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9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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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미르가 위독하니 빨리 와 달라는 베흔의 연락을 접하고 고심 끝에 아케메니아 시를 다시 찾은 오르마즈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팔에는 나이에 비해 유난히 몸집이 작은 웬 아기가 꼭 안겨 있었다.
“이맘때쯤 됐으면 걸음마도 좀 해야지 이게 뭐냐.”
오르마즈는 행여 떨어질까 목을 꼭 끌어안은 아기, 유평의 등을 토닥여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살 하고도 반이 되었으니 이젠 아장거리고 걸음마를 하고도 남을 때였지만 이 아기는 유난히 성장이 좀 늦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 것인지, 걸음마는 고사하고 무어라도 붙들고서야 두 발로 힘겹게 일어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리쿠 가 내력인가보다.”
자신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에 오르마즈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이 아기가 늦은 건 걸음마 뿐만이 아니어서, 말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맘때쯤 되면 꽤나 시끄럽게 흉내를 내고 옹알이를 할만도 했지만 아기는 엄마 유레트가 아무리 코앞에서 따라 해 보라며 이런저런 발음을 하고 장난감을 흔들어대도 그 까만 눈만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구경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른 아기라면 이미 하고도 남았을 ‘엄마아빠’소리만 서투르게 가끔 웅얼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오르마즈를 ‘아빠’라고 불러 사람들을 종종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네 아버지하고 할아버지도 유난히 늦었다더니. 피는 못 속이는 거냐.”
오르마즈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인지, 아기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그 작은 손으로 더듬으며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또 시작이냐. 난 아빠가 아니라니까.”
오르마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아이는 혼자 기분이 한참 좋아져 있었다. 유레트가 곁에 있지도 않은 ‘아빠’ 라는 말을 ‘엄마’보다 먼저 가르쳐서인지, 아니면 오르마즈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유평의 이런 엉뚱하기까지 한 실수, 아니 버릇은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널 데려온 게 잘 한 짓인지 모르겠다.......”
아케메니안 궁을 향해 걷던 오르마즈가 아기를 다시금 토닥여주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지도자가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인지 거리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 그리고 구석구석에는 민병대 전사들, 심지어 특무대의 X들까지 눈을 부릅뜬 채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 어쨌든.......친아버지한테 얼굴은 보여드려야지......”
오르마즈는 어느새 축축해진 눈가를 껌벅이며 주변을 다시금 두리번거렸다.
“누구냐? 지금 여긴.......오, 오르마즈 대장님?”
아케메니안 궁 출입문을 지키던 특무대 X는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나자 당황한 듯 순간 말까지 더듬거렸다. 오르마즈는 그 X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랜만이네.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오르마즈는 유평을 왼팔에 바꿔 안으며 마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 X는 조금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아시다시피 안 좋은 소식도 있고요.......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죠.”
“그것 뿐인가?”
오르마즈의 예리한 시선은 아케메니안 궁 앞 광장에 가득 세워져 있는 고급차량과 셔틀들, 그리고 그 주변에 마치 물고기처럼 와글와글 몰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민병대 전사들과 X들의 감시를 받으며 궁 뒤쪽 어디론가로 줄줄이 향하고 있었다. 궁의 높은 담 안쪽은 평소 주둔하고 있던 병력보다 족히 3,4배는 됨직한 전사들, 특히나 특무대 전사들로 꽉 차 있었다.
“내 보긴 더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오르마즈는 아기를 안은 팔에 힘을 꼭 주며 허리에 찬 칼을 다시금 확인했다. 오르마즈의 물음에 눈앞의 X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이, 위병소 안의 다른 전사가 오르마즈가 왔다는 사실을 상부에 급히 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르마즈는 자신의 등 뒤에도 어느새 2명의 X들이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마즈는 자신이 때를 잘못 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아기까지 안고 있는 상황에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정변이라도 일어난 거냐?”
오르마즈의 이번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의 긴장된 시간이 흐른 후, 궁 안쪽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과 옷자락, 심지어 붉은빛 머리칼에까지 온통 피를 뒤집어쓴 그 거구의 사나이는 오르마즈에게 씨익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장군님.”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 챈 오르마즈는 이 장신의 사내, 베흔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의 허리춤에는 한때 헤크마의 보좌관이 항상 들고 다니던 큰 검이 역시 손잡이가 피로 범벅이 된 채 채워져 있었다. 손잡이 합쳐 5척(150cm) 가까운 이 양손검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등에 메야 적당할 길이였지만 워낙 장신의 새 주인에게는 허리에 차도 별 무리가 없어보였다.
