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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91화 (490/1,132)

< -- 491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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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자리에 앉은 제파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평소 양과 소가 뛰어다녔을 이 비탈진 초지에도 가는 눈발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양가죽으로 지붕을 씌운 허름한 천막 밑에서 마주한 제네르와 제파는 잠시 묘한 눈빛을 나누었다. 제네르는 회담장에 나온 그의 눈빛이 첫 만남 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양쪽에서 2명씩의 수행원만 제외하고 모두 멀찍이 물러났다. 제네르의 곁에는 시로와 아메샤 스펜타의 호위가디언이, 그리고 제파의 곁에도 공평하게 시민 출신의 근위대 참모, 그리고 가디언 1명이 눈을 부릅뜨고 서서 서로를 지켜보았다.

“조금 전 들어온 대장의 최후통첩을 전하려 한다.”

제파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시로를 힐끔 올려보았다. 그의 눈짓에 시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최후통첩?”

“대장은 바깥의 1만군 전체, 아니 이곳에 있는 1만5천이 모두 몰살당하더라도 너희의 가짜황제 카렐이라는 미친년에게는 절대 자비를 보이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년은 반드시 산 채로 잡아 황궁 앞에서 내장을 발겨놓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네르 하크로딘 네년도 다시 붙잡아 지하 12층에서 산 채로 갈아서 죽이겠다고 다짐하셨다.”

제파의 험악한 표현에 제네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파의 지금 표현은 회담장에서 쓰기에는 무척이나 어색한 것이었다. 그것도 회담을 하자며 나온 사람이 시작부터 욕만 한다는 것도 어딘지 이상했다. 제파는 이번엔 시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반역자 시로 네놈은 광장에 내놓고 산 채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하셨으니 단단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다.”

‘이놈이 무슨 생각이지......’

무언가 생각하던 제네르는 탁자 밑으로 손을 내리는 척, 뒤에 있는 시로에게 손짓을 보냈다. 제네르의 심상치 않은 손짓에 시로가 긴장하며 손을 풀었다. 제네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듯 보였다.

“으읍?”

탁자 밑을 똑똑 두드리던 제네르는 제파가 자신의 손가락을 탁 치는 느낌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하지만 탁자 밑에서 맞닿은 제파의 손끝은 그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이놈이!”

제네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제파의 멱살을 확 움켜쥐었다.

“이 개새끼가 기껏 살려주려고 회담하쟀더니 뭐가 어째?”

제네르에게 멱살이 잡힌 제파는 짐짓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파를 따라온 2명의 수행원들 역시 험악해진 분위기에 놀란 듯 급히 무기를 움켜쥐었다. 시로와 함께 온 가디언 역시 뒤질세라 무기를 치켜들었다.

“이년이 미쳤나!”

제파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며 제네르의 옆구리를 향해 내질렀다. 순간 회담장은 비명소리와 흥분한 무장들의 고함소리로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단검에 옆구리를 베인 제네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시로가 악 소리를 지르며 제파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뭐야!”

제파가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단검으로 시로의 묵직한 도끼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단검에 맞아 미끄러진 시로의 도끼가 제파의 어깨 한쪽을 베어내면서 피가 벌컥 솟구쳤다.

“악!”

근위대측에서 나와 있던 가디언이 이번엔 제네르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이번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아메샤 스펜타 가디언이 급히 막아섰다. 그리고 근위대 참모의 공격 역시 제네르가 넘어지며 휘두른 칼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고작해야 2, 3초 동안에 벌어진 이 짧은 충돌은 제네르의 ‘사전 대비’ 덕분에 순식간에 동맹군 쪽으로 기울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회담장의 느닷없는 난투극에 놀란 양측 병사와 가디언들이 비명을 지르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맹군측의 기병들과, 근위대측의 전차, 가디언들이 조용하던 이 산허리를 뒤흔들며 사방에서 고함을 질렀다.

“이 새끼!”

시로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던 제파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목에 칼을 가져갔다.

“더 이상 접근하면 너희 대장의 모가지가 잘리는 꼴을 보게 될 거다!”

