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5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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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미르는 자신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숨바꼭질처럼, 독한 항생제를 쓰면 잠시 가라앉았던 병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의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면역력을 강화시킨다는 갖은 약품도, 시술법도 그에게는 모두 쓸모가 없었고, 그저 고통만 연장시킬 뿐이었다.
그의 병세가 악화되고 지도력이 흔들리면서, 그의 위세에 눌렸던 강경파들은 또다시 제 세상 만난 듯 설쳐대고 있었다. 사실 샤미르는 하루 중 대부분을 약기운에 취해 의식조차 찾지 못할 지경이었고, 이제 웬만한 서류의 결재조차도 민병대 사령관이며 강경파 수장인 헤크마 원수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 무섭던 ‘핏빛 비수’ 샤미르의 공포어린 치세도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수립’이라는 그의 웅대한 계획에서 조금씩 멀어져가며 이제 그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마즈에게 ‘평화로운 세상의 첫 번째 총리’자리를 주겠다던 그의 다짐 또한 다음 정권, 혹은 그 다음 정권에서나 가능해질 허망한 꿈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건강한 몸을 갖고 다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일 뿐이야.”
어느덧 많이 부른 유레트의 배를 보며 샤미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지만, 그는 ‘유평은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 준 건강하고 새로운 육신’일 것이라는 환상에 기대 지금의 고통을 하루하루 이겨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샤미르를 찾아온 유레트는 슬픈 눈동자를 가만히 뜨며 유리벽 너머 해골처럼 여윈 얼굴로 힘없이 누워있는 아이 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그의 두 눈에는 이전 같은 맑고 초롱초롱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심한 폐렴과 기관지염으로 거의 기능을 잃은 기도는 굵은 파이프와 펌프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상황이었고, 망가진 간과 신장 또한 기계가 대신하는, 있으나마나한 기관이 되어 있었다.
유레트 역시도 샤미르가 이 상태로 얼마 견디어주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샤미르의 죽음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딸의 미래, 혹은 생사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아니, 어차피 샤미르는 이미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종이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울 것 없다.”
샤미르가 유레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날 남자로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그저 어쩌다가.......둘의 피가 같이 섞인 아이를 가지는 인연을 가졌을 뿐이지. 그래, 과정이야 어쨌든.......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준 네게 내가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다는 건 알아다오.”
유레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유리벽에서 고개를 돌렸다. 언뜻 매정하게 들렸지만, 샤미르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우는 것은 샤미르를 사랑해서가 아니었고, 이 여린 청년의 죽음이 아마도 자신 때문일 것이라는 죄책감, 그리고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의 미래에 대한 한 어머니로서의 걱정 때문이었다.
“마시야스의 가족들과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냐?”
유레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던 샤미르가 이를 빠득 갈았다. 바로 며칠 전, 마시야스의 부인 테나스 이그나토 부인이 아들 쌍둥이 에지드, 후사인을 낳으면서 가문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쪽에 쏠려 있었다. 물론 샤미르도 그가 친자식만큼이나 유레트와 그 아이를 아껴주기를 바라는, 그런 바보같은 기대를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빌어먹을.”
샤미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시야스가 처음부터 유레트를 박대한 것은 아니었다. 샤미르의 위세가 그럭저럭 뻗쳤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유레트를 가족모임에 데려가기도 했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도 동행하곤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유레트가 ‘술집 윤락녀 출신’이라는 것이 갑자기 밝혀지면서 모든 상황이 돌변하고 말았다. 모임에서 유레트를 알아본 입 가벼운 장교 한 명이 주변에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마시야스로서도 일단 퍼진 소문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물론 샤미르는 이것이 유레트를 쫓아내기 위해 마시야스가 꾸민 자작극일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갖기도 했지만 별다른 증거는 없었다.
게다가 그를 지켜주어야 할 샤미르의 병세까지도 악화되면서, 유레트에 대한 마시야스의 구박은 나날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유레트는 ‘첩’이 아닌, 가정부가 되어 하녀들과 함께 집안일을 해야만 했고, 식사와 잠자리 또한 그들과 해야만 했다.
