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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97화 (496/1,132)

< -- 497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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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에 의식을 되찾은 카렐이 거의 무의식에서 처음으로 꺼낸 말은 ‘적군은?’ 이었다. 니사와 함께 한나절이나 그의 머리맡을 지키던 솔은 며칠만에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를 본 순간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목부터 와락 껴안았다.

“하.......아.......”

아직 의식이 다 돌아오지 않은 카렐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황제 침소의 풍경, 자정이 가까워진 어두운 하늘, 그리고 황도의 야경, 만족스런 얼굴로 혼자 손뼉을 치고 있는 니사의 모습이 차례대로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살아있는.......건가.”

쉰 목소리를 쥐어짜낸 카렐이 짧으나마 미소를 지었다. 황궁의 주인이 된 지 사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문득 이곳이 수십 년은 지낸 듯 편안하다고 느꼈다.

“열도 많이 떨어졌고.......아직은 좀 두고 보아야겠지만 상태가 좋습니다, 폐하.”

황제의 바이탈사인을 재차 살핀 니사가 웃음을 지으며 그의 담요를 여미어 주었다. 카렐은 아직 불편한 오른팔을 천천히 움직여 솔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호흡이 특별히 불편하지 않으시면 이건 빼 드리겠습니다.”

니사는 카렐의 코에 박혀 있던 관을 조심스레 빼내 옆에 치워놓았다.

“사람들은?”

카렐이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새벽에 적들이 도하해 올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긴급 대책회의 중이신 것 같습니다. 일단 회의를 중단하시라고 이야기 드릴까요?”

“회의는 일단 접고.......몇 명만 여기 모이라고 해.”

의식을 되찾은 카렐의 모습에 가장 기뻐한 이는 다름아닌 밀리타였다. 카렐에게 직접 주사를 놓아주고도 행여 늦지나 않은 것인지 내심 걱정이 태산이던 그였다. 그가 니사에게 준 약이 그다지 충분치 못하다 보니, 투약 후에도 한참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카렐의 모습에 ‘혹시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지금껏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던 차였다.

그와 함께 유리벽 밖에 연결되어 있던 제네르는 한쪽에서 몰래 눈물을 훔쳐내는 밀리타의 모습에 잠시 매서운 눈길을 주었다.

“동생이 이미 상께 총애를 받고 있는 걸 알 텐데.......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제네르가 대번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밀리타가 카렐에게 내심 각별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밀리타처럼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동생이 이미 내명부 후보로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철저히 표정관리를 해 주리라 믿고 있던 터였다.

물론 그는 새로이 깨어난 카렐의 눈빛에 알 수 없는 냉기가 어렸다는 것도, 그리고 그가 밀리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지 달라졌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뜬금없이 밀리타에게 ‘각별히 고맙게 여기고 있네.’라고까지 말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페로, 제네르를 필두로 십여명의 측근들을 유리벽 밖에 세워둔 채 카렐은 그동안 들어온 급한 전황보고와 지도, 최근의 날씨자료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나 아직 상황판단이 재빨리 되지는 않아 보였지만 최소한 그의 표정만은 진지했다.

“사로잡힌 가디언 제파는 ‘귀순’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황궁 감옥에 투옥했고.......항복한 토벌군 출신 근위대원들은 포로수용소로 이송했습니다.”

“그렇게 쉽게 귀순할 사람이면 이미 ㅤㅋㅞㄹ크에서 귀순했겠지.......상관없으니 잘 대우해 주도록.”

제네르의 보고에 카렐이 느릿느릿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자네 몸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실 처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네르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제파에게 옆구리를 찔린 그의 영상은 옆구리에 두툼한 드레싱을 댄 채 목발에 기대 힘들게 서 있었다.

“지금 몇 시지?”

“예?”

카렐의 뚱딴지같은 물음에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 흐릿한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누군가의 대답을 재촉하듯 유리벽 밖을 내다보았다. 결국 베아트릭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새벽 0시 20분입니다.”

“아직 늦지는 않았군. 적들이 새벽에 상륙해 온다면.......”

카렐이 다 읽은 서류들을 니사에게 돌려주고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웠다. 사람들은 곧 벌어질 전투에 관해 그에게서 도대체 무슨 명령이 내려지려는 것인지,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데마반드 분지 외곽에서 본대와 떨어져 고립되었던 근위대 원정군 1만, 아니 정확히는 그때까지 목숨이나마 붙어 있던 6천의 병력이 끝내 집단항복을 택한 건 제파가 포로로 잡힌 날 저녁의 일이었다.

어쨌든, 이 일은 이번 전쟁 들어 첫 번째로, 베흔 휘하의 ‘황실 근위대’가 동맹군에 집단 항복한 사건이었다. 근위대가 데마반드에서 고전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베흔은 그동안 머무르던 사오시안트에서 서둘러 데마반드로 향했지만 제파, 그리고 토벌군 출신 부대의 항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곧 상륙할 테니 크게 낙담할 건 없습니다.”

뚱한 표정의 제롬은 상황을 애써 낙관적으로 설명하는 베흔에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곧 있을 플라칼 가 군대의 상륙계획을 설명하던 그는 그 콧대높던 근위대의 항복 소식에 한참 역정을 부리던 참이었다.

“그래, 일단 상륙만 하면 우리 연합군이야 밥값 하는 거지. 그런데 황도에 근위대 병력이래야 이제 1군단 1만5천 남은 게 고작인데, 원래 약속대로라면 우리가 공성전을 할 동안 근위대가 보급을 맡아줘야 하잖아. 그 정도로 탄현성에서 황도까지 보급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거야? 우린 자네 근위대만 믿고 도하를 하는 거라고.”