“이 칼의 전 주인보다는 훨씬 잘 어울리는군. 베흔 소장.”
“감사합니다.”
베흔이 키득거리고 웃으며 오르마즈의 손에 안긴 아기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가늘고 째진 눈에 몽골주름, 평평한 얼굴 때문인지, 아기의 얼굴은 거의 순수한 몽골리안 혈통 그대로였다. 물론 어머니인 유레트 역시 몽골리안이기는 했지만 고집스런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꼭 다문 입술과 조금은 심통이 난 듯한 표정은 부계인 리쿠 가의 특징 그대로였다.
“누가 봐도 친딸이라고 오해하지는 않겠군요.”
오르마즈의 얼굴을 새삼스레 돌아보았던 베흔이 한쪽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마따나, 오르마즈는 셈, 코카서스 피가 섞인 크고 움푹한 눈에 길고 또렷한 이목구비, 날씬하고 큰 키가 특징이다 보니 이 아기와는 생김새부터 완전히 딴판이었다.
“지도자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베흔이 길을 내 주며 오르마즈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잠시 긴장했던 오르마즈는 그제야 경계를 조금 풀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아기를 안은 오르마즈와 베흔은 그곳까지 따라온 수하들을 모두 물린 채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몇 명이나 죽였지?”
오르마즈가 눈을 부릅뜨며 먼저 물었다.
“아직 진행 중이니 확실치 않습니다.”
베흔이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헤크마부터.......강경파 장성 49명을 죽였고.......아케메니아와 비엔 일대의 호족과 그 수하 200여명을 죽였습니다. 지금까지요.”
오르마즈는 베흔의 무표정한 얼굴을 힐끔 올려보았다.
“코메트 놈들은 어쩌고?”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비엔 정도면 그 대가로는 충분하죠.”
오르마즈의 턱에 힘줄이 불끈 드러났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한 샤미르가 ‘홀로 남을 딸을 위해’ 대대적인 살육의 책임을 자신의 어깨에 지고 떠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지도자 전하의 명령이었나?”
“떠나시기 전에 새 국가의 시작을 피로라도 닦아놓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르마즈는 꼭 다문 이에 힘을 꽉 주었다.
“마구스들은?”
“제가 죽이지 않았으니 굳이 책임질 필요는 없죠.”
오르마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비록 다른 마구스들을 배신하고 떠난 자들이었지만, 그 5명의 마구스들은 교단 옛 지도세력의 마지막 기둥이었다. 그들마저 모두 죽었다면 그 후계자들까지 함께 몰살시켰을 테고, 이제 교단은 사실상 몰락한 셈이었다.
낮은 부저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옥상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오르마즈와 베흔은 참으로 오랜만에 나란히 옥상에 발을 내디뎠다.
“꽃밭은 여전하군.......”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오르마즈는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노란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옥상의 넓은 화원을 빙 둘러보았다. 그의 팔에 안긴 유평 역시 생전 처음 보는 꽃밭이 신기한 듯 손뼉을 치며 화사한 꽃밭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빨리 오십시오.”
펜트하우스 입구에 선 베흔이 오르마즈를 재촉했다. 오르마즈는 꽃밭에 내려달라며 칭얼대는 유평을 두 팔에 안은 채 펜트하우스에 조심스레 걸음을 들여놓았다.
안에 들어선 오르마즈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미 흙빛이 되어 있는 주치의의 얼굴이었다. 주치의는 오르마즈와 베흔을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의 옆에 있는 중환자 병상에는 비쩍 마른 채 온몸을 떨고 있는 한 남자, 이전의 그 아름답던 모습은 이제 희미하게 윤곽으로만 남아있는 한 남자가 힘겨운 마지막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맙소사.......”
설마 이 정도까지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오르마즈는 하마터면 팔에 안은 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빨리 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조금만 늦으셨다면.......”
의사가 한숨을 내쉬며 샤미르의 곁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는 ‘위험약물’ 표시가 되어 있는 강력한 마취제, 아니 마약과 이런저런 응급약품들을 샤미르의 옆에서 급히 치워내며 오르마즈에게 고개를 살며시 저어 보였다.
