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6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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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들이 무엇을 하건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던 오르마즈였지만 만삭의 몸으로 1층 주점에서 일하겠다며 나선 유레트에게만은 엄격했다. 그는 ‘공기도 나쁘고 갖은 잡놈들이 득시글거리는’ 주점에서 일을 하느니 그 동안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찾아 먹으라며 1층에 절대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 주점에는 ‘갖은 잡놈’이라고 할 만큼 많은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었고, 공기가 나쁜 것도 젊은 종업원이 없다보니 청소를 제대로 잘 안 해서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늙은 노파 하나 빼면 종업원도 없는 처지에 이렇게 태평한 오르마즈에게 세네피스는 사실 불만투성이였다. 게다가 마치 남편이라도 되는 양 눈만 떴다 하면 유레트를 돌보아주고 태교까지 걱정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식이라도 보는 줄 알겠네’라며 매일같이 불평을 터뜨리곤 했다.
그래도 성격 좋은 유레트는 ‘정말 저분의 아이였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라고 받아쳐서 세네피스를 종종 기겁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하지만 아기 때문에 세네피스가 이렇게 혼자 전전긍긍해야 할 날도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유레트는 예정보다 거의 한 달이나 일찍 진통을 느꼈고, 술집 문을 급히 닫고 올라온 오르마즈, 그리고 얼떨결에 산파를 떠맡은 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급한 출산을 해야만 했다.
예정보다 너무 앞서서 찾아온 진통에 당황한 오르마즈가 병원이나 의사를 찾았지만, 남극성당에 주둔해 있던 민병대 의무관들은 무슨 이유엔지 그를 피했고, 민간의 의사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때 제국 최대의 병원이 자리잡았던 남극이었지만 이제는 폐허뿐이었고, 그곳에서 일하던 그 많던 의사들도 민병대의 탄압을 피해 모두 도망가고 이젠 없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유레트는 고마울 정도로 순산을 해 주어서 오르마즈의 시름을 한결 덜어주었다.
“정말.......못생겼네요.......”
자신의 배로 낳은 아기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유레트가 탈진한 표정에 엷은 미소를 보탰다. 아직 탯줄도 끊지 않은 그 아기는 약간 미숙아여서인지, 아니면 산모가 겪은 고생 때문에 그런 것인지, 유난히 작고 약해 보였다.
먼 미래, ‘제국’을 뒤흔들 ‘유평 나이킨 리쿠’의 출생은 사람들의 요란스런 축복과는 거리가 먼,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다.
“탯줄은요?”
탯줄을 묶은 노파가 오르마즈와 유레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레트가 오르마즈의 손등을 짚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며 눈짓을 보냈다.
“이거 참........”
오르마즈가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소독한 가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이 소중한 혈통을 어머니의 몸에서 완전히 떼어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레트가 얼마나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미처 모르는 채로.
하얀 시트에 싼 자그만 아기를 노파에게서 받아든 오르마즈는 그 얼굴부터 유심히 살폈다. 아직 성급한 판단이기는 하지만 이 아기의 생김새에서 친아버지 샤미르의 맑고 고운 얼굴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증조모 파냐드 리쿠의 매서운 눈매와 할아버지 에르네스토의 강인함이 더 짙게 배어 있는 듯 싶었다.
“유평 나이킨 리쿠, 콜로니의 다음 지배자.”
오르마즈는 힘차게 뛰고 있는 아기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몸집이 작기는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건강하군요. 그 아버지가 충분히 기뻐할 만큼.”
아기가 행여 샤미르의 결함을 물려받지나 않았을까 긴장하고 있던 오르마즈는 빠르게 숨을 쉬고 있는 아기의 작은 가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태어나자마자 쇼크를 일으키면서 캡슐에 넣어져 그 이후 바깥공기를 평생 느껴보지 못한 불운한 친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들에게서라도 후손을 보기를 그토록 소원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직접 보았다면 너무도 기뻐했을 그런 모습이었다.
“자요.”
오르마즈는 지친 유레트의 가슴에 아기를 안겨주었다. 엄마의 품을 느낀 아기는 마치 본능처럼 젖을 찾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제 손 좀 잡아줘요.”
유레트가 오르마즈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오르마즈의 크고 따뜻한 손과, 아직 젖도 돌지 않은 가슴을 더듬는 소중한 아기를 느끼며, 유레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 잘 풀리겠죠? 예?”
유레트가 오르마즈를 올려보며 간곡한 어조로 물었다. 오르마즈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차마 그에게 그런 말까지 해 줄 수는 없었다.
“아마도.”
