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1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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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말해 봐라.”
카나르 경이 채찍을 쥔 근위병을 일단 저지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가 릴라크를 저 밑에까지 따라왔는데 여기쯤에서 더 이상 오지 말라 지시했다고 그랬나?”
“예.......그리고 5분 정도 후에 사령부에서 복귀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돌아갔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분대장이 입 안에 가득 든 피를 뱉어내며 힘겹게 대답을 했다. 카나르 경이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전날, 릴라크가 최고제후 제롬의 막사에 갔다가 엄청나게 화가 나서 돌아왔고?”
“예........”
분대장이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며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고통스런 호흡을 몰아쉬었다.
카나르 경이 그런 그들을 노려보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이 별 것 아닌 말을 이렇게 매질을 당하고서야 털어놓는 이유가 뭐냐?”
허를 찌르는 종장의 물음에 그들이 순간 움찔했다. 카나르 경이 그 큰 손으로 분대장의 멱살을 움켜쥐며 다시 물었다.
“내 물었다. 그 말을 왜 1시간 동안이나 매질을 당한 후에야 털어놓느냐고.”
종장의 이글거리는 눈빛 앞에서 그 기병분대장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 때, 옆에서 보고만 있던 미노아 경이 옆 사람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분대장의 귀에 대고 물었다.
“어떤 놈이 네게 입을 다물라고 했지?”
“예?”
“최고제후 제롬 공이냐.”
분대장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카나르 경이 신기하다는 듯 딸을 돌아보자 미노아 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여자로서의 육감이죠.”
분대장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목을 조여오는 카나르 경의 손아귀 힘은 그를 그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다무는 대가로 널 델루지 가에 특채해 준다고 했나?”
미노아 경이 이를 드러내며 다시 물었다. 분대장은 결국 주변 근위기병들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핏발이 곤두선 카나르 경은 피떡이 된 분대장을 바닥에 동댕이치며 다시 산 밑을 내려다보았다.
플라칼 가 장병들이 델루지 가의 명령에 유달리 약한 건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다. 방계인 플라칼 가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 장병들이 훨씬 좋은 조건에 델루지 가로 선발되어 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가문 피가 섞인 지도부조차 델루지 가로 ‘입양’되어 그곳 사람이 되는 것을 꿈으로 삼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플라칼 가는 종종 델루지 가의 ‘신병훈련소’라며 놀림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칼 가의 사람들도 가문의 중요한 정보를 델루지 가에 넘기는 데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상층부에도 델루지 가에서 교육받고 오거나, 그곳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온통 장악하고 있었다. 사실 카나르 경 스스로도 절반은 델루지 가의 피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최소한 ‘플라칼 가 종장’으로서의 위치까지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카나르 경은 자신을 뒤따라온 2백여명의 근위기병들을 빙 둘러보았다. 종장을 지키는 저 정예병들 중에도 그가 알고 있는 델루지 가 스파이만 3명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 그가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친딸 미노아뿐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산이 너무 넓어서 다 조사하는 건 무리입니다. 게다가 곳곳에 적 초소들까지 산재해 있고.......”
근위기병대 장교의 볼멘소리에 이번에도 딸 미노아 경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누가 여기를 다 조사하라고 했나?”
“예?”
“산 너머 마을로 넘어가는 최단루트를 뒤져라. 릴라크 올케는 아마 5번 도시로 가려 했을 거야. 그러면 그곳을 지나려 했을 테니.”
의식을 잃었던 릴라크가 깨어난 건 추락사고가 있고 8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멍한 얼굴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는 누군가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멍하니 눈을 뜬 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력을 잃었던 눈은 희미하나마 빛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자기.......야?”
릴라크는 옆의 누군가에게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옆 사람이 잠에서 깬 듯, 후다닥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져왔다.
“깼어?”
어딘지 익숙하고 온화한 손길이 그의 가슴을 짚었다. 온돌방의 따뜻한 기운이 두툼한 요와 맞닿은 등에서부터 조금씩 전해져왔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남편 루시도프의 조심스런 물음에 릴라크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눈 위보다는 좋네.”
릴라크가 잔뜩 여윈 얼굴에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루시도프는 잠자리 위의 작은 전등을 켜고 아내의 거칠어진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릴라크는 자신의 머리가 빡빡 깎여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머쓱한 표정을 지은 건 루시도프였다.
“수술하느라 그랬어. 상태가 별로 안 좋았거든.”
“알아.”
릴라크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일 수도 없는 오른팔 쪽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쇠 프레임으로 접합해놓은 오른팔은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인공 조직으로 땜질이 되어 있었다. 릴라크는 자신과 남편 단 둘이 누워있는 동부식의 방 안을 조심스레 살폈다.