“뭐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듣자하니 제네르 그놈이 적 기병대 주력을 이끌고 남동쪽 신성으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남부연합군 보병대가 공성전을 할 동안 샤자한 공과 부마 예르마크 경이 기병대를 이끌고 제네르 년이 이끄는 동맹군 기병대를 박살내 버리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겁니다.”

자신의 기병들을 동원해야 된다는 말에 제롬이 다시 입을 삐죽거렸다. 게다가 그는 이번 항복 사건에도 생각 외로 태연한 베흔의 모습에 내심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명색이 특등급 가디언이 병력을 1만이나 데리고 적들한테 항복했는데, 근위대장은 무슨 걱정도 않는 사람 같아?”

“사실 별 걱정은 없습니다.”

베흔이 어깨를 으쓱 했다.

“제파 그놈은 어쨌든 귀순한 건 아니니까요. 사실 이번 혼란기에 어찌 다루어야 할지 많이 골아픈 녀석이었는데 도리어 그 정도면 충성을 증명한 셈이죠. 워낙에 소심한 녀석이라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마 우리에게 칼을 겨누지는 않을 겁니다.”

“뭐 그렇기만 하다면야 큰 문제가 없겠지만.......어차피 전쟁도 거의 끝나가니.......”

제롬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황도의 야경은 새 주인을 기다리는 듯 유난히 휘황찬란해 보였다.

“어차피 황도만 차지하면 전쟁은 끝나는 거지 뭐. 그래. 얼마 안 남았어.”

제롬은 일단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 건너에 주둔한 동맹군 병력은 곧 상륙군에 박살이 날 테고, 황도에 멋지게 개선만 하면 모두 다 끝이었다. 최소한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러했다.

제롬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장들에게 공격 개시를 명했다. 그의 명령과 동시에, 개전을 알리는 낮은 나팔소리가 차가운 강변의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이번 공격의 성공을 당연시하고 있는 제롬의 기대와는 달리, 공격에 앞장설 5만의 플라칼 가 보병대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동쪽 하늘의 여명을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있었다. 그건 워낙 시달린 때문인지, 이번만 성공하면, 이 뒤로는 플라칼 가가 더 이상 위험한 작전에 동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인 못할 소문도 병사들 사이에 돌고 있었지만 사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들어라! 이번 공격엔 별다른 전략 따위는 없다! 우리는 적보다 압도적인 숫자이고, 돌격할 거리도 그다지 길지 않다!”

가뜩이나 둔한 헤즈가 말에까지 올라타서 이렇게 직접 병사들 앞에 서는 것도 퍽이나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서서 이렇게라도 격려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병사들의 사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연합군의 식량 재고는 사실상 바닥났고, 만약 이번 공격에 실패하고 보급로를 끝내 확보하지 못한다면 30만의 대군이 황도 한중간에서 모두 굶어죽고 말 상황이었다.

“해가 뜨면 바로 공격령이 내려질 것이니 선봉대는 적의 양측면으로 기동해서.......”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힘차게 팔을 내뻗던 헤즈는 순간 입에서 내뱉던 말까지도 멎었다.

“뭐야.......저건.......”

붉은 아침놀 아래, 동쪽 강 건너 무성한 갈대밭 부근에서 적병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드문드문 서 있는 얼마 안 되는 기병들과, 강변을 꽉 채우고 무수하게 휘날리는 빽빽한 갈대밭, 큰 깃발들이 전부였다. 스코프로 확대시켜 본 그 깃발 위에는 ‘저승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문장이 마치 약속이나 된 새겨진 채 찬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안 나온 거야? 아니면........”

헤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오늘 새벽에도 관측병들은 ‘건너편 강안 가까이에 적병들이 없는 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지만 헤즈는 그저 적들이 후방의 언덕 위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갈대밭에 숨어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이쪽이 대오를 갖추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모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헤즈는 선봉대로 준비 중이던 양익의 보병들에게 먼저 나아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미리 좀 가서 살펴 봐.”

헤즈의 명령에 5천여의 보병들이 양 측면에서부터 조심스레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안에는 동맹군 경창기병들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다 합쳐야 5백이 채 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나마도 이쪽 선봉대가 전진하는 모습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발리스타 역시 모두 철수했는지, 포격 또한 전혀 없었다.

“무언가 틀림없이 있을 거야.”

잔뜩 겁에 질린 보병들이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소심해 보일 정도로 느린 걸음을 한 발, 두 발 내디뎠다. 지난번 얼음이 깨지면서 ‘봉변’을 당했던 플라칼 가 보병대는 이번에는 고성능 탐지장치를 든 엔지니어까지 동행하고 조심스레 강을 건넜다. 그렇다 보니 15분 정도면 건넜을 거리를 걷는 데 족히 30분은 걸려야 했다.

“다 왔습니다!”

짧은 보고와 함께 선봉에 섰던 중장보병단 기수(旗手)가 제일 먼저 욱리하 건너편 저지대 땅을 디뎠다.

평소 같았다면 기수의 상륙과 동시에 환호성이 터졌겠지만 소리를 지르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앞에는 공포스럽기까지 한 빽빽한 갈대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름이었으면 푹푹 빠졌을 이 늪지가 다행히 겨울이라 꽁꽁 얼어붙어 단단해진 정도가 굳이 축복이라면 축복이었다. 물론, 그 덕택에 갈대가 바싹 말라있는 것이 어쩌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빌어먹을.”

몇몇 병사들이 욕을 내뱉었다. 조금 전 뒤로 조금 물러난 5백여의 동맹군 기병들은 강둑 위에서 여전히 여유롭게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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