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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81화 (480/1,132)

< -- 481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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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성공이군.......아니 실패인 셈인가.”

베아트릭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투구를 벗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물에 뛰어든 1만이 넘는 남부 보병대는 이쪽 강안에서 10스타디아 정도 떨어진 늑대섬에 차례대로 올라서고 있었다. 저 섬에도 동맹군 보병들이 주둔하고 있기는 했지만 고작해야 100명 남짓의 경보병들이 전부였다. 그들로서는 악에 받쳐 몰려드는 저 연합군 중장보병들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터였다.

적이 이쪽 강안에 상륙하는 것까지는 일단 저지했지만 어쨌든 저들은 섬을 차지했으니 언제든 다시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었다.

“빌어먹을.”

짜증을 부리던 베아트릭스는 남은 적들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부하 기병들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항복, 혹은 적의 목을 모조리 베어놓기 전까지는 절대 ‘전투가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음을 그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대장군님, 대장군님!”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경창기병대장 루코프의 뒤에는 어딘지 낯익은 사람이 풀죽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가 누군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베아트릭스는 재빨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직 내명부와 황실 예법에 서툰 베아트릭스는 상대와 자신과의 품계를 비교하느라 잠시 시간을 끌어야 했다.

“에우테르 대군. 반갑습니다.”

조금 늦은 결론을 얻은 베아트릭스가 어깨를 당당하게 펴며 상대방에게 다가갔다. 황빈과 대군은 같은 2품의 위치였지만, 내명부 4비빈만은 품계와 무관하게 누구든 존대할 의무가 있었다.

루코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에우테르를 가리켰다.

“조금 전 우리 기병에게 투항하셨습니다. 투창병연대를 이끌고 오셨다고 합니다.”

에우테르는 엉망이 된 옷차림을 일단 정리하고는 베아트릭스에게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황빈 마마.”

“투창병연대가 투항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대군.”

“아뇨, 저는 그냥 사로잡힌 포로로.......해 주십시오. 투항 여부는 나머지 장교들이 결정하도록.......아시다시피 제 가족들이.......”

에우테르가 자신없는 말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베아트릭스는 에우테르의 이런 ‘무장답지 못한’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받아들여주기로 했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는 에우테르의 처지를 잘 아는 베아트릭스에게 그는 어떤 면으로는 자신의 이전 모습과도 같았다. 그렇다보니 그로서도 에우테르의 이런 태도를 아주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카렐 누님께서도 전장에 직접 나오신 모양이던데.......그분을 뵈었으면 합니다.”

카렐을 부르는 에우테르의 호칭에 베아트릭스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까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폐하께 대한 호칭에 각별히 유념해주셨으면 합니다, 대군. 대군의 형 되시는 코리온 리쿠 학장께서도 폐하께 그런 호칭은 쓰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에우테르가 무안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베아트릭스는 카렐이 있는 중군 후방 쪽을 향해 말을 돌리며 슬레이프니르 부단장 갈라크 도비치 장군을 불러냈다.

“도비치 장군, 내 에우테르 대군을 폐하께 데려다주고 올 것이니 자네가 잠시 마무리를 맡아 주게나.”

에우테르는 가지고 온 녹슨 쇳조각을 소매의 갑주 관절 틈새에 조심스레 감춘 채 베아트릭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의 예상대로, 아군이 ‘늑대섬’으로 퇴각하는 동안 자리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그의 투창병들은 동맹군 기병들의 손에 무참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죽어가는 부하들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동맹군 진영을 가로질러 카렐이 있는 비단장막 앞에 도착한 에우테르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200여명의 무시무시한 가디언 근위기병들이 장막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싼 채 자신들의 황제를 지키고 있었다. 장막 안쪽에서 카토가 걸어나와 이 황족 무장의 몸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에우테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우테르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단 확인했지만 카토는 무언가 불안한 듯 이번엔 그의 갑옷을 가리켰다.

“갑옷을 모두 벗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비록 투항한 무장 신분이나 고작 가디언 정도가 어디 황족에게 무엄하게........”

순간 얼굴이 붉어진 에우테르가 대뜸 언성을 높였지만 워낙에 뻣뻣한 성격의 카토는 요지부동이었다.

“대군이 아니라 태자라 하셔도 마땅히 절차는 밟으셔야 하겠습니다.”

