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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512화 (511/1,132)

< -- 512 회: 파트 5. 떡갈나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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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미노아와의 연락을 끊은 카나르 경은 굳은 얼굴로 황성을 돌아보았다. 그의 앞에는 적어도 50척 높이는 될 어마어마한 황도의 동쪽 성벽, 그리고 그 위를 빼곡하게 채운 동맹군 보병대가 지평선을 까맣게 덮은 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연합군이 이곳까지 힘겹게 온 이유였고, 사실상 최종목표였다.

“휴우.”

그는 옆에 선 아들 헤즈를 돌아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욱리하와 관산수가 만나는 뾰족한 모퉁이에 자리잡은 황도 아케메니안 시는 그 위치만으로도 가히 천혜의 요새지였다. 남쪽과 서쪽은 거대한 강이 자연해자 역할을 해 주었고, 북쪽 역시 그 대부분이 이암성도 울고 갈 험준한 바위절벽이다 보니 대병력이 공성전을 전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렇다보니 사실상 공성이 가능한 곳은 샤먀시 평원과 마주한 동쪽, 그리고 동북쪽 성벽이 유일했다.

물론 성을 건설한 세나우스 2세 역시 그런 특징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황성에서 가장 높은 50척(15m)의 성벽과 어마어마하게 밀집된 각종 방어시설이 자리잡은 곳이 바로 눈앞의 동쪽 성벽이었다.

“제기랄. 내 꼴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지.”

카나르 경은 자신이 입고 있는 갑주를 돌아보며 욕을 내뱉었다. 그는 이번 공성전에서 가문 병력을 빼 줄 것을 제롬에게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건 ‘그러면 칼릴에 주둔중인 델루지 가 병력을 모두 철수시킬 수밖에 없다.’는 통지, 아니 협박이었다.

남-서부 경계인 칼릴은 근 100년 동안 10번이 넘는 무력충돌이 있어 온 요충지였다. 플라칼 가가 델루지 가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그 지역을 ‘뚝 떼어 받은’ 것도 결국 델루지 가가 직접 맡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을 피를 처발라서라도 막을 책임을 떠안은 것이었다. 델루지 가의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지금껏 플라칼 가 무장들---베아트릭스의 아버지를 포함해---의 피를 가장 많이 빨아먹은 곳도 바로 칼릴이었다.

그런 칼릴에는 실질적인 전투를 책임지는 플라칼 가의 야전부대, 그리고 델루지 가 파견병력 1만 5천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다. 특히나 델루지 가의 파견병력에는 서부의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부대, 그리고 첨단군인 서부제후군과 그나마 대적할 수 있는 제1사역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철수한다면 야전군 위주로만 구성된 플라칼 가의 칼릴 주둔부대는 꼼짝없이 눈먼 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나르 경이 눈물을 머금고 이번 첫 공성전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던 것도 이런 처지 때문이었다.

이번 공성전의 선봉대는 여지없이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와 세닉 가의 투창병단이었다. 그리고 델루지 가 보병대 10만이 후미에서 예비대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호지 가 보병대는 산악지형인 성벽 북쪽에서 포위만 맡았고, 동부기병대 2만은 후미와 양익에서 혹시 모를 동맹군 기병대의 기습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사들이 이미 30스타디아(4.5km)에 달하는 지평선을 가득 채웠고, 100대가 넘는 공성탑이 그 중간중간 마치 거리를 표시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황성의 높은 성벽을 노려보았다.

“근위대는 어디에 있다지?”

“동북쪽 50스타디아(7.5km) 정도에서 남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최고제후가 워낙 급박하게 공성전을 결정해서 아직 미처 도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번 전쟁 들어 처음으로 누군가의 ‘부장’ 지위가 된 헤즈가 아버지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에 익은 얼굴이군.”

건너편, 동맹군 진영을 돌아본 카나르 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반대쪽에는 예상대로 3천의 동맹군 슬레이프니르 3연대 전문 궁기병들이 손에손에 투창을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툴 가 궁기병들로만 구성된 그 부대의 선두에는 한때 플라칼 가의 장군이었던 검은 피부의 여자 전사가 말없이 서 있었다.

“빨리 전진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헤즈가 답답한 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거의 30분에 걸친 에너지장벽 해체작업도 이제 끝났고, 그들에게는 전진만이 남아있었지만 카나르 경은 괜한 심통에 공격명령을 계속 지체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장벽 돌파 도중 적 기병들에게 죽은 플라칼 가 보병들의 시체 수백 구가 바닥에 이미 흩어져 황도 주변을 첫 번째 피로 물들여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왜 사격을 안 하죠?”

