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9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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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리하의 전투를 정리하고 잠시 숨을 돌린 동맹군 지휘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근위대를 막으러 떠났던 제네르의 연락이었다.
욱리하에서 전투가 벌어질 동안 후방에서 근위대가 접근해 올 것을 미리 예상한 카렐은 제네르에게 1만의 아메샤 스펜타와 5천의 기병대를 ‘별동대’로 주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후방으로 오는 근위대를 저지해라’ 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던 터였다.
“탄현성을 출발해 우리 후방으로 접근해오던 2만 5천의 근위대는 샤마시 평원 중앙의 데마반드 분지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었습니다. 원래는 적들이 탄현성으로 다시 퇴각하려 했지만 기병대가 재빨리 우회 기동해 퇴로를 차단해서 적들을 분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제네르의 보고에 무장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욱리하변의 전투에서 남-동부연합군이 결국 도하에 실패하면서, 동맹군의 후미를 치러 오던 근위대까지도 졸지에 평원 한중간에 고립된 셈이었다.
“데마반드 분지면 소탕이 쉽지는 않겠군. 샤마시 평원에서 유일한 산지이고 기병의 기동이 쉽지 않은 곳이니.......”
이런 경사스러움 속에서도 카렐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채 걱정부터 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상처를 입은 얼굴과 팔에 일단 간단한 응급처치를 한 그는 유리벽 너머에 힘없이 누워 아랫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제파 정도면 전황 소식을 전해듣고 바로 목표를 바꾸었을 겁니다. 지금 근위대에서 베흔에 이어 가장 뛰어난 야전 무장이니까요.”
동맹군 총사령관 페로가 1번 도시의 지도에 근위대의 진격로를 표시하며 말했다. 카렐의 부상 소식에 에우테르를 당장 찢어죽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던 그도 이제 조금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일단 함정에는 몰아넣었고.......이제 대대적인 공격을 해서 몰살시킬지, 아니면 계속 포위상태를 유지하면서 목줄을 조일지가 관건이군요.”
제네르가 페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런 중요한 사안은 폐하께서 직접 결정하실 문제로 보입니다.”
베아트릭스는 무어라 입을 열려는 페로를 살짝 가로막으며 선수를 쳤다. 그는 황제에게서 무슨 말을 바라는 듯 유리벽 안을 돌아보았지만 정작 카렐은 회의를 하다 말고 마치 조는 듯, 고개만 까딱거리고 있었다.
“폐하?”
“으, 응?”
잠시 정신을 잃었던 카렐이 붉어진 눈을 번쩍 뜨며 다시 밖을 돌아보았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니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나가 있으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릴라크 예리노프 경의 상태는 어떻지?”
카렐의 방에서 일단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페로는 무거운 분위기를 일단 가라앉히려는 듯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페로의 물음에 보안국장 루토가 냉큼 대답했다.
“많이 안 좋습니다. 일단 경보병연대 야전병원에서 응급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황도로 이송하지 않으면 본수술은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길래?”
제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릴라크에게 벌어진 사건을 보고받고 동맹군에서 제일 놀란 것이 바로 그였다. 전장에서 유달리 자주 만날 수밖에 없던 인연인지, 악연인지, 그는 자신과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는 그 냉소적인 여자 무장에게 단순한 ‘라이벌’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팔은 일단 일부를 찾아내 접합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회복까지는 몇 달은 걸릴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딸의 이름을 찾는다고는 합니다만 사실상 의식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머리와 목과 허리가 모두 부러져서 거의 시체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왜 아직까지 황궁에 안 데려오고? 신경외과 권위자인 니사 라말라 박사가 여기 있는데!”
제네르가 마치 자기 친구의 일처럼 화를 버럭 내자 당황한 루토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생명 유지 장치에 기대 겨우 살아있는 형편이라 이송이 쉽지 않습니다. 이송하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지난번 적들이 늑대섬을 장악한 이후로 황도 이북의 욱리하 수로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지라 도하가 어렵습니다.”
또다시 화를 내려는 제네르를 페로가 얼른 가로막았다.
“그런데, 듣자하니 그 남편이 황도로 오는 걸 거부한다며?”
