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3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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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광장을 피보라로 물들이고 막 돌아온 카렐을 기다리고 있는 건 두툼한 보고서류를 든 황실 유전자은행 소장 자그룰라 모렌 박사였다.
“지난번 명하신.......황실 직계 조상분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입니다.”
모렌 박사가 솔의 부축을 받아 큐비클 안에 막 누운 카렐의 눈치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을 카렐에게 말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지, 함께 온 보안국 소속 의사의 눈치도 함께 살폈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보안국 요원들까지 함께 투입된 이상, 그가 은폐를 하려 한들 이전처럼 마음대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놀라운 내용이 있다고 하여도.......”
모렌 박사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카렐은 모렌 박사가 내민 보고서를 받아들고 첫 장을 일단 넘겨보았다.
“흐.......음.......”
카렐의 침대 옆을 지키던 솔은 순간 그의 여윈 손에 힘줄이 바싹 드러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황빈, 잠깐.......자리를 비워주면 좋겠습니다.”
“예? 예.......알겠습니다.”
카렐은 모렌 박사와 함께 들어온 보안국 의사, 그리고 옆을 지키던 의사에게도 모두 나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방 안에 모렌 박사와 단둘이 남은 카렐은 잠시 눈을 흘겼다. 모렌 박사는 마치 죄인인 양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네도 알고 있었나?”
“.......”
“그럼.......내 할머님이신 세나우스 2세 선황께서.......세나우스 1세 선황이 딸이 아니시고 샤미르 지도자의 장녀........”
카렐은 갑자기 흥분해서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왜.......입을 다물고 있었나?”
“오, 오르마즈 경께서 무덤까지 가져가라 명하셨습니다. 소인 그분의 명에 따라......”
모렌 박사가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번 내 병도.......”
“조사 결과 이번에 발견된 폐하의 면역 수용체가 소위 말하는 ‘S혈통 유전’의 핵심부분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동안의 S혈통과 발현자에 관한 많은 가설들을 모조리 폐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모렌 박사를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었다. 모렌 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제의 면역 수용체, 아니 S유전자는 순종 호모(Homo)가 될 경우 치명적인 면역결핍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발현자로 태어나게 됩니다. 샤미르 전하께선 때문에 평생 면역결핍에 시달리셨습니다. S는 굳이 말하자면.......열성 치사유전자입니다.”
‘열성 치사유전자’라는 충격적인 말에 카렐의 입술에도 힘이 꽉 들어갔다. 그간 황족의 자랑이었던 S유전자에 대한 생물학적인 정의는 잔혹하리만큼 처참했다.
“그럼.......리쿠 가를 황족으로 만든 S유전자가.......실제로는 그 자체로 결함이라는 뜻인가?”
“에르네스토 지도자에게서 난 자녀분들 중 공교롭게도 교단에 피살당한 분들 모두가 S를 가진 보인자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세나우스 1세 선황폐하와 같은 생존자들은 모두 S가 없는 정상인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께서는 발현자도, 돌연변이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 보통 시민과 같은 일반적인 후손을 가질 수 있으셨습니다.”
“그럼 오직 샤미르 지도자의 혈통에서만.......”
카렐이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모렌 박사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S는 정상인에 대해 열성입니다. 따라서 정상인과의 사이에서 난 헤테로(Hetero)의 경우는 면역체계에 언뜻 이상이 없는 준발현자, 혹은 정상인이 됩니다. 세나우스 2세 유평황제께서는 모후이신 유레트 나이킨 부인께서 정상인이셨던 덕분에 다행이 생부이신 샤미르 지도자의 결함을 물려받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보인자이셨던 탓에 발현자인 주페 태자저하, 그리고 마찬가지로 보인자인 타니토, 레곤 공주 저하를 낳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잠시 입가를 씰룩거리던 카렐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모렌 박사의 설명은 그럭저럭 말이 되는 듯 싶었지만 어딘지 이상했다.
“그렇다면.......아버님, 그리고 코리온 오라버니와 나는 어떻게 발현자이면서도 정상인으로 태어난 거냐? 난 S호모도 아니고......”
씩씩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던 카렐은 순간 호흡을 아예 멈추었다.
“아, 아버님이.......”
카렐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잠시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아버님이.......아버님이........오르마즈 이모님과 세나우스 2세 선황 사이에서.......태어나셨다고?”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 카렐은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3촌간의 근친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조차 해 본 일 없는 현실에 그의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 치고.......오르마즈 이모님은 정상인 아닌가? 그러면 아버님도 헤테로인데 왜 그분은 완전 발현자가 되신 거냐? 그것도 면역결핍도 없이 말이야!”
카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모렌 박사를 노려보았다.
잠시 목소리를 높였던 카렐은 거칠어진 호흡을 감당할 수 없는지 잠시 가슴을 움켜쥐고 끄응 소리를 냈다. 순간 당황한 모렌 박사가 얼른 손을 씻고 그의 큐비클 안에 밀어넣었다.
