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5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
.
.
릴라크는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도망치는 기병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는 있었지만 저 녀석에게는 도와줄 다른 기병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오기 전에 상대를 잡아야 함을 잘 아는 릴라크는 필사적으로 말을 독려하며 이 눈 덮인 사면을 무섭게 질주해 나갔다.
“서! 서지 못해!”
도망치는 기병의 겨드랑이 사이로 잠깐잠깐 보이는 강보자락에 격앙된 릴라크가 악을 썼다. 그는 눈앞의 딸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신이 얼마나 달려왔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앗!”
앞의 기병만 정신없이 쫓던 릴라크는 하마터면 왼쪽 옆의 절벽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높이만 100척(30m)은 되어 보이는 아찔한 폭포가 꽁꽁 얼어붙은 채 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약간의 경사가 있기는 했지만 한 번 미끄러져 단단하게 얼어붙은 바닥에 내리꽂히며 살아남지 못할 듯 보였다.
“여기다!”
숲을 울리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릴라크는 오른쪽 덤불 너머에게 갑자기 튀어나온 기병들에 깜짝 놀라며 급히 칼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병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역시 어머니의 힘은 위대한 건가. 나라면 아기고 뭐고 그냥 도망쳤을 텐데.”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나무 뒤에서 웬 거한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요란스런 황금빛 갑주를 차려입은 거구의 제롬은 아이를 안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기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학, 학.......”
릴라크의 뺨을 타고 마치 고드름처럼 차갑고 섬칫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거의 20여기에 가까운 기병들이 폭포 옆에 몰린 그의 주변을 빙 에워쌌다.
“맙소사.......”
릴라크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칼을 내려놓았다. 그에게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마치 목화꽃처럼 크고 포근한 눈발이 그의 어깨에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문제를 크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연합군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그러니 제발.......아기만 돌려주십시오.”
릴라크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입에서 뿌연 입김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롬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냉소적으로 물었다.
“돌려주면 뭘 어쩌게? 친정으로 가시려고?”
“어차피 제가 참전할 전쟁이 아니었습니다.......아이만 키우면서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릴라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평소 같았다면 그의 유별난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이번만은 그에게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의 딸이 제롬의 손에 있었다. 릴라크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미워하는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원하신다면........다시 종군하겠습니다........그러니.......아기만......”
“필요 없어, 나도 언제 돌아설 지 모르는 놈 데리고 있기는 싫으니까. 응? 아참, 술 남은 건 자네가 다 먹었던가? 어때? 효과 확실하지?”
운명을 직감한 릴라크가 눈을 꽉 감았다. 그는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 자신을 원망하며 이를 갈았지만, 그에게는 이제 애원하는 것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배신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버리지 않았습니까?......정말입니다. 제발.......제 말을........”
“기껏 생각한다고 가족까지 불러다줬더니 얼씨구나 하고 도망친 게 배신이 아니고 뭐냐.”
릴라크가 눈물을 닦아내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만 주십시오.......아기만 가문에 돌려보내고.......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필요 없어. 근위기병대장이 영내에서 자살하면 이래저래 시끄러워질 테고, 나도 소문 따위에 휘말리기는 싫어.”
제롬은 갑자기 바로 옆, 폭포 절벽을 가리켰다.
“그냥 여기서 죽어. 치욕스럽지 않게 처리해 줄 테니.”
제롬의 말뜻을 알아챈 릴라크의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모, 못합니다.......”
반사적으로 절벽을 내려다본 릴라크가 몸서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빨리 뛰어내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제롬이 아기를 흘겨보며 으르렁거렸다. 릴라크는 아기와 제롬을 번갈아 쳐다보며 온몸을 떨었다.
“아기는......”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히죽거리는 제롬에게 릴라크가 다시 애원했다.
“제발, 이 아기는 플라칼 가 종장님의 유일한 손녀이고 상급귀족입니다. 워낙 딸이 귀한 가문이라 그분께는 너무도 각별한 손녀입니다. 그런 손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그분께서 어찌 여기시겠습니까. 아기에게는 죄가 없으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기만 가문에 돌려주고 나면 어떤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제발.”
릴라크가 필사적으로 버티는 건 자신의 목숨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자신이 ‘실족사’로 처리된다면, 딸의 목숨 또한 제롬의 손아귀에서 보장받으라는 법이 없었다.
“정말 지겹게 떠드네.”
제롬은 아기의 뒷덜미를 한 손에 번쩍 치켜들어 절벽 위로 불쑥 내밀었다.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아기는 자신이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도 전혀 모르는 듯, 눈앞의 엄마를 향해 두 팔을 내밀며 방글방글 웃었다.