“그럴 것까지 없다, 카토. 황제인 짐의 혈육이 아닌가.”

장막 안쪽에서 카렐의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렐의 명령이 불만인 듯 카토가 잠시 입가를 씰룩거렸다.

물론 그도 에우테르를 최대한 너그럽게 대하려는 카렐의 속을 모르지 않았다. 에우테르는 카렐을 각별히 아껴주는 대공주의 아들이었고, 코리온의 친동생이었다. 아무리 포로라지만 이곳에서 그를 무례하게 대한다면 가뜩이나 ‘천박한 가디언 출신’ 카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황족들에게 그나마 점수를 더 깎이는 셈이었다.

“폐하와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카토가 일단 경고를 하는 선에서 몸 검사를 마무리했다. 에우테르는 앞장서는 베아트릭스를 따라 장막 안에 조심스레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 안에는 검은빛 키 큰 말에 오른 황제이며 그의 사촌누이 카렐이 망토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서 있었다.

‘독감에 걸렸다는 게 사실이군.’

에우테르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얼마 전, 죽어가던 누나 건연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던 에우테르는 지금 카렐의 모습이 죽기 직전 그의 모습과 비슷함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카렐 역시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으리라는 것도.

에우테르는 손에 쥔 쇳조각을 다시 더듬었다. 투항하기 전, 죽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최대한 더럽혀놓은 끝자락이 느껴졌다. 잘 갈아낸 그 끝은 살짝만 찔러도 피가 나올 정도로 예리했다.

“잘 와 주었네, 에우테르. 그간 인질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는가.”

카렐이 움푹 들어간 눈가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직 나를 황제로 대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니 얼마간은 그냥 사촌누이로 대해 주게나. 대공주께 받은 은혜가 있는데 내 어찌 그대에게 험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편이 내게도 편하다네.”

카렐의 눈짓을 받은 근위병 한 명이 따뜻하게 데운 코코아 한 잔을 에우테르에게 올렸다.

“감사합니다.......카렐 누님.”

몸을 녹이는 따뜻한 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시며 에우테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심 덤빌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카렐은 몇 발짝 떨어져 있는데다가 말에까지 올라 있었다.

“누, 누님께 꼭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왔습니다.”

“내게?”

카렐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우테르는 카렐의 곁을 지키고 있는 가디언들을 한 번씩 돌아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누이 건연대군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로......”

“건연의 일은 내 역시 안타깝게 여기고 있네. 변종 독감에 걸려 그리 된 것으로 알고 있네만........”

근위대 쪽에서 이쪽에서 모르는 무언가를 먼저 밝혀냈나 하고 생각한 카렐은 주변의 가디언들에게 잠시 물러나라며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만은 어딘지 내키지 않는지 뒤로 물러나는 척 하며 다시 에우테르를 돌아보았다.

카렐은 에우테르에게 조금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카렐의 말에 겨우 두세 걸음 거리로 들어서며 에우테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하고픈 말이 뭔가.”

카렐이 몸을 조금 낮추며 에우테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게.......”

에우테르는 손에 쥔 쇳조각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의 미심쩍은 몸놀림을 본능적으로 눈치 챈 카렐이 순간 움찔했다.

“이악!”

고개를 번쩍 든 에우테르는 손에 쥔 쇳조각을 카렐의 눈을 향해 힘껏 던졌다.

“앗!”

날아오는 웬 물체에 깜짝 놀란 카렐이 반사적으로 팔을 치켜들어 얼굴을 가렸다. 주인의 반응에 깜짝 놀란 시알피 역시 앞발을 번쩍 치켜들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주인을 지키려는 군마의 자연스런 반응이었지만 등 뒤의 카렐이 버티기는 어려운 격한 동작이었다.

“폐하!”

베아트릭스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조금 늦은 후였다. 말의 격렬한 반응에 미처 버틸 기운이 없던 카렐은 순간 중심을 잃으며 안장 위를 한 바퀴 굴러서는 꽁꽁 언 흙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에우테르는 카렐의 팔을 긁고 바닥에 떨어진 쇳조각을 다시 집어들고는 바닥에 쓰러진 황제에게 다시 악을 쓰고 덤벼들었다.

“이 개새끼가!”