“예. 처가인 예리노프 가가 있는 5번 도시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더군요. ‘투항’할 뜻은 없고 그저 인도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니 황궁으로 이송하지 말고 황도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본가인 플라칼 가에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그 새끼 순진한 건가 멍청한 건가.”
페로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예리노프 가가 그 꼴이 되어서 탈영해 온 딸네미하고 사위를 좋다고 보호해 주겠군.”
“뭐,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죠.”
이번에도 릴라크 편을 든 건 제네르였다.
“릴라크 경에게 무슨 일이 있어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남편은 플라칼 가 적생자 아닙니까. 아내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남편은 당연히 ‘제일 안전한 길’을 요구하겠죠.”
“그렇다고 예리노프 가로 냉큼 보내줬다가 불미스런 일이라도 당하면 괜히 우리만 더 난처해지는 것 아닙니까.”
루토의 주장에 제네르가 피식 웃으며 대안을 내놓았다.
“황도로 오기 어렵다면 3번 도시의 페로 관으로 보내서라도 일단 억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릴라크 경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면 부부가 상의해 무언가 결정을 내릴 테니까요. 릴라크 경이라면.......틀림없이 남편과는 다른 선택을 할 겁니다.”
유달리 자신에 찬 제네르의 태도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네르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는 했지만 제네르도 그 이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돌아왔습니다.”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던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에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폐하께선 어떠신가?”
카렐의 치료를 지켜보고 돌아온 베아트릭스에게 페로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황빈’인 베아트릭스를 대하는 그의 말투에 제네르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페로 역시 ‘국구’ 신분을 겸하고 있으니 무어라 하기도 조금은 애매했다.
“열이 심하십니다. 지금 잠시 쉬고 계십니다.”
“상처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물음에 베아트릭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금 전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폐하께선 샤마시 평원의 근위대는 일단 포위한 채로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놈들 똥줄이 타게 만들겠다는 건가.”
페로가 평소같은 막말을 뱉으며 강 건너 연합군 진영과 욱리하 강물을 돌아보았다. 적들이 조금 전 차지한 ‘늑대섬’ 으로 보급품을 싣고 가던 적의 중형 수송선 중 한 대가 강 중간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배 몇 척은 이미 섬에 닿아 짐을 풀고 있었다. 적들에게도 힘들게 차지한 저 작은 섬은 생명줄과도 같을 터였다.
“데마반드 분지에서 욱리하까지 직선거리가 1천 스타디아(150km).......그래, 양쪽으로 갈려 있으니 죽을 맛이겠군.”
제네르가 지도상의 모형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퇴로를 열어주지 않는 한, 적에게는 2가지 선택뿐이겠죠. 근위대가 지금 위치에서 최대한 버티고 연합군은 최대한 빨리 도하를 재시도하던가, 아니면 후방에서 탄현성을 통해 추가병력을 보내 고립된 근위대를 구해내던가.”
“폐하께도 아마 다른 뜻이 있으시겠지.”
페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때, 우베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폐하께서 시로 대장군을 들라 하십니다.”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시로면 적장 제파의 동기였고, 근위대 시절 그 누구보다 절친했던 사람이었다.
