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5 회: 파트 4. 아카시아, 창을 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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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송을 맡은 휘하 장교를 거짓 배반시켜서 마구스들을 다시 풀어주려던 샤미르와 오르마즈의 계획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결과로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었다.
사실 작전의 시작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호송 셔틀을 대사막에 강제로 착륙시킨 그 장교, 토로 로버넬 대위는 5명의 마구스들과 포로로 잡혀 있던 성직자들을 그곳의 한 작은 마을에 풀어주었고, 교단에 연락하라며 할룩스까지 넘겨주었다. 상황을 눈치 챈 마구스들은 자신들을 풀어 준 샤미르와 오르마즈에게 내심 고마워했지만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목숨을 건졌다 생각한 그들은 교단에 연락해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고 셔틀을 보내라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들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그들의 연락을 받고 나타난 건 교단 사람들이 아닌, 헤크마의 강경파 민병대들이었다. 그들은 놀라 혼비백산한 비무장의 마구스들과 성직자들을 모조리 체포했고,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교단 내에 온건세력을 심고 협상을 추진하려던 샤미르와 오르마즈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그리고 헤크마는 그들을 풀어주었던 특무대 장교, 토로 로버넬 대위마저 그 자리에서 체포해 아케메니안 궁으로 끌고 왔다.
강경파들이 적과 내통해 정보를 받았음을 눈치 챈 오르마즈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특무대 병력을 급히 남극에서 아케메니아로 불러올리려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마구스들과 성직자들을 다시 붙잡은 헤크마와 5천의 강경파 민병대들은 바로 아케메니안 궁으로 올라와 지도자 샤미르에게 ‘담판’을 요구했다. 그들은 ‘책임자’인 사령관 오르마즈를 체포해 자신들에게 넘겨주거나, 아니면 ‘민병대의 자비를 무시하고 감히 탈출을 모의한’ 마구스들을 궁 앞에서 모조리 책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며 농성, 아니 사실상 무력시위에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소속 전사들과 함께 민병대를 이탈하겠다며 딱 하루의 시한을 주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샤미르의 방 앞에 꿇어앉은 오르마즈가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샤미르는 자신이 직접 지시했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자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헤크마를 비롯한 강경파 지도부뿐만이 아니고 강경파 일반 장교들과 전사들 전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에게 항명할 명분을 주었으니........”
오르마즈는 차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어차피 내가 명령한 것이야.”
유리벽 뒤에 말없이 돌아앉아 있던 샤미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책임을 져도 내가 져야지.”
“안됩니다.”
오르마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누군가 지도부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누그러뜨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지도자 전하는 아닙니다.”
“지금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거냐?”
샤미르가 갑자기 눈을 흘기며 오르마즈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마구스들과 성직자들을 모두 산 채로 데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도망쳤고, 토로 로버넬 대위만 붙잡힌 상황이라면 그가 입만 닫고 있는 한 별 문제가 없겠지만, 강경파들은 사로잡은 성직자와 마구스들도 함께 고문해서 저와 관계되었다는 증거를 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고문하고, 그 다음에는 전하를 노릴 것이옵니다. 사슬처럼 줄줄이 엮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오르마즈의 뜻을 눈치 챈 샤미르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콜로니를 재통합하려는 전하의 정치계획이 실현되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마구스들은 살려두셔야 합니다. 그러니.......전하께서 먼저 움직여서 그 사슬 중에 하나를 잘라내십시오.”
오르마즈는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유리벽 옆에 있는 서랍에 밀어 넣었다. 말없이 서류를 받아든 샤미르는 갑자기 이를 악물며 오르마즈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사형수 이름 란이 비워져 있는 ‘즉결처형 명령서’였다.
“저들은 저를 넘겨달라고 하였지 죽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살린답시고 강경파들에게 넘기는 것은 저들의 속셈에 넘어가는 것입니다.......어차피 저들 손에 죽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손수 저를 처형하십시오.”
“뭐, 뭐?”
샤미르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더듬거리며 물었다.
“전하께서 앞장서서 제게 단호하게 책임을 물으시면........강경파도 더 이상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처형 명령서를 조건으로 저들에게서 마구스들의 신병을 넘겨받으십시오.”