“제발, 제발, 진정하시옵소서.”
모렌 박사는 카렐의 바이탈사인을 급히 확인하고는 불규칙하게 떨리는 그의 가슴을 조심스레 짚었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 보시는 편이.......”
“상관없어.”
카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누운 채로 다시 보고서를 펼쳐들었다.
모렌 박사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주페 태자 저하께서 그리되신 정확한 이유는 아직은 불명확합니다. 하지만 추정컨대 오르마즈 경의 유전자와 만나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지.......”
“그분이 왜?”
카렐의 거의 따지는 듯한 물음에 모렌 박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희한하게도.......오르마즈 경 역시 염색체상의 S유전자와 인접한 부분에 돌연변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돌연변이와 S유전자가 만나면서 두 분 사이에서 발현자이면서도 면역결핍은 아닌, 전혀 새로운 개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연변이? 오르마즈 이모님이?”
카렐의 물음에 모렌 박사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눈앞의 ‘발현자’ 황제가 얼렁뚱땅 전문지식 따위를 나열해 속여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르마즈 경께서 가지고 계신 그 돌연변이의 기원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옛 자료를 검색해보니 사교 시절 극비기록에 오르마즈 경, 아니 카파키 가의 이 돌연변이를 ‘R유전자’로 표시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R유전자?”
“교단 사람들이 왜 이 기록을 극비로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꽤 긴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던 것으로 보였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기한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추정컨대 그레이오팔이 이 바로 이 R유전자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오팔’이라는 말에 카렐은 한참동안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혈통의 비밀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S와 R, 그것도 모자라서 X까지 모두 가지고 태어난 희한한 개체였군?”
카렐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힘없이 고개를 젓던 그는 문득 모렌 박사를 돌아보았다.
“잠깐, 그러면 코리온 오라버니는 어찌된 건가? 그쪽은 오르마즈 이모님의 피를 받지도 않았는데........어떻게 정상적인 발현자가 태어난 거지?”
잠시 머뭇거리던 모렌 박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놀라실지 모르지만.......그분 역시 S와 R유전자를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아마도.......부마 예르마크 세닉 경 역시 R유전자의 보인자가 아닌가 합니다. 정확한 결과는 가문 구성원 모두를 조사해 보아야 알겠지만, 제 생각엔 세닉 가에도 어느 시점엔가 R유전자가 유입된 것 같습니다.”
“예르마크 경의 선조 중에 카파키 가와 혼인한 사람이 있었던가?”
“아뇨. 없습니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세닉 가 전 종장이신 예르마크 경의 부친께선 무슨 이유엔지 평생 독신으로 사셨고, 자녀들도 모두 인공수정으로 얻으셨습니다. 그분의 자녀들이 모두 출중한 미남미녀들만 태어나서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것이 고작이었죠. 그때만 해도 계급제가 없어서 그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렌 박사가 카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꼬리를 붙였다.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를 떨구었다. 혈통의 비밀을 알아내려 시작한 조사였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금이라도 R유전자에 관해 최대한의 자료를 모아서 가져와라. 누가, 누구에게서 물려받았는지, 시조가 누군지도.”
“하지만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모렌 박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카파키 가가 멸족되면서 그 일가의 유전자기록까지 모두 말소되었습니다. 심지어 오르마즈 경의 유전 자료도 튜브 안에 남아있는 난자가 전부다보니 완전한 체세포 자료는 이제 남아있지도 않습니다.”
“방계들이 아직 있잖나? 외할아버님의 배다른 형제들도 아직 여럿 남아있으니 무조건 조사하도록 해,”
카렐이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어떡해서든 이번 일에서 손을 빼 보려던 모렌 박사였지만 카렐의 이런 강력한 요구에 그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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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짧지만 워낙 중요한 부분이라 한 편으로 따로 나누었습니다. ^^>
혹시 지난번 연재분에서처럼 '호모'를 잘못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해서 설명 조금;;;
호모(Homo)는 1쌍의 상동염색체상에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 소위 순종입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많이 보아오신 RR, rr, 혹은 혈액형에서 O형, 혹은 AA, BB 처럼요. ^^ 이 경우는 가진 형질이 그대로 발현되지요.
헤테로(Hetero)는 호모의 반대개념으로, 상동염색체상에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경우, 소위 잡종;; 입니다. ^^ 멘델의 콩 실험에서 Rr, 혈액형 AB, AO, BO 같은 것이 해당됩니다. 이 경우 우성인 한쪽이 대개 표현형으로 나타나지만 AB형처럼 모두가 다 나타날 수도 있죠.
제 글에서는 SS 호모이고 R이 없는 샤미르는 결함체로, S에 R을 함께 가진 카렐, 주페, 코리온은 정상적인 발현자로 보시면 됩니다. ^^
NN을 정상인이라 한다면 NS는 유평황제, 레곤 등이고, NN에 R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부마 예르마크 경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