쪽에 지직거리며 나타났다. 릴라크는 시아버지 카나르 경의 모습에 잠시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카나르 경 역시 중환자가 되어 누워있는 그의 모습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죄송합니다.......아이를 지키지 못해서.......”

시아버지를 마주한 릴라크의 첫마디는 사죄였다. 하지만 죽은 손녀의 캡슐을 껴안은 채 말없이 눈물만 삼키고 있던 카나르 경은 그런 그를 이해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번 일은.......”

릴라크가 더듬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렐은 그 둘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베아트릭스가 있는 곳으로 일단 물러났다.

“분위기가 묘해지는걸.”

뒤로 물러난 카렐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2선의 델루지 가 보병대가 플라칼 가 보병대 후미와 충돌하면서 이미 곳곳에서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를 지켜라’는 명령을 받은 플라칼 가 보병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내분이 벌어진 연합군 진영은 최소한 아직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생각대로 될까요.”

베아트릭스의 걱정어린 물음에 카렐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기대대로 되면 좋은 거고, 안되더라도 최소한 균열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빈.”

“손녀와 며느리를 아무리 사랑하셨다 해도 저 정도의 분노로 가문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을 내리실 감정적인 분은 아니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쌓일 만큼 쌓여있는 상태지요. 당장 터지지는 않아도 언젠가 결과가 나올 테지요.”

카렐은 여전히 시선을 적진을 향해 고정시킨 채 밋밋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그런 싸늘한 시선을 말없이 쳐다보던 베아트릭스가 뜬금없이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플라칼 가 출신인 저도 폐하의 곁에 있군요. 그것도 좋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카렐이 비로소 베아트릭스를 돌아보았다. 베아트릭스가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조금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폐하께서 새로이 태어나신 것 같아 기쁩니다.”

“모두 다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그대만이라도 기뻐해준다면 짐 역시 행복하군요.”

이곳에 전장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머리에서 떨쳐낸 베아트릭스가 황제의 큰 손을 살며시 잡았다.

“지금같이 강해지신 모습이 더 보기 좋습니다.”

그때, 카렐은 적진 후방에서 들려온 유난히 높은 음조의 나팔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북동쪽, 샤마시 평원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금빛 깃발이 마치 물결처럼 지평선을 뒤덮고 연합군의 후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껏 태연하던 카렐의 표정에도 순간 긴장감이 스쳤다.

“근위대가 도착했군.”

플라칼 가의 느닷없는 불복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당혹해하고 있던 제롬은 카나르 경이 릴라크와 만나고 있다는 말에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증거’를 발견한 미노아의 입을 막는다 해도, 당사자인 릴라크가 살아있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판단력마저 잃은 채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에게 근위대의 도착 소식은 그나마 하늘의 축복이었다. 하지만 1만 5천의 근위대 1군단을 이끌고 막 도착한 베흔 역시 전장의 이해 못 할 상황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후방에 세워진 제롬의 지휘탑에 헐레벌떡 뛰어오른 베흔은 창백해진 제롬에게 따지듯 물었다. 공성전을 펼쳐야 할 플라칼 가 보병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후미의 델루지 가 10만 보병대가 그들을 힘으로 마구 밀어붙이면서 곳곳에서 몸싸움과 욕지거리, 난투극까지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게.......”

제롬은 베흔에게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했다. 베흔은 그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 버럭 화부터 냈다.

“이번에 또 플라칼 가를 앞에 세우시면 어쩝니까! 아무리 방계라지만 적당히 달래가면서 쓰셔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그것 때문이 아냐!”

제롬이 눈가를 찡그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다 릴라크 저년 때문이야.”

“예? 릴라크 경은 직접 죽이셨다면서요!”

“몰라 안 뒈지고 살아있었나 봐. 빌어먹을.”

제롬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고개를 휙 돌린 베흔은 급히 망원경에 눈을 가져갔다. 그리고 전장 중간에 선 카나르 경과 릴라크가 무언가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젠장!”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던 베흔이었지만 이번만은 그도 무심결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플라칼 가에 2선으로 물러나도록 명령을 내리십시오! 안 그러면 전군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델루지 가 보병대를 선두로 삼아서라도 일단 무조건 공성전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번 공성전에서 눈에 띄는 성과만 얻는다면 플라칼 가도 마음대로 딴 맘을 품지 못할 겁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평소 베흔의 조언에 짜증부터 내던 제롬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도 이것저것 꼬치꼬치 따져들 수가 없었다. 베흔의 말이 무엇 때문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일단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척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탑 밑에 있는 부장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플라칼 가 보병대는 무시하고 우리 가문하고 세닉 가 보병대만으로 무조건 공성전 개시한다! 당장!”