말을 끝맺는 오르마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께는 그것에 제 이름을 써넣고 서명하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죽는 광경을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지금까지 서명하신 수많은 처형처럼 말입니다.”
“지금 정신이 있나?”
머리 위에서 들리는 샤미르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오르마즈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것뿐입니다. 전하께서 안전하시려면........아랫사람 누군가가 대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뿐입니다. 그리고 케레사스 솔로스 장군을 새 사령관으로 삼으시옵고........”
“닥쳐!”
샤미르가 유리벽을 후려치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마구스들이 문제라면 그 새끼들 다 죽어버리면 되잖아!”
“그들을 죽이면 ‘종교자유 국가’를 만들려는 전하의 계획도 모두 끝나고 맙니다. 잡힌 5명의 마구스들은 모두 화친을 주장하던 온건한 자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전하의 동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을 버리신다면 그들, 그리고 교단 신도 모두가 적이 됩니다. 교단에서 마구스의 위치는 사실상 신과 같습니다. 저들을 죽이신다면, 뒤이은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전하께선 결국 독재자의 길을 밟으실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빌어먹을! 마구스 백 놈이라도 필요 없어! 내겐.........”
“지도자는 사소한 감정 따위.......에 충실할 수만은 없는 법이옵니다. 지도자 전하.”
샤미르는 꿇어앉은 오르마즈의 턱을 타고 똑똑 떨어지는 눈물을 똑똑히 보았다. 오르마즈가 짐짓 차갑게 말을 이었다.
“소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곳에 서명했을 것이옵니다.”
“정말로?”
샤미르가 따지듯 물었지만 오르마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샤미르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더듬었다. 바로 며칠 전, 오르마즈가 처음으로 입을 맞춰 준 곳이었다. 그날 딱 하루였다. 두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서 함께 한 것은 그날 딱 하루가 전부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해 보는 깊은 입맞춤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의 다정한 포옹도,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이 드는 행복감도 그 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샤미르가 그의 입술과 혀를 느껴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며 애원했을 때도 오르마즈는 그의 입술을 밀어내며 쓴웃음만을 지었을 뿐이었다.
“내 꼴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샤미르는 자꾸 떨려오는 눈가를 한 손으로 가리며 태연해 보이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그의 들썩이는 어깨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뭉그러진 발음은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고 있었다.
“날 좀 쳐다보기나 하고 말하란 말이야!”
샤미르가 다시 악을 썼지만 오르마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하께 모든 책임을 씌우려는 저 강경파들의 술책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 하나를 희생시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번 일로 강경파들이 적과 내통했음이 틀림없으니 똑똑한 베흔을 시켜 그것을 함께 조사해서 강경파를 궁지에 몰아넣으십시오. 측근인 저까지도 제거한 전하께 감히 반항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일거양득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절대로 안 돼.”
샤미르가 이를 빠드득 갈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무표정하게 계속 그를 재촉했다.
“빨리 명령서를 작성해 내려주십시오.”
“못 한다고 했잖나!”
샤미르가 유리벽에 대고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끝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바닥에 꿇어앉은 오르마즈와, 유리벽 안에서 씩씩대고 있던 샤미르 모두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집 안으로 파고들던 환한 오후 햇살이 어느새 핏빛 저녁놀로 바뀌어 있다는 정도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은 전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르마즈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미르의 유난히 하얀 얼굴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샤미르는 조금 전 자신이 동댕이쳤던 ‘즉결처형 명령서’를 천천히 주워들었다. 그리고 뭉개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시간 후에.......다시 와라.”
“그때는 서명해 주실 것이옵니까?”
“......”
“모든 것을 정리하고........3시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샤미르는 뒤돌아 힘없이 멀어져가는 오르마즈의 모습에서 끝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기나긴 이별 전, 마지막으로 그를 보는 것일 수도 있기에.