“두 분께서 오시기만 힘들게 기다리셨습니다........약물로 말입니다.”
마치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샤미르의 검은빛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오르마즈와 그의 팔에 안긴 아기를 향했다. 의사는 손에 들고 있던 잘 봉인된 서류를 유리벽 바깥으로 내놓고는 멀찍이 비켜났다. 베흔이 대신 받아든 그 봉투에는 ‘TSG의 마지막 지도자 샤미르 카이 리쿠’라는 서명과 봉인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문서를 받아든 베흔은 오르마즈의 굳어진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름 밑에는 ‘내 유언의 집행은 제1공신 오르마즈 카파키에게 일임한다.’는 문장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내 일은.......다 끝났어.......이제 남은 건.......이애 몫인가.......”
샤미르는 처음으로 본 자신의 핏줄을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바싹 여윈 그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었지만 최소한 그가 딸의 모습에 기뻐하고 있다는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바이탈사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거의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바깥을.......보고 싶어.......한 번만이라도”
샤미르는 파란 하늘이 비치는 유리창 너머를 올려보며 마치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내 아기도 품에 안아보고 싶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직감한 듯, 샤미르가 일그러졌던 입가에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한 번만.......딱 한 번만.”
샤미르는 애타는 표정으로 의사를 돌아보았지만 의사는 아기를 안은 오르마즈의 눈빛부터 살폈다. 그로서는 환자의 이 위험천만한 요구를 들어줄 수도, 멋대로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떡.......할까요?”
애타는 시선의 샤미르, 그리고 아기를 안은 오르마즈의 눈물젖은 표정 사이에서 어림할 수 없는 시간이 가늘게 흘러갔다. 의사는 입모양만으로 ‘더는 가망이 없습니다.’라며 표시를 해 보였다.
“........이제 놓아드리게.”
한참을 망설이던 오르마즈가 목 메인 소리로 어렵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죽어가는 샤미르에게 조심스레 다가선 의사는 그의 팔에 꽂혀 있던 주사바늘과 무수한 장치들, 그리고 호흡 보조기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오르마즈의 눈짓을 받은 베흔이 중간을 가로막은 유리벽, 그리고 펜트하우스를 빙 두르고 있던 두껍고 큰 유리창을 차례로 활짝 열기 시작했다. 오랜 동안,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던 이 무균실에 화사한 바깥 공기가 스며들어왔다. 샤미르는 베흔과 의사에게 나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이런 냄새였던가.......바깥세상은........”
샤미르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신의 코에 느껴져 오는 맑은 공기를 이미 물로 가득 들어차 망가진 폐 속 깊숙이 들이켰다. 첫 호흡에 그는 가벼운 쇼크를 느낀 듯 몸을 가늘게 떨었지만 다행히 바로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오르마즈는 팔에 안고 있던 어린 유평을 아빠의 무릎 위에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당신의 딸입니다.”
아기는 활짝 열린 창밖으로 보이는 노란 수선화 꽃밭을 가리키며 계속 칭얼댔다. 샤미르는 그 소중한 딸을 품에 꼭 안으며 달작지근한 아기의 살내음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려는 듯 최대한 깊이 들이마셨다.
“아빠, 아빠.”
아기의 속삭임에 샤미르가 눈을 번쩍 떴다. 아기의 말이 이번에도 오르마즈를 잘못 부른 것인지, 아니면 본능에서 온 핏줄의 끌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죽어가는 샤미르의 눈가에 잠시나마 기쁨을 되돌려놓기는 충분했다. 샤미르의 창백하던 표정은 맑은 바깥공기 덕분인지 분홍빛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서서 걸을 듯, 그의 얼굴에는 갑자기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병상을 천천히 밀어 바깥으로 나섰다. 난생 처음, 환하고 따뜻한 햇볕을 얼굴 가득 받은 샤미르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지만 그의 입꼬리에는 도리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꽃향기라는 게.......이런 거였나.......”