“아, 3번 도시 페로 관이야. 5번 도시로 보내 달랬는데.......당신 말도 들어야 된다고 안 보내주더라고.”
루시도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억류’라는 말은 쓰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썼다.
“페로 관?”
릴라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그날’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려 애썼지만 절벽에서 떨어진 직후, 루시도프에게 ‘동맹군을 데려와라’라고 알린 이후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 손에, 어떻게 구출되었는지도 전혀 머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동맹군에서 구해줬어. 거기서 일단 급한 수술 받고 이틀 전에 여기로 옮겨졌어.”
루시도프가 아내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빨리 5번 도시로 가자. 당신만 동의하면 바로 셔틀에 태워서 예리노프 가에 보내준댔어.”
남편의 재촉에도 릴라크는 눈을 부릅뜬 채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득 불안해진 루시도프가 아내의 손을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여기 있기는 정말 싫어. 우리를 구해줬다지만 페로 놈은 어쨌든 가문의 적 아냐. 보내준다고 할 때 하루라도 빨리......”
“......우리 아기는?”
아내의 물음에 루시도프가 움찔했다. 거짓말에 서툰 그는 자연스러운 대답을 생각해내려 또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다른 방에 있어. 옆에서 울어대면 당신한테 안 좋을까봐......”
릴라크는 눈동자를 굴려 아직 온전치 않은 시력으로 남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왜 이렇게 손을 떨어?”
“아냐, 그냥......”
“아이도 다친 거야?”
“아냐, 아이는 멀쩡해. 당신 덕택에........”
루시도프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눈치 빠른 릴라크가 이를 빠드득 갈며 바로 쏘아붙였다.
“거짓말 마. 나하고 떨어질 때.......이미 다쳤는데 뭐가 멀쩡하다는 거야?”
“내 말은 크게 안 다쳤다는.......”
“아이 빨리 데려와.”
릴라크가 갑자기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의 혈압과 호흡이 불규칙해지면서 바이탈사인을 나타내는 기계가 요란스레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봐야 믿을 테니까 빨리 내 앞에 데려오라고!”
릴라크가 부러진 왼팔을 버둥거리며 남편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꽂혀있던 주사바늘만 끊어낸 것이 전부였다. 아내의 격한 반응에 놀란 루시도프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뭡니까!”
문을 때려부술 듯 뛰쳐들어온 페로 가디언이 당혹스런 얼굴로 이 두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시도프는 가디언에게 나가보라며 손짓을 보냈다.
“아이부터 데려오라니까!”
릴라크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에 저런 기운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큰 소리로 찢어져라 악을 썼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루시도프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어느 순간, 릴라크는 버둥대던 팔을 떨어뜨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꽉 악문 그의 아랫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조금씩 배어나왔다.
부부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 미안해.......”
루시도프가 자리에 꿇어앉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릴라크는 눈을 꽉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새 눈물로 흠뻑 젖어버린 베개, 그리고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는 양팔과 입술에 맺힌 핏방울은 어느새 슬픔마저 뛰어넘어버린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황궁에.......돌아가야겠어.......”
흐느낌에 뭉개어진 릴라크의 목소리는 언뜻 알아듣기도 어려운 지경이었지만 루시도프를 기겁하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정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릴라크가 '황궁에 돌아간다'는 것이 카렐에게의 전향을 뜻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깜짝 놀란 루시도프가 릴라크의 손을 덥석 붙들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야? 안 돼, 이 몸으로 가긴 어딜 가. 처가 가서 장례 치러주고 자기도 몸조리해야지. 제발, 나한텐 이제 당신뿐인데 그 지옥에 가면 어쩌겠다는 거야! 거긴 곧 전투가.......”
“내 손으로 으깨어 죽일 놈이 거기 있어........전쟁터에 돌아가야 돼.”
릴라크가 아직 마비된 오른팔을 부들부들 떨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하지만 루시도프 역시 완강했다.
“죽이긴 누굴 죽여!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이 몸으로 뭘 어쩐다는 거야? 제발, 몸이라도 나으면 황궁이든 어디든 다 보내줄게. 이번만은.......”
“이 맹추야! 일이 이렇게 됐는데 친정이라고 우릴 받아줄 것 같아! 내가 살아있는 걸 알면 제롬 새끼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우리 아기를 죽인 게 누군데!”
남편에게 처음으로 악을 쓰며 욕을 퍼부은 릴라크는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혼란스런 표정으로 앉아있던 루시도프는 분노에 떨고 있는 릴라크의 뺨을 다시금 살며시 짚었다.
“도대체.......무슨 일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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