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78화 (477/1,132)

< -- 478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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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이 빌어먹을 얼음 같으니.”

헤즈는 이 맹추위 속에서도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워낙에 비둔한 몸으로 10스타디아(1.5km) 가까이를 달려오다보니 어느새 그의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다급한 전장의 상황은 그가 편안히 숨을 돌리게 놔두지를 않았다. 워낙 탈진해있던 남부 중장보병들은 에키트 경보병들의 무시무시한 도끼질에 변변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2선의 투창병들 역시 적 후방의 투창병들에게나 난사를 퍼부을 뿐 코앞에서 벌어진 두 부대간의 전투에는 끼어들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북부보병들은 왜 저기에만 있을까요?”

함께 땀을 닦아내던 참모 중 한 명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의 말대로, 적 보병의 주력군인 북부보병대는 그 빽빽한 창날을 하늘로 향한 채 강안에서 2스타디아(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네들도 밀집대오가 기본이니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에서는 싸우지 않겠다는 심산이겠지. 아니면 지네 황제 놈이 죽어서.......”

막 고개를 들던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멀리, 강안의 언덕 쪽에서 보이는 ‘다라프시 카비아니’였다.

“설마.......”

“적 가짜 황제 놈이 죽기는 한 겁니까?”

“알 게 뭐야. 그냥 깃발만 가져다가 놓은 건지도........”

헤즈가 이를 빠드득 갈며 애써 그 깃발을 외면했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맞기를 바라고는 있었지만 제롬이 별다른 증거조차 내놓지 않은 ‘카렐 사망설’에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이에도 적진 후미에서 다시 발사되기 시작한 발리스타는 이곳에 합류하려는 2진 중장보병들의 발목을 계속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달리는 얼음바닥은 군데군데 떨어진 발리스타로 완전히 곰보였다.

돌아갈 길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연합군 병사들도 이젠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거구의 에키트 족 전사들과 애당초 가망이 없는 힘싸움까지 벌이며 후미의 2진이 빨리 도착해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빨리! 잠깐만 쉬고 1선의 1진과 교대해!”

헤즈의 참모들은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4천여의 2진 보병들을 독려하며 마구 고함을 질렀다. 그들 역시 차가운 강물을 헤엄쳐오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에키트 족들에게 일방적인 도륙을 당하고 있던 1진 보병들에게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축차퇴각! 축차퇴각!”

연합군 보병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불어나는 것을 확인한 베레트라가 망치를 공중에 휘두르며 급히 퇴각을 명령했다. 그의 명령에 지금껏 남부보병들을 도살하던 에키트 족 1열의 전사들이 피 묻은 도끼를 든 채 재빨리 2열 뒤로 물러났다.

“적들이 물러난다! 계속 몰아붙여!”

눈이 번쩍 뜨인 헤즈가 지휘관들에게 악을 썼다. 일단 이 위험천만하게 얇은 얼음층만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될 것만 같았다. 에키트 족들은 적들에게 뒤를 보이지 않은 채 각 열에 따라 차례대로 임무를 교대하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계속 몰아붙여! 틈을 주지 마라!”

에키트 보병대의 퇴각에 고무된 연합군 중장보병들은 거의 탈진했던 양어깨에서 갑자기 힘이 솟는 듯, 상대를 마구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한데.”

뒤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투창병 연대장 에우테르 대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 전위대인 에키트 족들이 조금씩 퇴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대오가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게다가 쫓아오는 남부 중장보병대와는 여전히 ‘접근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남부 투창병부대로서는 행여 아군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들을 사격할 수가 없었다.

“어떡해야겠습니까?”

에우테르는 휘하 참모들의 물음에 얼굴을 찡그렸다. 중장보병들에게 1선을 내주고 2선으로 물러난 투창병들로서는 당장은 할 일이 없었다. 예비용 투창까지 이미 모두 지급했지만 상륙 초반에 이미 가지고 온 수량의 절반 이상을 써버린 상황에서 엄호사격이랍시고 난사를 퍼부을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투창 재보급’은 건너편 땅을 밟기 전까지는 요원한 말이었다.

“일단 대기해.”