시로의 고함소리가 이 산허리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회담장을 향해 돌격해오던 근위대들은 제파의 목에 들어온 단검 날을 보고는 당황한 듯 급히 자리에 멈춰섰다. 개전 이래, 회담장에서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담 따위는 없던 일로 하겠다! 그러니 당장 물러나!”

시로는 제파의 목에 칼을 댄 채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제파의 수행원과 산자락 쪽의 근위대 병력들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제네르 역시 아메샤 스펜타 가디언의 호위를 받으며 조심스레 뒷걸음쳤다. 시로가 제파를 끌고 가는 모습에 놀란 근위대들이 악을 썼다.

“대장님을 당장 풀어주지 못해! 이 비겁한 새끼들아!”

“회담을 망친 건 네놈들 아니냐! 네놈들을 어떻게 믿고 풀어주냐!”

“먼저 덤빈 건 네놈들이잖아!”

얼떨결에 ‘포로가 된’ 제파는 자신의 목에 와 닿은 예리한 단검 날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나란히 물러나는 제네르에게 살짝 눈짓을 보냈다. 제네르는 갑옷 틈새, 단검이 베고 지나간 상처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잠시 비틀거렸다.

“상장군님! 상장군님!”

아메샤 스펜타의 가디언이 뒤로 쓰러지려는 제네르의 겨드랑이를 허둥지둥 안았다. 특등급 가디언의 일격에 베인 상처는 아무리 ‘미리 짠’ 각본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깊었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아랫배를 거쳐 왼쪽 다리까지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으윽.......”

제네르가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꽉 악물었다. 산허리 초지를 마주하고 날카롭게 대치한 양군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군가의 순에 붙들린 채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두 명의 지휘관, 제네르와 제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데마반드 분지의 근위대가 연합군의 상륙 성공 여부에 목숨이 걸린 채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그 시간, 두 번째 상륙전 예정일을 통보받고 한창 바빠야 할 헤즈 플라칼 경은 전혀 엉뚱한 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니까, 루시도프하고 릴라크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어느새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플라칼 가 종장 카나르 경은 고개를 푹 숙여 붙인 장남 헤즈를 무섭게 몰아붙이던 참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네 동생 가족이 행방불명된 게 언젠데, 큰형이라는 네놈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카나르 경은 막사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제국의 손꼽히는 전사가문의 종장답게, 카나르 경 역시 젊은 시절 제국을 호령했던 용맹한 기병장교 중의 하나였다. 비록 5차 혼란기 이후 군무를 모두 장남에게 넘기고 영지 운영에만 힘쓰고 있지만 냉철하면서도 단호한 성격, 그리고 우람한 체구에서 뿜어나오는 당당한 기백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가문 무장들을 고함 한 번에 덜덜 떨게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한숨을 푹 내쉰 헤즈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시다시피 가문 근위기병들을 모조리 풀어서 숙영지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아무 흔적도.......”

헤즈가 무서운 아버지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아버지의 불같은 역정뿐이었다.

“지금 우리 가문만 나서서 될 일이냐? 제롬 그놈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지 근위기병대장이 행방불명되었는데 뭐라도 행동을 좀 보여야 할 것 아냐? 왜 우리 가문만 미친놈들처럼 이래야 되는데? 게다가 우리 보병들은 빌어먹을 늑대섬인지 개섬인지에 갇혀 있으니 그놈이 대신 나서 줘야 할 것 아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어제부로 가문 병력 전원이 이 섬에 보내져서 이제 더 이상 수색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후방에 있는 다른 가문을 설득해서 수색작업을 대신 진행하도록 해 주시면........”

헤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막내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갓난 손녀의 행방불명 소식에 이틀째 식음까지 전폐했던 카나르 경은 해쓱해진 얼굴에 대번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어린 것까지 데리고 나갔는데 가족이 모두 나쁜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려고.......”

조심스레 눈동자를 움직인 헤즈는 아버지의 그 매섭던 눈꼬리에 어느새 눈물방울이 맺힌 것을 처음 보았다.

