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4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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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크의 짐작대로, 아침에야 술에서 깬 제롬은 어젯밤 자신이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지독한 후회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술만 들어가면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은 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최고제후’라는 이름값 하나만으로 그럭저럭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상대’가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바로 측근을 지키는 근위기병대장이었고, 정실부인 오르테의 사촌언니였다.
당황한 그는 뜬금없이 부인에게 연락을 해 ‘사랑한다’며 평소 잘 하지도 않던 말을 늘어놓았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릴라크는 그의 처사에 부쩍 불만이 많았다.
부인 오르테의 평소 행실로 보아, 이 사실이 귀에 들어간다면 또 한바탕 뒤집어놓은 후 처가로 가 버릴 것이 뻔했다. 사위에게서 항상 뜯어먹을 궁리만 하고 있는 라자루스 가 역시 이런 제롬을 그냥 봐 줄 리가 없었다.
그가 휘하 정보요원을 시켜 릴라크가 없는 새,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다과를 빙자해 부부를 잡아두고 있는 새, 그의 처소를 몰래 수색하라 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핑계거리 하나라도 잡아 입막음을 해 버릴까 하는 심산도 내심 없지 않았다.
“각하, 웬만하면 이번 일은.......”
한쪽에 연결되어 있던 베흔이 투덜거렸다. ‘사생활이 문란한 릴라크를 아무래도 요직에서 내몰아야겠다’며 상의차 부른 베흔은 제롬의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영 맘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제롬이 릴라크에게 얼토당토않은 흑심을 품었었다는 사실 따위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각하.”
릴라크의 처소를 뒤지라며 보낸 정보요원의 연락에 제롬이 낯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처소가 조금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자료도 나름대로 잘 정리되어 있고.......침구류에 남자의 정액반응도 없습니다. 고작해야 이 정도.......”
요원이 머쓱한 얼굴로 내보인 건 몇 권의 도색잡지와 남자 영상이 든 필름이 전부였다. 제롬은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베흔이 기다렸다는 듯 제롬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보십시오, 겉보기만 그럴 뿐이지 괜히 의심할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요원이 방 안의 물건들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보안상태도 좋고, 근무일지도 모두 확인했지만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폐기물 처리장까지 가서 새벽에 내보내신 쓰레기 주머니까지 하나하나 뒤졌지만 별건 없었습니다. 고작 술병 하나 찾았지만 근무 중에 드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요원은 쓰레기통에 있던 특이한 모양의 병과 잔 하나를 내보였다. 그 병을 본 순간, 베흔과 제롬 모두의 어깨가 잠시 들썩거렸다. 얼마 전, 제롬이 구르베스를 겁탈하기 직전 먹였던 바로 그 술병이었다. 게다가 그 밑바닥에는 약간의 술이 남아있기까지 했다.
“씨발, 빌어먹을........”
제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날 밤의 파티가 끝난 후, 베흔은 저 술병과 구르베스가 입을 댔던 잔을 다시 거둬들이려 했지만 그 요란스런 술판에서 어디로 가 버렸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그냥 다른 쓰레기들에 섞여 함께 버려졌으려니 생각하고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었다. 그랬던 술병이 릴라크의 처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도 어제 내버렸다는 것을 보아 무언가 꿍꿍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남편이 가져온 것 중에는 뭐 수상한 거 없어?”
제롬이 요원을 계속 몰아붙였다.
“그분께서 가져오신 건 여행가방 4개가 전부인데.......하나는 옷가방이고 하나는 책가방입니다. 나머지 두 개는 비어있습니다.”
“잠깐.”
순간 베흔이 무언가 떠오른 듯 요원의 말을 막았다.
“릴라크 경 전에 보니 잘 못 먹어서 얼굴이 반쪽이 되었던데.......남편이 먹을 건 가져오지 않았나?”
베흔의 질문에 제롬이 별 쓸데없는 걸 다 묻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장군’인 릴라크는 원하기만 한다면 사병들의 배식 기준량 따위에 상관없이 풍족하게 식사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는 ‘일을 이렇게 만든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식량을 더 축낼 수는 없다’며 지금껏 기병대 사병들과 함께 묵묵히 식사를 해 오고 있었다.
베흔의 물음에 요원이 루시도프의 가방을 다시 뒤졌지만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아뇨, 먹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여자 까탈스런 성격에 일부러 못 가져오게 했을지도 모르잖아.”