에우테르 대군이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중얼거렸다. 머리 위로 불붙은 발리스타가 계속 날아가고 있었지만 그저 후속병력의 도착을 지체시킬 뿐, 이미 상대와 근접해 있는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우린 사격이 끝나면 경보병 역할을 수행하도록 훈련되었으니까.”

에우테르 대군이 허리에 찬 칼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투창 떨어진다고 너무 초조해 할 것 없어.”

에우테르는 지금 내리는 자신의 지시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우리 역할은 적 후방에 대기 중인 북부보병대와 마주하면 그 때 다시 사격을 개시하는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잠시 쉬도록 해. 그리고 가진 투창이 다 떨어지면 바로 양익으로 이동해서 근접전으로 보병대 측면을 지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장교들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우테르의 말대로, 세닉 가는 예르마크 경의 지휘 하에 경보병 전체를 투창병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야심차게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투창병단도 원래 경보병 군단이었다. 그런 만큼, 이들이 경보병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약간은 ‘자존심 상하는’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이, 플라칼 가의 중장보병은 3진까지 합류하면서 어느새 1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3진까지 합류하는 순간, 에키트 보병대는 일제히 등을 보이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쫓아가! 저놈들 등에 칼을 박아주란 말이다!”

격앙된 연합군 장교들이 목청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지시에 병사들이 다리에 힘을 주어 적을 쫓아가려 했지만 가뜩이나 풀린 다리에 미끄러운 신발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내서 쫓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기운이 남아도는 저 야만족들은 곰발바닥같은 희한한 신발을 신은 채 단단한 얼음바닥을 박차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발사!”

거리를 확보한 남부 투창병들이 그들의 뒤에 투창을 힘껏 던졌지만 등에 방패를 짊어진 채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는 적들 중 운 없는 몇을 쓰러뜨린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땅을 밟는 것만 남은 건가.”

에키트 보병대를 쫓아내는, 생각 외의 전과에 만족한 헤즈가 입맛을 쩝 다셨지만 그의 앞에는 가장 큰 장벽인 1만 5천의 동맹군 북부보병대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들은 10열로 반(半)밀집한 채 여전히 창을 하늘로 향하고 조용히 서 있었다.

“서부 사역병단에서 ‘작업’이 모두 끝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폐하.”

카토가 ‘비단장막’을 헤치고 달려 들어와 황제인 카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카렐은 말을 조금 앞으로 움직여 거대한 얼음판이 되어 있는 욱리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직 차가운 강바람이 그의 얼굴을 계속 때렸지만 기왕 ‘친정’을 시작한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강안에서 1스타디아까지 후퇴해........적들을 최대한 깊이 끌어들여. 헉, 헉.”

호위가디언들에게 둘러싸인 채 지금껏 계속 전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카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페로, 북부보병대를 부탁한다.”

여전히 뚱한 표정의 페로는 어깨에 덮고 있던 모피를 느닷없이 벗어서는 카렐의 안장 위에 휙 던져놓았다.

“이렇게 묵직한 건 싸울 때는 거추장스러워서 질색이야.”

대답도 듣지 않고 멋대로 말을 달려 멀어져가는 페로를 쳐다보며 카렐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던져놓다시피 한’ 긴 모피는 카렐의 다리를 양쪽에서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황빈도 부대로 가서 명령을 기다리십시오.”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 제발 조심하십시오, 폐하.”

베아트릭스는 카렐을 몇 번이고 돌아보며 머뭇머뭇 부대로 멀어져갔다.

에키트 보병들을 몰아내고 기세가 오른 연합군 보병들은 상대의 퇴각에 환호성에 가까운 함성을 지르며 전진을 재촉했다. 최소한 지금만큼은, 이곳까지 오느라 기진맥진했던 그들의 몸에서 마구 힘이 솟아나고 있는 듯 했다.

북부보병들은 적에게 등을 보인 채 조심스런 걸음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남부보병들은 유달리 힘찬 걸음으로 그들 특유의 밀집대형을 이룬 채 동맹군 보병들에게 접근해갔다. 후방에서는 지금도 연합군의 보충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다시 ‘목표’를 얻은 투창병연대장 에우테르 대군이 전방의 북부보병들을 가리키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투창병단! 발사 준비! 동시 사격한다!”