“릴라크 제수가 용맹하고 똑똑하니 함께 있다면 큰일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진정하시고.......”

헤즈 역시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루시도프는 플라칼 가 사람답지 않은 유순한 성격 탓에 아버지 카나르 경의 구미에 맞는 아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며느리 릴라크는 서글서글한 성격과 유능함 덕분에 시아버지 카나르 경이 ‘친자식 열 놈보다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터였다.

게다가 그의 손자 대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딸이 귀한 탓에, 그는 ‘손녀 하나만 얻으면 대륙 하나 통째로 얻은 기분일 거야’라며 항상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런 시아버지에게 너무도 예쁜 ‘첫 친손녀’를 안겨 준 것도 릴라크였다.

그렇다보니 카나르 경의 며느리와 손녀사랑도 그 우락부락한 인상이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각별했다. 오죽했으면 릴라크가 딸을 가졌다는 소식에 ‘여자아이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야 건강하고 예쁘게 큰다’며 루시도프에게 가문 영지 중 가장 온화하고 비옥한 예리반의 주지사 자리를 덥석 내 주고, 남극성당에서 돌아와 손수 아이를 돌보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헤즈가 한참만에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제롬 공도 이번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도하 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어서인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가문 병사들이 모두 이 섬에 파견되어 있는지라 다른 가문 근위병들을 좀 빌려달라고 했지만 역정만 내고.......”

카나르 경은 머리를 싸쥔 채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 개새끼, 도대체 우리 가문을 언제까지 자기네 종 취급 하려는 건지.......”

눈물자국을 애써 닦아낸 카나르 경은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 도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냐.”

“지난번보다는 수월하겠죠.”

헤즈는 조금은 자조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5만의 보병이 한 번에 몰아붙일 테니 놈들도 이번에는 힘들 겁니다. 지난번에야 어쩔 수 없는 축차투입 때문에 피해가 컸지만.......”

헤즈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헤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서 베테랑 병사와 무장들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나도 안다.”

“포로가 된 놈들을 다 돌려받고 부상자들을 복귀시키면 어느 정도 만회는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가문에 큰 타격이 될 것 같습니다.”

카나르 경은 이번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황도 공성전에서만은 우리 가문을 빼 달라고 부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제가 이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아버지께서 직접 델루지 가에......”

카나르 경이 이를 꽉 악무는 모습에 헤즈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카나르 경은 무언가 다짐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직접 황제령에 가 봐야 하겠다. 설마 종장인 내게 전장에 서라고야 하지는 않겠지. 종가 근위기병 2백 정도도 데려가마. 제롬 그 새끼도 직접 만나 볼 겸.......루시도프 녀석 없어졌다는 곳을 내 직접 뒤져봐야 하겠다.”

헤즈는 부쩍 주름이 늘은 아버지의 얼굴을 문득 돌아보았다. 카나르 경 역시 수명개조 후세대였지만 그 많은 혼란기를 다 거치면서 갖은 못 볼 꼴을 다 보아와서인지, 그 오랜 세월의 풍파가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저 양반도 많이 변하셨군.’

헤즈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통신을 끊었다. 어두운 창밖으로는 7일 후 상륙전을 전개할 욱리하의 동쪽 강안이 희미하게 보였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헤즈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강 건너편, 조만간 자신들이 디뎌야 할 곳의 지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니, 욱리하의 동쪽 강안에서 상륙하기에 가장 고약스런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변의 얼어붙은 습지에는 사람 키보다도 훨씬 큰 갈대가 빽빽하게 자라 있었고, 그 너머에는 제법 가파른 비탈과 2개의 산이 내륙과 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실 늑대섬으로 온 것부터가 워낙 다급하게 결정된 것이었다 보니 헤즈 역시 이후의 상륙작전에서의 있을 어려움 따위는 미처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별 거 아냐.”

헤즈가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후의 공격은 제발 지난번 같은 ‘돌발사건’이 없기를 기원하며 잠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버지 카나르 경이 하루라도 빨리 와서 동생 부부도 찾아내고 곤경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 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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