“네 발로 뛰어내리지 않으면 이 핏덩이가 산산조각나는 꼴을 먼저 보게 될 거야.”
제롬이 릴라크를 놀리듯 아기를 마치 장난감처럼 공중에 흔들었다. 그런 딸을 쳐다보는 릴라크의 표정은 어느새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기에게 정신이 온통 팔려있던 릴라크는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온 무서운 위협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걸렸다!”
“아악!”
등 뒤의 살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던 릴라크는 머리 옆을 내려찍는 지독한 고통에 순간 비명을 질렀다. 그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두 번째로 들이닥친 육중한 칼날이 그의 오른팔을 어깨부터 무참히 내려찍었다.
“이, 이........”
메이스에 얻어맞아 머리 한쪽이 쩍 갈라진 채 잠시 멍하니 있던 릴라크는 피로 완전히 뒤덮인 눈을 천천히 부릅뜨며 제롬을 노려보았다. 목을 찔린 그의 말 역시 앞발부터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조금씩 중심을 잃은 릴라크는 팔이 떨어져나간 오른쪽 어깨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눈바닥 위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뛰랄 때 뛸 것이지.”
치명상을 입고 눈 위에 쓰러진 릴라크를 잠시 내려다보던 제롬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손에 든 아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아기가 갑자기 악을 쓰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시끄럽기는......”
투덜거리며 팔에 힘을 주려던 제롬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지, 뒤따라온 기병 제대장에게 아기를 불쑥 내밀었다.
“절벽 밑에 던져. 그리고 저년하고 말도 던져버려.”
“예? 아, 아기를요?”
아기를 받아든 제대장이 움찔거리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명령이라면 그대로 따르는 군인이었지만 그것만은 내키지 않는지 그는 더듬거리며 제롬에게 말했다.
“그냥 죽은 엄마하고 말만 버리고 아기는 운 좋게 구해냈다고 하면.......돌도 안 된 갓난아기를 어떻게......”
“야, 이 병신새끼야, 아기를 구해냈다면 어미 시체도 가져가야 된다는 말이잖아! 실족사했다는 며느리 시체에 칼질 자국이 있으면 플라칼 가에서 우리를 의심 안 할 것 같아? 그냥 다 죽이고 떠나는 게 안전하지!”
한참 목소리를 높이던 제롬은 앞에서 들려온 낮은 신음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이런, 씨발.......”
쓰러져 있던 릴라크가 으스러진 왼손으로 칼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더 이상 못 일어날 것으로 믿고 있던 병사들은 그의 핏기어린 눈가에 퍼지는 살기에 순간 질린 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황한 제롬 역시 얼른 말고삐를 당겨 뒤로 물러났다.
“제기랄! 저년 빨리 죽이던지 밀어 떨어뜨려! 그 새끼도 던지라니까!”
“이런 개 같은 새끼들.......내 딸 빨리 내놔.”
피범벅이 된 릴라크가 아기를 안은 제대장에게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마음약한 제대장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다가오는 릴라크와 아기를 번갈아 쳐다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빨리 던져! 저년은 안 죽이고 뭐 하는 거야!”
제롬의 명령에도, 제대장은 차마 갓난아기, 그것도 한때 자신이 상관으로 모셨던 사람의 아기를 던질 수는 없었다.
“내놓으라니까!”
릴라크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그는 바닥을 짚은 칼을 내던지고는 벌벌 떨고 있는 제대장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으스러진 왼팔로 꽉 안았다.
“내 딸이라고.......”
릴라크는 아직 따뜻한 아기의 머리에 코끝을 가져갔다. 악을 쓰고 울어대던 아기는 엄마의 품을 느끼고는 그제야 울음을 멈추었다. 아기는 평소 눈을 맞출 때처럼, 아직 눈물이 덜 마른 크고 까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안하구나.”
릴라크가 아기에게 속삭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는 형편없는 엄마였다. 젖먹이 딸을 걸핏하면 남편에게 떠넘기기 일쑤였고, 아기와 살갑게 놀아 준 일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아기를 낳고 겨우 5달만에 전쟁터에 불려나오면서 젖도 마음껏 물려주지 못했었다.
하지만 릴라크는 누군가 말을 타고 자신에게 돌진해오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젖내어린 아기의 살내음, 그리고 자신과 아기에게 다가온 최후를 직감하며 눈을 꽉 감았다.
“제가 하죠!”