흐드러지게 핀 수선화 꽃밭에 누운 샤미르는 두 번째 쇼크에 다시 몸을 비틀었다. 통증을 느낀 그가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에 오르마즈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끝을 향해 나아가는 샤미르의 숨소리가 어느새 조금씩 거칠어져가고 있었다. 오르마즈는 샤미르,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긴 유평을 보드라운 흙바닥에 내려놓아 주었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샤미르는 자신의 목을 안은 오르마즈의 든든한 팔을 꽉 움켜쥐었다. 소원대로 꽃밭에 들어선 유평은 둘 사이에서 빠져나와 아빠의 여윈 어깨를 짚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유난히 늦은 걸음마인 것인 아는지 모르는지, 두 발로 일어서는 딸의 모습을 확인한 샤미르의 뺨을 타고 어느새 가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평은 까르르 웃음을 지으며 혼자 신나게 손뼉을 쳤다.
“봤어?.......아이가 일어서는 거.......”
샤미르가 지독한 호흡곤란을 힘겹게 참아내며 오르마즈의 손을 으스러져라 꽉 쥐었다. 아기는 아빠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곧 흙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아기는 화단 벽을 붙들고 고집스레 다시 일어서며 걸음을 내밀었다.
샤미르는 다시 오르마즈에게로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오르마즈의 무릎 위에 편안히 누운 샤미르는 얼굴에 쏟아지는 화사한 햇살, 그리고 주변을 감싸 도는 고운 꽃향기와 흙내음을 가슴 가득 느끼며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첫 번째 여인, 아니 사실상 유일했던 한 사람의 뺨을 조용히 짚었다. 오르마즈는 언젠가 샤미르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이 비슷한 상황의 그림을 문득 머리에 떠올렸다.
“그때.......이미 알고 계셨군요.”
샤미르는 눈가에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오물거렸다.
“내겐.......”
그는 핏발이 선 눈을 몇 번이나 거듭 부릅뜨며 무언가 애써 말하려 했지만 더 이상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너.......”
“압니다.”
오르마즈는 턱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샤미르의 옷자락에 닦아냈다.
“저도 당신만 사랑했으니까요.”
조금씩 죽어가는 이 아름다운 청년을 잠시 내려다보던 오르마즈는 자신의 품 안에서 힘겨운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의 파래진 입술에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오르마즈의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을 느끼며, 샤미르는 핏발로 붉게 변해버린 그 매서운 눈을 천천히 감았다. 평생의 소원을 죽음 직전 비로소 이룬 그의 눈가와 입가에 어느새 행복어린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나뿐이었으니까.......”
입술을 맞댄 채 힘들게 속삭인 샤미르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오르마즈를 품에 꼭 안았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은 둘 사이에 유리벽도, 거추장스러운 위생복, 소독약으로 범벅이 된 물도 필요가 없었다. 오르마즈의 따뜻한 체온과 보드라운 살결을 그대로 느끼며, 샤미르는 최후의 즐거움을 이렇게 만끽했다.
잠시 후, 오르마즈의 팔을 꽉 붙들었던 그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던 그의 고개 역시 오르마즈의 팔 아래로 서서히 꺾이고 있었다. 천천히 미끄러져 떨어지는 그의 미소어린 입술을 야속하게 쳐다보던 오르마즈는 눈을 감으며 그 굳어버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거칠게 끓고 있던 가슴도, 희미하게나마 뛰고 있던 심장도,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가십니까.......”
오르마즈가 눈물을 삼키며 가늘게 흐느꼈다. 31살, 차가운 유리벽 안에서 힘겨운 생명을 버티어 온 이 젊은 지도자는 아직 미완의 ‘제국’, 그리고 고작 한 살 반의 어린 딸만을 세상에 남겨둔 채 31년의 뜨겁고도 짧은 삶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숨이 마지막으로 끊기던 그 순간, 몇 번이나 넘어져가며 결국 첫 걸음마를 짚은 아기가 휘청거리며 어렵게 중심을 잡았다. 아기는 오르마즈를 돌아보며 혼자 손뼉을 쳤다.
“아빠.”
조금씩 식어가는 샤미르의 품에서 들려오는 오르마즈의 낮은 흐느낌 속에서, 첫 걸음마를 비로소 내디딘 어린 유평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서툰 옹알이, 작은 손뼉 치는 소리가 아케메니안 궁 옥상의 이 화사한 꽃밭을 울렸다. 너무나도 맑고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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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편은 자르기가 애매에서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좀 길어졌습니다.;;
비축분 유지 차원에서 이후 2회 정도는 조금 짧아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