제일 먼저 달려든 베아트릭스가 카렐의 목을 막 찌르려는 에우테르를 뒤에서 한 팔로 꽉 얽어 바닥에 힘껏 쓰러뜨렸다.

“폐하! 폐하!”

허둥지둥 말에서 뛰어내린 니사가 구급함을 들고는 쓰러진 카렐에게로 달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충격 때문인지 잠시 숨을 쉬지 못했던 카렐이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떨어지며 긁혔는지 얼굴과 손바닥이 까져 있었고, 돌에 걸려 찢긴 한쪽 무릎에서도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괜찮은 게 아닙니다!”

니사는 조금 전 쇳조각을 막은 카렐의 오른팔부터 급히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가디언 팔찌 조금 위쪽에 한 치 정도의 긁힌 상처가 남아있었다.

“모두 물러나요! 모두 물러나라고!”

재빨리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낀 니사가 악을 쓰며 주변의 사람들을 쫓아냈다.

“난.......괜찮다니까.......”

카렐이 힘겨운 숨을 내쉬며 억지미소를 지었지만 모두의 얼굴은 어느새 파랗게 변해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카렐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씨발! 이 새끼가 은혜를 이 따위로 갚아?”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은 베아트릭스가 바닥에 쓰러진 에우테르의 얼굴을 마구 내리쳤다. 에우테르의 얼굴이 온통 피떡이 될 때까지 후려친 베아트릭스는 분을 참을 수가 없는지 아예 그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이 자리에서 내손에 뒈져 봐라!”

베아트릭스에게 목이 졸린 에우테르가 온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황빈 마마! 고정하십시오!”

놀란 근위가디언들이 허둥지둥 달려들어 베아트릭스를 에우테르에게서 억지로 떼어놓았지만 이미 눈이 벌개진 베아트릭스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얻어맞아 곤죽이 된 채 쓰러진 에우테르를 바닥에 엎드리게 한 카토는 그의 손발을 단단히 포박하고 다시 카렐을 돌아보았다.

“폐하, 이자를 어떡해야 할지 명을 주십시오.”

“.......굳이 내 명령이 필요한가.”

카렐이 이를 빠득 갈며 짧게 대답했다.

카토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하 11층에 쳐넣겠습니다.”

카렐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에우테르를 돌아보지도, 자신을 공격한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자신의 호의가 이렇게 눈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히고, 그것도 자신의 혈육이라 믿고 있던 사람에게서 철저히 배신당한 것은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에우테르는 올 때와는 사뭇 다르게 이번에는 가디언들의 손에 뒷덜미가 잡힌 채 마치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갔다. ‘황제 암살미수범’, 아니 어쩌면 진짜 ‘암살범’이 될 지도 모르는 그에게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은 말하나마나한 일이었다.

“폐하, 이 약은 독해서 많이 아플 것이옵니다. 쓰라려도 참으십시오.”

“역시.......내가 핏줄에 너무 약했나.......황제로서 아직은 배울 게 많은 모양이야.”

니사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뒤늦은 후회를 토해내던 카렐은 유난히 독한 액체 소독약이 상처에 스며들며 살과 세균을 함께 녹여내는 그 지독한 쓰라림과 고약한 냄새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혹시 모르니 빨리 무균실로 후송해야 하겠습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니.......조금만 더 이따가 가겠다.”

카렐은 니사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켜서는 다시 말에 올랐다.

“폐하, 지금 그것보다는.......”

“어차피 거의 끝나가지 않는가. 중간에 황제가 사라지면 병사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나.”

카렐이 얼굴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다시 강변의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렐의 말대로, 전투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3천여의 투창병연대 중 2천 이상이 죽음을 당했고, 고작 1천 정도가 살아남아 연대 장교단의 결정으로 결국 집단항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 플라칼 가의 중장보병 1만2천과 5백 정도의 동부기병들이 욱리하 한쪽의 ‘늑대섬’을 점령하고 나름대로 승리의 함성을 올릴 수 있었다.

겨울 들어 첫 번째로 벌어진 이번 전투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 동맹군 병사들은 언덕 위에서 여전히 펄럭이고 있는 황제의 깃발과 환호하는 병사들 사이로 말을 타고 전장을 질주하는 황제의 모습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전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떤 사건이 벌어졌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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