졸지에 데마반드 분지에 고립된 제파의 심정은 참담했다. 탄현성의 근위대 원정군 3만 중 2만5천의 병력을 불러낸 그는 베흔의 명령에 따라 욱리하를 향해 최대한 빨리 서진했고, 욱리하의 연합군이 몇 시간만 더 교전을 벌여 주었더라면 동맹군의 후미를 보기 좋게 쳐서 적들을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물론 그도 제네르가 이끄는 동맹군 ‘별동대’가 자신의 부대를 필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보병과 가디언 위주인 근위대의 특징을 생각해 적 기병 기동이 어려운 구릉지를 골라 이동했고,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차량을 불러내 적들의 눈을 흐려놓았다. 물론 부대를 3개로 쪼개어 어느 쪽이 주력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병력을 분산시켰다가 재집결하고, 소부대를 미끼를 내 주기도 하고. 일부 부대는 도보로, 또 다른 부대는 차량으로, 계속 모습을 뒤바꿔가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곳까지 이동해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얼음 여우’ 제네르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제파가 던진 미끼를 단 한 번도 물지 않았고, 근위대들 혼자 분산과 집결을 반복해가며 ‘생쇼’를 벌이는 것을 평지에서 덤덤히 지켜보며 데마반드 분지까지 한나절 가까이를 계속 뒤따라오기만 했다. 이 분지만 넘어가면 욱리하까지는 지척이었고, 제파 역시도 그곳까지 공격 한 번 가하지 않은 적들의 모습에 ‘혹시 적들이 공격할 병력도 없이 눈속임만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끈기와 인내심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네르를 크게 착각한 것이었다. 한나절동안 적을 관찰하며 상대의 ‘패턴’을 파악한 제네르는 데마반드 분지 부근 산지를 막 넘어 집결하려는 그 순간을 귀신같이 포착해내 아메샤 스펜타 보병으로 돌격을 감행해왔다. 그 무렵 근위대 병사들은 한나절동안 계속해 기만작전을 펼치느라 지레 지쳐 있었고, 경계심 또한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정예 근위대들은 아메샤 스펜타의 돌격에 즉각적으로 대응했고, 초반 전황도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욱리하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당초 제파는 자신들이 제네르의 ‘별동대’와 교전을 벌이는 새 후미의 병력 중 1만 정도를 일단 욱리하로 우회시켜서 동맹군 본대의 후미를 교란할 참이었다. 하지만 욱리하의 전투가 생각 외로 일찍 끝나버리면서 우회하려던 1만의 부대는 얼떨결에 평원 한중간에 고립되고 만 셈이었다. 그들을 구하려다가는 부대 전체가 전멸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립된 1만군은 제파가 ㅤㅋㅞㄹ크 토벌군 시절부터 한참동안 정을 들여 온 각별한 부대였다.
당황한 제파는 일단 탄현성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그들이 아메샤 스펜타에 묶여있던 사이, 제네르가 직접 이끄는 기병대가 이미 후미를 차단한 후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나마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이곳 데마반드 분지 안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따라오던 수송대와 사역부대가 슈로 기사단에 약탈당했고, 후방 탄현성과의 연결로 또한 끊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부대도 분지 안팎으로 두 토막이 나 버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완전히 차단당했나?”
제파는 분지 일대를 정찰하고 돌아온 가디언 장교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장교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이런저런 메모가 가득 적힌 지도를 내놓았다.
“외곽의 큰 계곡 6개는 이미 아메샤 스펜타 부대가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나갈 곳은 남쪽의 산마루뿐입니다.”
“그리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건가.”
제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해발 10스타디아(1500m) 내외의 산맥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이 크지않은 분지는 몇 개의 큰 계곡만 틀어막으면 지상군의 이동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든든한 방어벽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몇 군데의 요충지만 막으면 근위대의 이동을 저지할 수 있기는 적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원에 있는 놈들은 여전하고?”
제파의 물음에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적 경기병들이 계속해서 집중사격을 퍼붓고 있는 모양입니다. 적들이 정면대결을 피하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제파는 막막함에 다시 머리를 싸쥐었다. 적장 제네르는 남쪽 평원에 고립된 1만을 마치 미끼처럼 완전히 포위한 채 분지 안쪽의 제파에게 ‘살리고 싶으면 나와서 한판 붙자’며 계속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제네르가 제파를 유인하고 있는 남쪽 산마루 바깥은 지평선까지도 다 보이는 넓은 휴경지였다. 기병을 5천이나 보유한 능구렁이같은 제네르를 상대로 보병 위주의 근위대가 그런 평지에서 싸우는 건 한마디로 자살행위였다.
“우리 가디언 전차대가 한 2백쯤 남았던가?”
“정확히 198대 남았습니다.”
제파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동맹군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데려왔던 5백의 가디언 전차대는 탄현성을 공격할 때 적 1군단의 ‘육탄 저지’에 말려들어 절반이 넘는 병력을 잃어야 했다. 그 덕택에 정작 필요한 지금, 그들을 동원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막막한 입장이었다.
“연합군 측에서 8일 후에 다시 도하를 시도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기술관들의 예측 결과, 그맘때면 늑대섬과 육지가 다시 얼어붙어 연결될 것이라고 합니다.”
“8일이라.......8일을 버틸 수 있을까.......”
제파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 막사 바깥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장군님! 적 상장군 제네르와 대장군 시로가 협상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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