오르마즈가 입가에 억지스러우나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이 아기, 어마어마한 풍파와 잔혹한 피의 운명을 그 작은 몸에 지고 태어난 아기, 유평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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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의 승낙은요?”
‘황상의 다리 절단수술을 당장 시행하라’는 명령서를 갖고 직접 찾아온 페로에게 니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내가 설득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페로가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눈치채지 못할 니사가 아니었다. 명령서에는 내명부 수장인 세네피스 황태후와 실리페 태후, 그리고 4비빈의 서명이 모두 있었지만 아메스의 서명 부분은 어딘지 어색했다. 하지만 니사는 짐짓 모른 척 명령서를 받아 한쪽에 철해 놓았다.
“언제 할 거지?”
“당장 해야죠. 어차피 준비도 다 끝나 있으니.”
페로의 물음에 니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냉큼 대답했다. 평소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페로답지 않게, 오늘은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니사는 그의 축 처진 모습을 뒤로하고 급히 카렐의 처소로 향했다.
이미 수술 준비가 다 갖추어진 카렐의 처소 앞에는 아메스를 제외한 비빈들과 세네피스 황태후가 창백해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밀리타가 사뭇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비단 보자기로 잘 싸 놓은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니사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밀리타와 무어라 귀엣말을 주고받던 세네피스 황태후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니사의 기척을 느낀 밀리타는 그의 눈치를 잠시 살피고는 세네피스에게 말을 이었다.
“저희 상공조합 산하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한 면역제제입니다. 유전적 결함으로 인한 면역 저하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수소문해서 구했습니다. 아직 임상실험도 끝나지 않은 신약이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하니........”
“이게요?”
니사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하며 밀리타의 손에서 상자를 냉큼 받아들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갖가지 색을 지닌 20여개의 주사약병이 가득 꽂혀있었다.
“열 번 투여할 분량입니다. 아직 실험실 수준이고 상용화는 어려운 단계입니다. 그렇다보니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 이 이상은 어렵습니다.”
“열 번?”
창 안의 카렐을 돌아본 세네피스가 갑자기 커진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실험실이라니, 그러니까, 무슨 뜻이야? 이걸 써도 안전하다는 거냐?”
“그럴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 정도면 일단 큰 고비는 넘기기에 충분할 겁니다.”
밀리타가 이런저런 전문지식을 줄줄이 나열해가며 설명을 했지만 세네피스로서는 알아들을 수도,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세네피스가 언성을 높였다.
“왜 이걸 이제야 가져온 거야! 상께서 저리 되신 걸 알았으면 바로 그날부로.......”
“송구하옵니다. 폐하께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안전성에 관해 연구소에 문의하느라 시일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황태후 폐하와 비빈분들께서만 알고 계시고, 외부에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셨으면 하옵니다. 아니면 소인의 입장이 무척 난처해지오니 제발 부탁이옵니다.”
‘비밀’이라는 말에 세네피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동생 때문인가? 자네가 이걸 가져온 게 알려지면 남동생 말고 자네에게 비빈위가 돌아올지도 몰라서?”
밀리타는 ‘그건 절대 아닙니다.’라는 말이 입가에서 빙빙 맴돌았지만 참기로 했다. 그는 세네피스가 멋대로 넘겨짚은 것을 사실로 그냥 생각해주기를 바라며 일단 입을 다물었다.
“절단수술은 잠시 미뤄도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레즐린 부장님. 폐하께서 소생하신다면 모두 부장님의 덕분입니다. 부장님이 같은 의사시라는 것이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니사가 재빨리 끼어들며 밀리타에게 슬쩍 눈웃음을 던졌다. 세네피스는 카렐이 당장이라도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밀리타를 덥석 끌어안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 황빈 솔과 베아트릭스까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영웅’ 밀리타의 공을 치하했지만 황비 네페티만은 묘하게 의심이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가벼운 포옹만을 청했을 뿐이었다.
“함께 들어와 정확한 처방에 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니사와 밀리타가 함께 위생복으로 갈아입고 카렐의 병상에 다가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사뭇 긴장된 표정을 지켜보았다. 니사는 밀리타에게 기꺼이 ‘첫 주사’의 역할을 양보했고, 밀리타는 ‘전직’ 의사답게 주사기에 약병을 능숙하게 끼워 넣고 의식을 잃은 카렐의 혈관에 가져갔다. 주사약이 흘러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솔이 긴장했는지 손톱을 깨물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웬만해서는 세네피스에게 말을 걸지 않던 네페티가 웬일로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작은 소리로 먼저 말을 건넸다.
“뭐가 말인가.”
“갑자기.......오르마즈 님 말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 건........”
순간 세네피스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그는 대번 이를 드러내며 네페티를 쏘아보았다.