헤즈의 물음에 카나르 경도 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정거리가 긴 저 전문 궁기병들이라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지금쯤이면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의 전방을 오가며 머리 위에 사격을 쏟아붓고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지휘관인 베아트릭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저년이 우리 가문 출신이라 머뭇거리고 있는 건 아닐 테고.”

헤즈가 평소처럼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씹으며 나름대로 농담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성벽 위의 동맹군 발리스타도 별 움직임이 없었고, 황성의 동문 역시 보란 듯 활짝 열려있었다. 지금껏 카렐에게 숱하게 당해 온 플라칼 가 무장들은 ‘저놈들이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러나’를 연발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래, 이젠 할 수 없지.”

후방에서 자꾸 보내는 ‘공격개시’ 신호에 카나르 경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발리스타 발.......응?”

포격 명령을 내리려 막 팔을 치켜들던 카나르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서고 있는 슬레이프니르 뒤쪽에서 말에 오른 남부기병 세 명이 손에 흰 깃발을 든 채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저게.......누구냐? 우리 기병대 아냐?”

아버지의 물음에 스코프로 전방을 확대해 본 헤즈가 냉큼 대답했다.

“아군 포로입니다. 지난 마랄루 전투에서 사로잡혔던 우리 중장기병대 중랑장 같습니다. 나머지 둘도.......교위급의 고급장교 같습니다.”

“뭐냐? 포로를 풀어주는 거야? 하필 지금?”

혼란에 빠진 카나르 경이 눈가를 찡그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장을 말을 타고 건너 온 그 3명의 무장들은 1선에서 대기중이던 세닉 가 투창병단, 플라칼 가 보병대 팔랑크스 사이를 가로질러 헤즈와 함께 서 있던 카나르 경에게로 바로 달려왔다. 비록 무장 해제된 상태였지만 하나같이 깔끔한 외모에 모두 혈색도 좋아 보였다. ‘동맹군은 가난하다보니 포로들을 마구 굶겨죽이고 있다’는 선전방송에 익숙해 있던 플라칼 가 장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복귀신고 드립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 3명의 무장들이 즉시 관등성명을 밝히며 카나르 경 앞에 꿇어앉았다. 그들은 품에 지니고 온 두툼한 두루마리 문서를 카나르 경에게 불쑥 내밀었다. 가죽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데다가 비단끈으로 곱게 묶인 그 문서에는 황제의 칙서를 뜻하는 금빛 용 문양 봉인까지 새겨져 있었다. 움찔한 카나르 경은 옆에 있는 아들 헤즈를 문득 돌아보았다. 카렐은 중랑장급 고위무장을 자진해 풀어주는 호의와 함께 그들을 사자로 이 문서를 보낸 것이었다.

“도대체.......”

그가 받기를 망설이는 건 받아야할지 말아야 할지 때문이 아니었다. 적이든 아니든, 일단 ‘최고지휘관의 친서’임을 인정한다면 그가 직접 말에서 내려 받아야 할 것이고,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시켜 받아야 할 문제였다.

“그래, 저쪽에서 베풀었으니 나도 그만큼은 해야겠지.”

한숨을 내쉬며 말에서 내리려던 카나르 경은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그 사자의 손에서 문서를 홱 낚아채자 순간 발끈했다.

“뭐냐!”

문서를 빼앗은 건 지휘부와 함께 있던 델루지 가 연락관이었다. 그는 문서를 품에 감추며 카나르 경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합군 규정에 적군에서 보내 온 일체의 문서는 사령부 감찰단의 1차 검열을 거친 후 해당 부대에 공개되는 것으로 되어 있사옵니다.”

카나르 경이 이를 갈았지만 그 연락관의 말은 일단 사실이었다. 따져보면 이렇게 보란 듯 대놓고 문서를 보낸 카렐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카나르 경은 백전노장인 데다가 꼼꼼하기로도 소문난 카렐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왜 했을까 하는 의아함도 함께 느꼈다. 하지만 그 연락관은 한술 더 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적군이 포로를 느닷없이 석방한 것도 그 저의가 미심쩍으니 이 포로들 역시 감찰단에서 1차 심문을 거친 뒤 보내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문서를 빼앗긴 것까지는 참고 넘어갔던 플라칼 가 장교단이었지만 한때 전우였던 포로까지 넘겨달라는 말에 그 눈빛들이 갑자기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눈치챈 헤즈가 연락관과 귀환 장교 사이를 재빨리 막아섰다. 다른 것은 몰라도 포로를 지키는 것만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것도 한참 피를 흘리며 전투 중인 병사들이 코앞에서는.