웬 기병 한 명이 말을 몰고 전 속력으로 달려와 아기를 안고 있던 릴라크의 머리를 방패로 힘껏 후려쳤다. 순간 릴라크는 중심을 잃으며 절벽 위, 공중으로 붕 솟구쳐 올랐다.
아기를 안은 채 폭포 위로 동댕이쳐진 릴라크의 눈에 하늘, 그리고 이 잔인한 숲을 온통 뒤덮은 곱고 아름다운 눈송이가 무수하게 들어왔다. 자신이 떨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아기를 안은 왼팔에 힘을 꼭 주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난 후, 릴라크는 무언가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의 등을 때리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뼈와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공중을 빙 돌아 옆의 큰 얼음덩이에 어깨와 다리부터 메어꽂혔다.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오른 그는 오른팔이 있었다면 딸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뜬금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끔찍한 충격이 그의 부서진 머리와 이미 으스러진 왼팔을 강타했다.
“계급이 뭐냐.”
피로 온통 범벅이 된 폭포 밑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제롬이 방금 전 릴라크를 쳐서 떨어뜨렸던 그 기병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기병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릴라크의 잘린 오른팔을 폭포 밑으로 멀리 내던지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소대장입니다.”
“널 제대장으로 특진시키겠다. 현 제대장은 인수인계 후에 2군으로 전출시키도록 해.”
제롬은 아기를 내준 후 줄곧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제대장을 힐끔 쏘아보았다.
“죽은 말도 밑에 던져버려. 핏자국도 지우고. 눈이 오니까 대강 덮어놓으면 될 거다.”
“시체는 그냥 놔둬도 될까요? 날이 추워서 자칫 저대로........”
소대장, 아니 신임 제대장이 폭포수 옆, 움푹한 눈바닥에 아기를 안은 채 처박혀 있는 릴라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지도를 잠시 살펴본 제롬이 고개를 저었다.
“맹수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나와 있군. 시체가 눈 밖으로 드러날 무렵엔 어차피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남편놈은 잡았냐?”
“지금 다른 분대가 쫓고 있습니다.”
“그놈도 잡는대로 여기로 데려와 던져버리라고 해.”
제롬은 폭포 밑을 다시 돌아보았다. 지난밤, 그가 안으려고까지 했던 여자는 이제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시체가 되어 눈밭에 구겨져 있었다. 그는 잠시나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기병들 역시 무참히 쓰러진 릴라크를 그대로 놔둔 채 무심히 뒤돌아섰다.
사람들의 기척이 멀어진 후, 릴라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잘린 어깨에서는 이제 피도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그는 이미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눈꺼풀은 열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가 버린 허리 아래로는 이제 아무런 감각이 없었고, 뒤로 꺾인 목에 다행히 신경은 살아 있었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의 온몸의 뼈와 근육은 완전히 으스러져 어느 것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 그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눈만 감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 지금의 끔찍한 고통도 이제 끝이었다.
찢겨진 그의 목덜미 근육 위로, 하늘에서 내려와 소복하게 쌓이는 서늘한 눈발이 느껴져 왔다. 그는 조금씩 눈에 묻혀가고 있었다. 스르르 눈이 감겨가는 것을 느끼던 릴라크는 가슴에 느껴지는 아기의 희미한 숨결에 눈을 번쩍 떴다.
“얘야.......”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손을 뻗어 짚은 아기의 뺨에는 무언가 끈적한 것이 묻어 있었다. 아기가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릴라크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느낀 건, 아기가 아직 살아있다는 한 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는 릴라크가 딸을 구해줄 수도 없었다. 아기가 몸을 가늘게 떨며 신음소리에 가까운 울음을 흘렸다. 릴라크는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지만 차마 딸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릴라크는 한쪽이 부서진 할룩스를 힘들게 더듬거려 입 앞에 올려놓고는 남편 루시도프의 코드를 눌렀다.
“미안해.......아기를 부탁할게.......동맹군을.......”
릴라크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검은 피가 순간 할룩스를 덮었다. 입과 목구멍을 막은 피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릴라크는 울고 있는, 아니 힘겨운 숨만 쉭쉭거리며 죽어가고 있는 아기를 품에 바싹 붙였다. 아빠가 동맹군을 데리고 와 줄 때까지 딸아이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엄마의 몸이 전부였다.
릴라크는 지독한 고통을 참아내며 눈을 부릅떴다. 아기를 위해, 그는 최대한 오래 살아있어야 했다. 비록 그 자신은 그때까지 살아 버티지 못하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