제롬이 얼른 끼어들며 한 마디 쏘아붙였다.
“아뇨, 그렇게 병사들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남편이 자기 먹을 것이라도 가져오게 했겠죠. 게다가.......”
릴라크 남편의 빈 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베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아기용품은?”
“예?”
“딸을 함께 데려왔다며? 그럼 아기용품도 가져왔을 거 아냐? 젖이나 이유식이든, 기저귀든, 담요든 간에. 아기 하나 움직이면 가져갈 물건이 한둘이야? 하루이틀 머물 것도 아니고.”
“아기용품이요?.......이미 쓰고 내놓은 기저귀 몇 장 외에는 없습니다.”
순간 무슨 일인지를 눈치 챈 제롬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년을 당장........”
하지만 베흔은 그런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손짓을 보냈다.
“각하. 그냥 놔두십시오.”
“뭐?”
“릴라크 경에게 일신상의 문제가 생겨 잠시 휴가를 주었다고 발표하고 이번 일은 묻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자니.......의도하지 않게 임신을 해서 처가인 예리노프 가로 보냈다고 발표하는 것도 좋겠군요.”
“미쳤어? 그년이 지금 우릴 배신하고.......”
제롬이 발끈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베흔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각하. 릴라크 경의 남편은 플라칼 가의 적생자입니다. 릴라크 경 역시 적군에 별다른 연고가 없습니다. 릴라크 경은 똑똑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입니다. 투항을 원했다면 번거롭게 아기용품이니 식량 따위를 함께 가져갈 이유도 없습니다. 순시한답시고 배 한 척 동원해서 강만 건너면 바로 적진입니다. 릴라크 경 정도의 자리면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릴라크 경은 아마 투항이 아니고 단순히 탈영을 원했을 겁니다.”
“뭐?”
“본가인 예리노프 가와 라자루스 가가 모두 황제령에 적을 두고 있으니 그쪽에 의탁하기를 원했을 수도 있고요. 요즘 릴라크 경이 연합군의 처사에 부쩍 불만이 많았던 것은 각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용의주도한 릴라크 경의 선택 치고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라자루스 가’라는 말에 제롬이 다시 움찔했다. 그는 그제야 릴라크의 속셈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외가인 라자루스 가에 일단 몸을 의탁하고 제롬의 행동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탈영에 대한 처벌’ 역시 피해가려는 속셈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잘 모르는 베흔은 지도까지 가리키며 제롬을 설득하려 애썼다.
“보십시오, 릴라크 경이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면 저 병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가져가서 정보를 넘기려 했을 겁니다. 게다가 산책을 나간 곳은 적군 초소와도 거리가 먼 곳입니다. 흥안령 산자락은 대부분 적군이 장악하고 있지만 지금 릴라크 경이 간 곳만은 거의 없습니다. 정황을 보아 릴라크 경이 최소한 투항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건 확실합니다.”
“투항이든 탈영이든 어차피 상관없어. 군기도 흐트러져가니 한 놈쯤 잡아서 족칠 때야.”
제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무기와 갑주를 집어들었다. 그런 그를 말리려는 듯 베흔이 다시 간곡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냥 놔두십시오. 릴라크 경은 제국에서 손으로 꼽을 맹장 중에 하나입니다. 게다가 지모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그렇게 버리기는 아까운 사람입니다. 이번만은 그냥 가도록 놔주십시오. 이번 일은 일단 눈감아주고 차후에 다시 달래서 써먹을 수.......”
제롬은 베흔의 말을 못 들은 척, 근위병들에게 소리를 쩌렁 질렀다.
“모처럼 사냥을 나갈 테니 가문 친위기병 30명만 빨리 불러내! 제일 믿을만한 놈들로!”
제롬의 ‘사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은 베흔은 자신의 조언을 외면하는 그의 모습에 또다시 허탈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 그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롬은 큰 창을 어깨에 짊어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빌어먹을 년, 잡히기만 해 봐라.”
제롬이 보낸 전령을 일단 떨쳐냈지만 릴라크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핏기까지 가신 채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먼저 꼭 잡아준 건 루시도프였다.
“서둘러야겠어. 뭔가 이상해.”
루시도프는 멀찍이서 아직까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호위병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루시도프에게 뜬금없이 키스를 청했던 릴라크는 뒤따르는 호위병들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으니 따라오지 말라’며 수화를 보냈다.