“네년이 그때 이야기를 할 자격이나 있나?”
세네피스의 적대적인 응대에 네페티가 잠시 당황했지만 그는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흥분할 때가 아니니 제 이야기부터 먼저 들어주십시오.”
“들을 것도 없다, 네가 뭐라 말하려는 건지는 나도 이미 아니까.”
“그때도 정체불명의 의사들이 그분의 병을 고치겠다고 나섰었죠. 처음에는 그들의 처방이 효과가 있었지만........”
“스메르디스, 오타네스, 니딘투벨, 그 세 놈 말이냐.”
세네피스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 같은데? 이건 황족 전체에게 덮친 재앙이지 황상만을 노렸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괜히 확대해석하는 이유가 뭐지? 저 안에서 황상을 구하고 있는 두 사람이 모두 북부 출신이라서 그러는가? 아니면, 밀리타 레즐린 부장이 내명부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 괜한 투기를 하는 것인가?”
네페티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물론 세네피스가 말한 이유로 의심을 품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로서는 나름대로 꽤 진지한 숙고 끝에 나온 의견이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신약을 들고 나타난 것도 그렇고.......”
네페티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카렐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에 휩쓸린 세네피스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내 상께서 나으시면 밀리타 레즐린 부장을 귀인으로 새로이 내명부에 들일 것을 건의해 볼 생각이야.”
자신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는 세네피스에게 순간 화가 돋은 네페티 역시 결국 감정섞인 대꾸를 하고 말았다.
“태후 폐하께서 ‘평민 따위’를 내명부에 들일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로 뜻밖입니다. 그런데 상께서는 그 동생인 이라즈 노에누스 경을 더 맘에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나 어쨌든 이번 일에 대한 공은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라즈인가 하는 그놈이 뭐 한 게 있다고.”
“오호, 그러신가요. 소녀가 황상보다 100살 가까이 많아서 안 된다 말씀하시던 태후 폐하 아니셨던가요? 저 밀리타라는 여자의 뒷조사는 해 보셨습니까?”
“뭐라고?”
“저 여자의 나이는 알고 계시겠죠? 돌아가신 투르케스크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이더군요. 다하카르 간택자 출신이고, 지금 남극성당 자리에 있던 다하카르 교단 부설 신학교와 의학교 수석 졸업생이더군요.”
‘간택자’라는 말에 세네피스가 대번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당시에 간택은 누구나 나이가 되면 받아야 하는 의무였고, 일단 간택되면 중등교육은 신학교에서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는 것도 모르나? 졸업한다고 무조건 성직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오르 언니는 물론이고 그대의 시어머니인 나 역시 간택자였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소리인가?”
세네피스가 네페티를 째려보며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아, 멀리 갈 것도 없군. 그대의 전 남편 테번이 악질적인 교단 하수인이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이고, 그대의 친정 플레렌 가 역시 대대로 교단 고위 성직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 아니었던가?”
“저 여자의 전력이 ‘공직자’로서 특별히 흠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명부에 들어가기는 행여 문제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뜻이지요. 특히 서부 출신 유학자들이 반발하기에 충분한 명분이지요.”
세네피스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말은 ‘서부 출신 황비’로서 간택자 출신 황태후, 그리고 그가 중용하고자 하는 북부 세력에 대한 틀림없는 ‘도발’이었다.
세네피스가 비웃음어린 투로 대꾸했다.
“한때 오르 언니를 좋아했다는 그대가 이젠 답답한 서부 먹통들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것인가? 호오, 사막에 버려졌다가 황상 덕택에 구사일생했던 것은 벌써 잊었나보지? 저승에 계신 언니께서 대성통곡을 하시겠군.”
“그분의 친동생께서 그분의 적이었고, 당신 가족을 수용소에 몰아넣은 교단과 관계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중용하시는 것이 더 이상한걸요.”
부아가 난 네페티 역시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밀리타의 전력을 둘러싼 두 사람의 신경전이 어느새 북부와 서부간의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져 있었다. 그 사이, 주사를 마친 밀리타가 위생복을 벗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약이 제대로 효과를 보인다면 며칠 내로 눈에 띄게 호전되실 것이니 이제 안심하고 기다리시옵소서.”
밀리타는 이번에도 세네피스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세네피스는 함께 있는 네페티에게 보란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이번 일이 좋은 결과로 마무리된다면 따로 감사를 표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상께 모든 충성을 다 바쳐주게나.”
“황공하옵니다.”
밀리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기분이 상한 네페티는 그 광경에서 눈을 뗀 채 창 한쪽에서 카렐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심어린 시선은 여전히 밀리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잠깐씩이나마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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