베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재촉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 델루지 가 제후군만으로 공성을 해서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아이러니하지만, 지금 전방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플라칼 가가 제일 큰 방해물이었다. 게다가 델루지 가 제후군 병사들은 예비대로 준비를 하고 있던 지라 당장 전투에 투입하기는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마치 습관처럼 허리춤의 칼을 만지작거리려던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허리춤을 항상 지키고 있던 ‘헤크마의 검’ 플람베르주는 지금 카렐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는 전혀 낯선 감촉의 다른 검이 채워져 있었다. 괜한 억울함에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며 황성의 성벽을 남쪽부터 북쪽 지평선까지 죽 돌아보았다.

“근위대도 지금 동북쪽을 공격하겠습니다.”

제롬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생각 외로 협조적인 이 근위대장을 돌아보았다. 공성전을 유달리 싫어하는 근위대였지만 일단 나서주기만 한다면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보증수표였다.

“제가 직접 공성에 앞장서지요.”

“정말?”

“대신.......제게 생각이 있으니 이번 공성전의 병력 배치와 지휘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됩니다.”

제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번 공성전의 병력 배치는 총사령관인 그가 이미 정한 것이었지만 플라칼 가의 저항으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도 어찌해야 할지 내심 막막하던 상황이었다.

제롬은 짐짓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번 딱 한 번이니까 제대로 하도록 해. 잘못되어서 괜히 책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베흔은 칼을 단단히 쥐며 지휘탑에서 얼른 달려 내려갔다.

“제롬 그놈이.......”

릴라크의 설명을 다 들은 카나르 경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단단히 악문 채 문득 후방을 돌아보았다.

“제롬을 믿지 마십시오. 이런 자를 굳이 믿고 따르셔야 하겠습니까. 동맹군에 가담하시라는 말이 아닙니다. 최소한 연합군에 남아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릴라크가 눈물어린 표정으로 시아버지에게 호소했지만 카나르 경은 대답이 없었다. 베아트릭스의 예상대로, 이런 일만으로 가문, 그리고 수많은 영지민들의 생존을 결정할 지도 모를 중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기의 시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어 강 건너 흥안령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미노아!”

그의 머릿속이 순간 아찔해졌다. 사위 히르직스가 함께 있기는 했지만 믿을 수 없는 인물임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멀리 후방에서 긴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휙 돌린 그는 여전히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플라칼 가 보병대를 헤치고 델루지 가 보병대가 천천히 1선으로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다 못한 델루지 가가 직접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안돼!”

카나르 경은 새파래진 얼굴로 허둥지둥 말에 뛰어올랐다. 그는 자신을 뒤따르는 근위기병들에게 뒤따르라며 손짓을 보냈다.

“모두 나를 따라와! 가문 기병대 5백만 불러와!”

말에 박차를 가한 그는 미노아의 할룩스 코드부터 급히 눌렀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당황한 그는 보병대에 남아있는 헤즈에게 급히 연락을 내렸다.

“네게 지휘를 맡기겠다! 전군 그 자리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마라! 알겠나! 공성에 털끝하나 가담하는 놈들은 모조리 쳐 죽여도 좋다! 그리고 강을 건너갈 배를 준비시켜 둬! 건너편에 우리 병력이 남아있으면 모조리 모아서 아까 그 폭포로 보내! 알았나!”

“전진!”

카나르 경의 다급함과는 전혀 관계없이, 플라칼 가 보병대 사이를 빠져나온 10만여 델루지 가 보병대가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큰 함성을 울리며 공성전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델루지 가 사역병단에 소속된 공성탑과 발리스타 역시 성에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시작은 이상했지만, 어쨌든 황도에 대한 첫 번째 공성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지평선을 까맣게 덮은 그들의 기세에 땅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부탁하오. 황빈. 적당히 놀려주고 들어오시구려.”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가볍게 짚어주고는 뒤로 돌아섰다. 황제가 200여 가디언 근위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황성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베아트릭스는 조금 전 집어넣었던 자리드를 다시 뽑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어깨 위로 번쩍 치켜들며 조금은 탁한 함성으로 공기를 울렸다.

“바로 저놈들이 적 수괴인 델루지 가 놈들이다! 아직 우리 실력을 보지 못했을 테니 맛을 보여주자!”

베아트릭스를 선두로 전위대인 3천여 궁기병대가 황성 동문 앞을 검은빛 깃발로 물들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황성 위의 서부 사역병단이 날리는 거대한 발리스타의 불꽃이 늦은 오후의 침침해져가는 하늘을 마치 횃불처럼 환하게 밝혔다.

“발사!”

궁기병대가 날리는 3천발의 투창, 그리고 수백 개의 발리스타 불꽃이 공중에 드리운 그늘 밑으로, 창백해진 카나르 플라칼 경, 그리고 마치 강물이 합쳐지듯 그에게 합류하는 5백여 플라칼 가 기병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북쪽으로 말을 달려 전장을 빠져나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