이 명령을 지금까지 아껴둔 건 여기쯤 오면 저들이 알아서 ‘부부간의 로맨틱한 산책’을 훼방 놓지 않고 눈치껏 관심을 끊어주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기대 때문이었다.
어쨌든 릴라크의 명령을 받은 기병들은 저희들끼리 눈짓도 주고받으며, 누군가는 시시덕거리기도 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연합군의 활동무대였고, 동맹군도 거의 출몰하지 않는 안전한 곳이었다. 릴라크는 산자락 숲 쪽으로 말을 몰며 저들이 자신들의 행로를 ‘숲 속에서 비밀스런 정사’라도 나누기 위한 행동쯤으로 보아주길 바랐다.
“잘 자라, 아가야.......제발......”
릴라크가 딸의 등을 토닥여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시간이 너무도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그는 버려진 마을과 호위병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벌어져 있었다. 이들 가족이 숲 속으로 막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풀려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버려진 마을 쪽에서 거친 말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란 릴라크는 반사적으로 스코프를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젠장!”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한 호위병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릴라크가 간 방향을 가리키며 서로 무어라 소리를 질러거나 릴라크가 있는 쪽을 향해 말을 돌리고 있었다.
“제기랄!”
릴라크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서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의 남편을 실은 애마 역시 주인을 따라 다리에 무섭게 속도를 붙였다. 깜짝 놀란 루시도프가 말고삐를 힘껏 붙들었다.
“그 새끼가 눈치 챈 거야?”
“몰라, 눈치 챈 건지, 아닌지........일단 빠져나가야 될 것 같아!”
잎이 다 떨어지고 눈이 쌓인 이 겨울숲은 이들이 몸을 숨길만한 곳은 되지 못했다. 뽀얗게 쌓였던 눈이 거친 말굽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치 안개 같은 구름을 그들의 등 뒤로 뿌려놓았다. 두 마리의 말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주인 가족을 싣고 힘차게 내달렸다. 하지만 말이 세차게 움직이면서 놀란 아기까지 잠에서 깨 울어대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릴라크는 망토자락으로 아기를 꼭 품어 안았지만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호위병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스코프에 나타난 지도를 보아도 그들과의 거리는 도리어 처음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움직이는 속도 역시 평소보다 느렸다.
“저 녀석들.......”
릴라크가 숨을 헐떡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이 일부러 속도를 내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상관인, 아니, 상관이었던 자신에 대한 마지막 예의든, 혹은 지원군을 기다리는 의도된 행동이든 당장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산 위쪽에서 달려 내려오는 십여 기의 기병대가 그의 스코프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냈지?”
릴라크가 이를 악물며 옆에 있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이번에 다가오고 있는 기병들은 자신의 플라칼 가 소속부대를 뜻하는 파란색이 아닌, 남부의 다른 가문을 뜻하는 초록색이었다. 그들은 2,3기 단위로 갈라지며 사방에서 이들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릴라크는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방향을 돌려 남쪽으로 속력을 내 달려가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릴라크가 잠시 휘청거리는 남편의 말고삐를 얼른 잡아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기가 여전히 울어대고 있었지만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 릴라크의 스코프에서 병력을 나타내는 표시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추격병들이 위장포를 갖추어 입은 모양이었다.
“앞에! 앞에!”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던 루시도프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둘의 앞에는 쩍 갈라져 있는 작은 계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우린 갑옷을 안 입어서 유리해!”
릴라크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하지만 그는 말 등에 함께 실려있는 비상식량, 그리고 아기를 위한 물건들에 관해서는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몸 낮추고 말에 바싹 붙여! 말이 날 따라서 뛸 테니까!”
그의 말대로, 릴라크의 백마는 앞장서 뛰어 건넌 주인을 따라 공중으로 확 솟구쳐 올랐다. 순간 겁에 질린 루시도프가 말 목을 꽉 껴안았다. 목을 껴안는 그의 힘이 너무 셌는지, 그의 안장 앞쪽에 매어 놓았던 가방 한쪽이 후드득 뜯겨나가면서 내용물 꾸러미 두 개가 계곡 아래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앗!”
깜짝 놀라 냇물을 돌아보며 멈칫거리는 루시도프에게 릴라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와! 시간이 없어!”
“안 돼! 애가 먹을 거란 말이야!”
잠시 머뭇거리던 릴라크는 결국 딸을 남편에게 넘기고 급히 말고삐를 돌렸다.
“먼저 가고 있어! 내가 따라갈 테니까!”