게다가 명문가 영애 출신인 본처 테나스는 특별히 아이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더럽거나 힘든 일’에는 손끝하나 대기도 싫어했다. 그렇다보니 그가 낳은 장남 오렌과 갓 태어난 쌍둥이 형제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것 또한 이미 만삭이 가까워 몸도 무거운 유레트가 혼자 다 해야만 했다.
마시야스가 한때 자신을 버렸던 강경파들과 다시 손잡았다는 첩보도 이젠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고, 샤미르의 죽음을 대비해 강경파들이 멋대로 내각까지 짜 두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샤미르도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저 빌어먹을 동생을 손봐주어야겠다고 매번 마음을 고쳐먹곤 했지만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유레트가 문제였다. 자칫 일이 잘못되거나 마시야스가 못된 맘을 먹기라도 한다면 유레트와 아이에게 자칫 치명적인 결과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보니 평소 단호하던 샤미르조차도 이번만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어.......부탁이 있는데요.......”
유레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시야스 님하고 함께 있느니 전처럼 여기서 샤미르 님을 계속 모시고.......”
양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힌 유레트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샤미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무균실은 임산부에게 무척 나쁘다고 들었다. 소독약도 태아에게는 치명적이고.”
“알아요, 하지만.......”
유레트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일단 돌아가 있어라. 내 새로이 있을 곳을 찾아봐 줄 것이니.”
“이젠.......갈 데가 없어요.”
유레트가 입구 부근에 놓여있는 짐가방을 가리키며 훌쩍였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샤미르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냐?”
유레트의 대답이 굳이 없이도, 샤미르는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남편, 아니 명목상의 남편인 마시야스에게 쫓겨난 유레트는 유리벽에 기대 계속 울고만 있었다. 샤미르의 혈압이 갑자기 올라가면서, 그의 바이탈사인을 나타내는 기계가 요란스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씨발, 그 개새끼가 감히........”
샤미르가 이를 갈며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경보가 울리면서 안에 상주하던 의사가 허둥지둥 달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흥분한 샤미르가 유레트에게 손을 뻗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갑자기 호흡이 막혔는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가요! 나가!”
의사가 주사기를 뽑아들며 유레트에게 빨리 나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머뭇거리던 유레트는 샤미르가 온몸을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에 순간 당황해 허겁지겁 짐가방을 들고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짐가방을 든 채 옥상에 혼자 선 유레트는 한때 자기가 꾸몄던 노란 수선화 꽃밭을 돌아보며 젖은 눈가를 훔쳐냈다.
“이제 어떡하지.......”
하늘은 야속하리만큼 맑고 청명했다. 임신 7개월을 넘어 8개월이 가까워오는 배가 이렇듯 무겁게 느껴지기도 처음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가난한 가족들에게 부른 배를 하고 돌아갈 면목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 그리고 뱃속의 아기가 ‘시한폭탄’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가족들까지 끌어들여 그들 모두를 위험에 몰아놓고 싶지는 않았다.
멍하니 서 있던 그는 꽃밭 옆의 작은 벤치를 돌아보았다.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저곳에서 자신의 어깨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던 한 사람, 비록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주지 않았지만 그와 아이를 이 험한 전쟁터에서 지켜줄 수 있을,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빈자리까지도 대신해줄 수 있을 단 한 사람의 얼굴이.
유레트는 짐가방을 끌고 무거운 몸에 다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바쁜 걸음걸이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동기 즈바크에게서 샤미르가 심각한 쇼크로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민병대 특무대장 베흔 소장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샤미르가 의식을 잃은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짐가방을 든 유레트가 샤미르의 처소에까지 가서 울었다는 것을 보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그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속 좁은 새끼, 역시 형 만한 재목은 못 되는군.”
잠시 코웃음을 치던 그는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문 너머, 멀리 궁전 출구 쪽에 자그만 키의 임산부 한 명이 무거운 가방을 끌고 어디론가 바삐 걷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제 손으로 없애버리면 차라리 나았을걸. 그 정도도 생각을 못 했을까. 아니면 모질지 못한 건가.”