그의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3천발의 투창이 동시에 공중에 시커먼 구름을 만들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구름이 떨어지는 곳에서는 북부 보병들의 비명소리가 마구 터져 올랐다. 물러나는 적들이 쓰러지는 모습에 신이 오른 투창병들은 고작해야 10발 남짓 남아있던 투창을 차례대로 계속 공중에 날렸다. 하지만 1만 5천의 북부보병대의 움직임을 조금 둔하게 했을 뿐 딱히 큰 타격을 입힌 것 같지는 않았다.

“3발씩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건 적 기병을 대비해 예비용으로 남겨두심이......”

“우리로선 할 만큼 했군.”

에우테르 대군이 뒤를 돌아보았다.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 4진까지 도착하면서 이제 연합군 보병대의 숫자는 어느새 동맹군 보병대 전체를 능가하고 있었다. 이제 단단한 얼음 위까지 진출했으니, 이번에 돌아간 배는 동부기병들을 실어와 얼음 위에 내려놓을 터였다.

“투창병단은 양익으로 나뉘어 보병대 측면을 지키도록 해.”

헤즈의 지시에 에우테르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투창병단 전원! 이젠 경보병으로 돌아간다! 파비스 방패는 이곳에 버려두고 양쪽으로 흩어져서 보병대 측면을 지킨다!”

에우테르의 명령에 3천의 투창병들은 1천5백씩으로 나뉘어 중장보병대 좌익과 우익으로 급히 달려갔다.

“응?”

전진하는 중장보병들을 뒤따라 기세좋게 나가던 투창병들 중 몇몇 고참 사관들이 갑자기 흔들리는 얼음바닥에서 잠시 멈칫거렸다.

“여긴 흔들릴 곳이 아닌데?”

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도 북부보병들이 딛고 있던 이곳은 엔지니어들의 조사에 따르자면 얼음두께만 15촌(45cm)에 달할, 극히 안전한 곳이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엔지, 적군의 발리스타가 얼음 위, 바로 이 라인으로만 집중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뭐 하나! 발리스타 떨어지잖아! 빨리 전진하지 않고!”

장교들의 재촉에 그들 중 대부분이 흔들림을 무시하고 얼음을 건넜지만 몇 의심 많은 사관들이 바닥에 엎드려서는 얼음을 손바닥으로 닦아내 보았다.

“으, 으악!”

얼음 밑을 확인한 사관들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도 전면의 북부보병들에 정신이 팔린 전방의 남부 중장보병들은 기세 좋게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여, 연대장님!”

다급한 보고를 접한 참모 한 명이 에우테르의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왜?”

“밑을 보십시오!”

별 생각 없이 밑을 내려다보았단 에우테르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으, 으엑!”

군데군데 큰 균열이 간 얼음바닥은 이미 손가락 한 마디 가까이 벌어져 있었다. 살얼음과 얇은 눈으로 덮인 이 두꺼운 얼음판의 중간중간이 꺼지고 있는 것을 보아 에키트 보병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동맹군의 서부 사역병단이 밀집한 북부보병대 뒤쪽에서 군데군데 얼음을 쪼개놓고 도망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발리스타의 계속된 충격, 그리고 연합군의 돌격에 그 균열이 조금씩 커지는 모양이었다.

“맙소사.......걸려들었다.......”

에우테르의 입에서 하얀 입김과 함께 탄식이 흘러나왔다.

“얼음이 쪼개집니다! 이대로 있으면.......”

“건너는 게 안전한 거야? 아니면 그냥 있는 게.......”

조금씩 커지는 균열 사이에서 순간 당황한 에우테르는 적이 있는 동쪽, 그리고 아군 추가병력이 도착하고 있는 서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쪼개지는 얼음 위에 있다가는 결국 강물에 얼음과 함께 떠내려갈 테고, 건넌다면 적들의 코앞에 배수진을 치고 완전히 고립되는 셈이었다.

“일단 모두 건너! 빨리! 빨리!”

에우테르가 뒤따라오는 투창병들에게 급히 손을 저었다. 떠내려가 바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들 앞에 고립되는 편이 나았다. 에우테르의 손짓에 투창병들이 영문도 모른 채 허겁지겁 균열을 건넜다. 남쪽으로 흘러가는 강물과 함께 균열은 북쪽부터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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