“이들은 연합군 결성 전에 마랄루에서 포로가 된 우리 장교들이니 감찰단에서 심문할 권리가 없어. 우리 헌병대에서 맡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 돌아왔으니 심문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연락관은 조금 전 빼앗은 문서를 손에 꼭 쥔 채 냉큼 대답했다. 이들의 귀환을 놓고 예상치도 못했던 갈등이 연합군 사이에 벌이지고 있었다. 연락관은 함께 온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포로들을 끌어내라며 눈짓을 보냈다.

“뭐야! 우린 스파이가 아니란 말이다! 종장님!”

무사히 귀환하고도 가디언들 손에 붙들린 그 무장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분위기는 더더욱 험악해졌다. 가디언 손에 끌려가던 중랑장이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카나르 경에게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릴라크 경께서 지금 황궁에 계십니다! 종장님과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뭐, 뭐?”

‘릴라크’라는 말에 카나르 경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장교들을 끌고가던 가디언들을 당장이라도 짓밟겠다는 듯 말을 몰아 그들의 앞을 막았다.

“동맹군에서 릴라크를 잡아갔다고?”

“아닙니다! 그분께선 억울하게 쫓겨서 어쩔 수 없이.......”

당황한 가디언들이 세 포로들의 입을 화급히 틀어막고는 카나르 경을 밀치며 급히 멀어져갔다. 순간 욱 하며 울분이 치솟은 카나르 경은 근위기병들에게 자신을 따르라며 손짓을 보내고는 가디언들을 다시 가로막았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수십의 기병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인 가디언과 연락관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본가 쪽에 긴급 연락을 취했다.

“별 것 아니야. 그냥 저들에게 한 마디 듣고 싶어서일 뿐이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카나르 경이 연락관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연락관은 본가에서 들어온 대답에 급히 할룩스를 작동시켰다. 그곳에서 들려온 건 뜻밖에 최고제후 제롬의 격앙된 목소리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포로들 입을 틀어막고 끌고 와라. 카나르 그놈이 적과 연락하지 못하게 하란 말이야!”

뒤이어 울린 건 카나르 경의 할룩스였다. 카나르 경은 제롬의 잔뜩 성난 얼굴에 잠시 당황해야 했다. 제롬은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목소리부터 높였다.

“공격준비가 끝난 게 언젠데 당장 적을 공격하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당장 전군을 움직여서 공성전을 시작하지 않으면 군법대로 처리할 겁니다!!!”

카나르 경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결정에 어쩌면 가문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고 있는 황성, 그리고 2선에서 위협하듯 서 있는 델루지 가의 10만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긴 나팔소리와 함께 2선의 델루지 가 보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죠?”

당황한 헤즈 경이 아버지 카나르 경을 급히 돌아보았다. 2선 예비대로 있던 10만의 델루지 가 보병대가 1선의 플라칼 가 보병대 후방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빨리 공성전을 개시하라는 제롬의 분명한 협박이었다.

카나르 경은 황성을 다시 돌아보았다. 동맹군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주하고 있는 베아트릭스와 3천의 궁기병들은 한 팔에 자리드를 든 채 이미 발사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가뜩이나 내키지 않았던 공성전을 앞두고 카나르 경의 판단력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마라.”

카나르 경이 입술을 깨물며 낮게 지시했다.

“우리 플라칼 가가 남부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고 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다.”

카나르 경은 공성탑, 그리고 발리스타를 막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던 사역병단 쪽에도 중지하라며 손짓을 보냈다.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대를 맡고 있도록 해라.”

아버지의 지시에 헤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르 플라칼 경은 근위병들을 모두 물린 채 홀로 황성 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베아트릭스 역시 손에 들고 있던 자리드를 다시 퀴버에 꽂아넣고는 그를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오랜만입니다. 종장님. 조지프의 딸 베아트릭스입니다.”

긴장이 감도는 살벌한 전장 한중간에서 어색하게 마주한 베아트릭스와 카나르 경은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카나르 경은 플라칼 가의 사자문양 망토 대신 걸친 그의 황실 문양 검은 망토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구슬을 물고 있는 그 화려한 금빛 문양은 황제와 결혼해 황실 사람이 되었다는 상징이었다. 잠시 얼굴을 붉혔던 베아트릭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친정에 칼을 겨누고 싶지는 않습니다.”

“친정이라.......내 자네의 혼인을 승인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종장의 곱지 않은 말투에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카나르 경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망토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뭐 기왕 저질렀으니 이젠 별 수도 없지만.”

베아트릭스가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폐하께서 릴라크 경과 함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성 쪽에서 울려온 우렁찬 북소리에 카나르 경이 고개를 들었다. 황성의 동쪽 주문 안쪽에서 검은빛과 금빛의 화려한 깃발이 마치 물결처럼 너울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가장 높게 서 있는 건 언젠가 모습을 드러낸 일 있던 황제기 ‘다라프시 카비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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