“무슨 소리야? 지금 마시야스 그 새끼 얘기하는 거야?”
즈바크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지도자가 저 아이의 안전을 너한테 맡겼다며?”
“뭐, 그렇기야 하지.”
베흔이 키득대며 대답했다.
“그런데, 넌 다 죽어가는 지도자 꼬랑지 붙들고 마지막 충성을 불사르고 싶냐?”
베흔의 물음에 즈바크가 잠시 움찔했다.
“어차피 저 아이가 대를 잇기는 틀렸어. 지도자가 빤히 눈 뜨고 있어도 제대로 수습 못 한 내분을 저 갓난 핏덩이가 어쩐다고. 솔직히 안 죽고 태어날 수나 있어도 다행이지.”
베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즈바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럼 어쩌게?”
“우리 8그룹도 슬슬 살 길을 찾아야지.”
“강경파 놈들하고 손잡는다고?”
즈바크의 성급한 물음에 베흔이 혀를 끌끌 차며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 차려. 그놈들하고 우리는 근본적으로 갈 길이 달라. 아무리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최소한 ‘원칙’이라는 게 있어야 권력이든 국가든 오래 갈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럼?”
즈바크의 물음에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전혀 엉뚱한 혼잣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때로는 누구도 생각 못 한 데서 동지를 찾을 수도 있는 법이지........”
물어물어 힘겹게 길을 찾아온 유레트는 옛 남극성당 뒤, 자그만 언덕에 자리잡은 허름한 집 한 채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단출한 2층의 주택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글자가 쓰인 나무간판이 기둥에 매달려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 밑에는 ‘터번 마이뉴’라는 공용어가 친절하게 쓰여 있었지만 언뜻 그다지 술집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한 데 술집을 만드셨네.......”
사실 유레트 생각에도, 술집이 자리잡기는 꽤나 한심한 입지였다. 언덕 아래, 폐허가 된 남극성당에서는 ‘유학 교육기관’으로의 변신을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사람도 많았지만 어지간히 건강에 자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 이곳까지 힘겹게 술을 마시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유레트는 조금씩 저려오기 시작한 다리에 마지막으로 힘을 내 술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몸으로 산길을 오르는 임산부의 모습이 안 되어 보였는지, 군인 한 명이 그의 짐을 들어다 주었지만 이곳부터는 그의 책임이었다.
“어서오세.......”
손님에게 인사를 올리려던 노파는 누추한 몰골에 배가 잔뜩 부른 임산부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술집 안쪽을 급히 돌아보았다. 대낮부터 술을 먹고 있는 손님이 두 사람 있었지만 가게 안은 썰렁했다.
“사, 사장님.......”
노파의 목소리에 제일 안쪽, 큰 안락의자에서 웬 담배연기가 훅 뿜어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의자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건 등까지 늘어진 긴 다갈색 머리칼의 키 큰 여자였다. 문득 유레트를 돌아본 그 여자의 무지개톤 회색빛 눈동자가 마치 물결치듯 가늘게 떨렸다.
“오르마즈님?”
갑자기 든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지쳐서인지, 유레트는 온몸의 힘이 갑자기 풀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가방을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이런.”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오르마즈는 물담배를 급히 끄고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유레트는 가방도 내버려둔 채 오르마즈에게 급히 다가서서는 멍하니 서 있던 그의 가슴을 다짜고짜 껴안았다.
“후우.......”
오르마즈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떨리는 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먼지투성이의 거칠어진 머리칼, 갈라진 손과 부르튼 얼굴을 한 유레트는 ‘고귀한 혈통을 뱃속에 간직한 산모’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의 보름 가까이를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굶주려가며 이리저리 차를 얻어 타고 찾아온 그의 몰골은 언뜻 길바닥의 거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유레트가 오르마즈의 넓고 든든한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낮게 흐느꼈다.
“저를.......아니, 제 아이를 지켜주세요, 제발........”
오르마즈는 이번에도 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다만 그의 거칠어진 머리와 뺨을 따뜻하게 매만져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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