릴라크는 말을 조심스레 움직여 아래쪽으로 가려 했지만 눈까지 쌓인 깊은 계곡은 말을 몰고 내려가기는 너무 험했다.
“빌어먹을!”
릴라크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험한 흥안령 너머 서쪽 산자락의 마을까지는 그가 어림하기로 족히 3일은 넘게 걸릴 거리였다. 릴라크는 참전하느라 더 이상 젖을 먹일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고, 그렇다고 겨우 9달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기에게 어른도 겨우 먹는 건량(乾糧)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에서 급히 뛰어내린 릴라크는 미끄러운 바닥을 애써 디디며 발밑에 보이는 주머니에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루시도프는 혼자 계곡 아래로 내려간 릴라크가 걱정이 되었지만 자신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기는 울다가 지쳤는지 아빠의 가슴에서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제발, 빨리 좀 가자.”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루시도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서 리드하던 릴라크를 잃은 말은 제대로 달려주지 않았다. 아니, 맘먹고 달린다 해도 루시도프에게 제대로 통제할 능력도 없었다. 유학 공부를 한답시고 ‘천한’ 무예를 멀리하고 살았던 것이 이토록 분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잡아!”
오른쪽, 산 위쪽에서 들려온 거친 군인들의 고함소리에 놀란 루시도프는 필사적으로 말을 재촉했다. 말은 걸음에 조금 더 속도를 붙였지만 쫓아오는 자들을 떨치기에는 누가 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루시도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3기의 델루지 가 기병들이 이미 옷깃을 붙잡을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루시도프는 아기를 한 팔로 꽉 껴안으며 몸을 낮추었다.
“악!”
뒷덜미를 잡힌 루시도프는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두 팔로 아기를 꽉 안은 채 말 뒤를 한 바퀴 돌아 눈이 잔뜩 쌓인 산사면에 거칠게 동댕이쳐졌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루시도프는 반사적으로 딸의 숨결부터 확인했다. 아기는 많이 놀란 듯 했지만 아직 따뜻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기부터 빼앗고 체포해!”
기병분대장 계급을 단 한 기병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루시도프의 품에 안긴 아기를 가리켰다.
“안 돼!.......아 악!”
말을 향해 다시 도망치려던 루시도프의 목을 누군가의 굵은 팔이 거칠게 감아 버렸다.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는 그의 팔에서 다른 기병이 아기를 거칠게 낚아챘다.
“내놔! 내놓으란 말이야!”
멀어지는 딸을 쳐다보며 루시도프가 발버둥을 쳤지만 기운 센 기병들에게는 당할 수는 없었다. 등 뒤의 기병은 그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을 비틀었다.
“아이를 내놓으란 말이야!”
루시도프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악을 썼지만 아기를 안은 기병은 매정하게 말에 오르고 있었다. 그때, 루시도프는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말굽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이 델루지 가 개새끼들!”
한 손에 칼을 들고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온 릴라크는 놀라 엎드린 루시도프의 바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났다. 거의 동시에 쿵 소리가 울리며 루시도프의 등을 누르고 있던 병사의 목이 경사진 눈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네놈도 꺼져!”
릴라크는 핏방울로 얼룩진 칼을 한 손에 번쩍 치켜들고는 허둥지둥 도망치는 분대장의 뒤를 쫓았다. 아기를 안은 기병은 그 사이 산 위쪽으로 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살려......살려주.......”
분대장의 애원은 결국 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공중을 한 바퀴 빙 돈 릴라크의 칼은 막 돌아서려는 분대장의 어깨와 목을 단 한 번에 몸통에서 갈라놓았다.
“아이는 내가 찾아올 테니까 당신은 빨리 도망가!”
릴라크는 얼굴과 옷자락에 튄 피를 급히 닦아내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몰아 멀어져갔다. 두 구의 시체 사이에 혼자 남겨진 채 멀어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루시도프는 갑자기 눈물이 솟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적을 쫓아가는 릴라크는 지금 갑주조차 입지 않고 있었다.
“제발.......무사히 돌아와야 돼.......아이보다 당신이.......”
그는 아내와 연결된 할룩스를 켜고 더듬거리는 한 마디를 남겼다. 그는 자신이 따라가 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아니 짐덩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릴라크에게서 거친 숨결이 어린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어.......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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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자르기가 뭣해서 좀 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밑에 있는' 코멘이나 '오른쪽에 있는' 추천 잊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