집무실로 돌아간 오르마즈는 생각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유서, 아니 자술서를 썼다.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이 그간 지도자를 속여 온 자신에게 있음을 모두 시인하는 내용을 종이 세 장에 가득 써 놓은 그는 얼마 되지 않는 개인 소지품들까지 모두 챙겨 함께 있는 동생 세네피스에게 맡겼다. 세네피스는 언니가 느닷없이 들고 온 짐꾸러미에 의아해했지만 오르마즈는 ‘그냥 정리를 하는 것일 뿐’이라고 어영부영 둘러댔다.
샤미르와 약속한 3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까스로 정리를 모두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온 오르마즈는 갑자기 문을 박차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바스토프 베멜러 중령의 모습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 사령관님! 사령관님!”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오르마즈는 샤미르에게 바칠 ‘자술서’와 짤막한 편지를 챙겨들며 건성 물었다.
“지금 궁 앞 광장에서.......”
“광장에서 뭐가?”
“마구스들을 산 채로 못 박고 있습니다!”
“뭐?”
순간, 오르마즈는 눈앞의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멍해지는 정신을 애써 추슬러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나갔다.
“맙소사.......이건 아냐.......이건 아니란 말이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경악한 오르마즈가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아케메니안 궁전 앞, 사각형 광장에서는 이번에 사로잡힌 에아 교단을 비롯한 5개 교단의 마구스들이 산 채로 몸에 말뚝이 박힌 채 신음하고 있었다.
“뭐야! 뭐 하는 짓이야!”
오르마즈는 중간에 있던 베흔을 거칠게 떠밀며 악을 썼다. 하지만 그는 이런 오르마즈에게 사뭇 냉담하게 대답했다.
“지도자 전하의 명이십니다. 사령관 각하께도 집무실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으로 압니다. 헌병대에서 보기 전에 빨리 집무실로 돌아가시죠.”
오르마즈는 피비린내로 진동을 하는 목판들 앞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샤미르는 그를 속인 것이었다.
“세워!”
‘작업’을 감독하던 베흔이 병사들에게 마구스가 ‘박힌’ 목판을 세우라며 손짓을 보냈다. 양 어깨, 그리고 허벅지에 끔찍한 나무못이 박힌 그 5명의 마구스들은 평소 그리도 감추어왔을 얼굴마저 그대로 드러난 채 목판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힘겹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목숨을 구걸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지도 않았다.
워낙 예고도 없이 시작된 처형이어서인지, 구경꾼들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사방에 풍기는 피냄새에 파랗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바닥에 엎드리며 통곡까지 하고 있었다.
“하, 하아악.......”
그 중간에 있던 에아 교단 마구스는 오르마즈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짧으나마 미소까지도 지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에아 마구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당신께 이 다섯 명의 현신을 제물로 바치나이다.......크쉬나오트라 하가, 파나미야즈드 바샤이안드 바샤이야쉬가르 메헤르반 남 세테에야신 하가 하마 부트........”
최후와 맞닥뜨린 이 마구스들의 마지막 기도문을 알아듣는 사람은 이 자리에 거의 없었다. 눈물에 흠뻑 젖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리 없이 따라 읊고 있던 오르마즈 외에는.
“신이여,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해 오시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실 당신을 찬양하오며, 이제 당신의 현신을 하늘과 땅으로 돌려보내오니, 부디 기쁘게 받아주시옵소서........”
기도문을 읊조리던 에아 마구스가 고통을 참을 수 없는지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강경파들에 굴복한 샤미르가 이 마구스들에게 베푼 ‘은혜’는 한 시간 후, 죽어가는 그들의 목을 창으로 찔러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아케메니안 궁 앞에서 있었던 이 끔찍한 처형은 뒤이어질 잔혹한 독재정치의 전주곡이었다.
샤미르에게 근신과 정직 처분을 받았던 오르마즈는 이 처형이 있은 날 밤, 샤미르에게 남기는 짤막한 편지와 사직서를 남겨둔 채 동생 세네피스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베흔을 통해 그의 편지를 전해받은 샤미르는 그의 진심을, 그리고 그의 꿈을 상의 한 마디 없이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자신의 부주의함을 뒤늦게 한탄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그리고 그는 ‘핏빛 비수’라는 오명의 구렁텅이에 결국 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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