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2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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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
오르마즈는 여전히 벽을 보고 선 채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게 뭐 하시는 짓입니까.”
오르마즈의 냉담한 태도에 샤미르는 잠시 당황한 듯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선 오르마즈는 한 손을 벽에 얹은 채 마치 인형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샤미르가 입술을 야무지게 악물며 애써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 괜히 물었군. 하지만 상관없어.”
잠시 머뭇거리던 샤미르는 결국 부스 안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좁은 샤워부스 안은 다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 뿌연 김과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찼다.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샤미르가 구차한 변명에 애써 힘을 실어 말했다.
“그저........이 안에서라면 둘이 살을 맞댈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르마즈는 누군가 그의 등을 맨손으로 짚는 것을 느꼈다. 오르마즈는 약간의 김이 서린 거울 너머로 샤미르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조금씩 긴장감에 물들어가는 그의 미묘한 표정까지도 모두 보고 있었다.
“완벽한 소독약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샤미르가 핀잔을 주듯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딴판이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감히 손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그 매끄럽고 부드러운 느낌에 샤미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조심스레 두 팔을 뻗어 오르마즈의 허리를 꼭 안았다. 오르마즈는 벽에 손을 댄 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이런 느낌이었구나.......여자의 살에 닿는다는 게.......”
샤미르는 유난히 높은 오르마즈의 어깨에 살며시 뺨을 기대며 가빠진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의 헐떡이는 가슴과 뜨거운 숨결이 오르마즈의 등을 부드럽게 자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소독약 섞인 물에 흠뻑 젖은 채 서로의 느낌만을 말없이 나누었다.
한참만에 샤미르가 입을 열었다.
“이런 느낌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버티어 온 목적으로 충분해. 그래, 이걸로 충분해.”
샤미르는 오르마즈의 등에 뺨을 부비며 계속 속삭였지만 오르마즈는 여전히 벽을 향해 돌아선 채 낮은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샤미르가 그의 허리를 더 세게 안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제발, 대답 좀 해 줘. 너도 그런지.......”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오르마즈가 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닙니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이 남자를 천천히 밀어냈다.
“최소한 이렇게는 안 됩니다.”
“그 많은 남자들은 다 괜찮고, 난 안된다는 거야?”
샤미르의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가 샤워부스 안을 울렸다.
“예, 그렇습니다.”
오르마즈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남자들은 죽는다 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겠지만.......당신은 머리칼 하나 다치셔도 안 되니까요.”
순간 발끈한 샤미르가 씩씩거리며 내뿜는 거친 숨결을 느끼며 오르마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십시오. 자제할 수 있으실 때.”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축복이야.”
“빨리요.”
“난 죽음을 알아. 이미 몇 번이나 그 경계에서 양쪽을 다 보아왔으니까. 확실한 건 말이야.......널 무력하게 보고만 있는 게 그보다 더 괴롭다는 거야.”
오르마즈가 벽을 짚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샤미르가 조심스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을 하십시오.”
오르마즈가 말을 더 이으려 했지만 샤미르는 어느새 그의 옆을 돌아 가슴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난.......”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오르마즈의 가슴을 다시 조심스럽게 안았다. 부드러운 여자의 가슴을 난생 처음 느낀 순간, 샤미르는 본능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츠렸다.
“실은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어. 지금껏 무서워서 생각도 하지 못했어.......하지만 너라면 모든 걸 감수하고........”
오르마즈가 샤미르를 다시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가슴을 안은 팔을 기를 쓰고 놓지 않았다. 그를 힘으로라도 떼낼까 잠시 생각했던 오르마즈는 결국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태도는 너무도 완강했다.
오르마즈는 가슴에 안긴 이 남자를 한참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크지 않은 키에 약간은 마르고 여린 몸, 누구보다 총명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이곳에 든 것도 그에게는 목숨을 건 도전이었음을 오르마즈는 잘 알고 있었다.
“........압니다.”
오르마즈는 결국 벽에서 손을 떼며 그의 뺨을 짚었다. 아직은 덜 성숙한 남자로서의 본능이 부끄러움에 떨고 있는 얼굴과 어색하게 껴안은 팔에서 느껴져 왔다.
“어차피 누구나 거치는 단계지요.”
지금껏 줄곧 움직이지 않던 오르마즈의 팔은 비로소 이 남자의 허리와 등을 돌려 안고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하지만 첫 사람은 누구에게나 평생 각인처럼 남는 법이죠.”
“네게도?”
샤미르의 물음에 오르마즈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샤미르는 마치 본능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마즈에게 입술부터 청해 왔지만 오르마즈는 그의 턱을 붙들며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를 깨달은 샤미르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럼 도대체 우린 뭘 할 수 있는데.......”
“할 수 있는 만큼.......부족하나마.”
오르마즈가 먼저 샤미르의 귀 밑과 어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놀랐는지 잠시 휘청거리던 샤미르는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샤워부스 구석에 서 있었다. 소독약 섞인 물줄기 속에서 그는 맑고 까만 눈동자를 치켜뜨며 오르마즈의 얼굴을 비로소 올려보았다.
“제 손에 맡겨주십시오.”
가늘게 속삭이던 오르마즈의 입술이 그의 목과 턱을 타고 올라와 어느새 붉게 상기된 그의 뺨에 와 닿았다. 샤미르는 난생 처음으로 반 뼘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축축하게 젖어있는 아름다운 그레이오팔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샤미르는 이 눈동자를 그리려면 도대체 어떤 물감을 써야 할까를 생각하며 자기도모르게 가는 눈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차갑던 오르마즈의 시선이 오늘은 유난히 따뜻했다.
멍한 표정으로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샤미르는 옆 침대를 돌아보았다. 오르마즈는 어젯밤 이곳에 들어올 때처럼 위생복을 입은 채 구석진 작은 침대에 불편하게 누워 있었다. 샤미르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다는 데 지레 놀라며 얼른 담요로 허리께를 가렸다.
“아, 아니지.......”
어젯밤 오르마즈와 있었던 일이 ‘현실’이었음을 깨달은 후에야, 샤미르는 잠시 기겁했던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었다.
“휴........”
샤미르는 좌우로 텅 비어 있는 자기 침대의 빈 공간과, 작은 침대에 웅크린 채 누워있는 오르마즈를 번갈아 쳐다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내 한계였던가.......”
샤미르는 힘없이 몸을 일으켜 오르마즈의 침대에 다가갔다.
어젯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지친 샤미르의 몸을 손수 씻어주었고, 이곳에 데리고 나와 직접 눕혀주었지만 옆에 함께 눕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샤워부스 안에서도 결코 ‘키스’만은 용납해 주지 않았었다.
샤미르는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오르마즈와의 ‘키스’를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그는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오르마즈는 샤미르의 약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선을 결코 넘지 않았고, 다른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샤미르는 따뜻한 침대 속에서 오르마즈의 살내음을 맡고, 그를 품에 안고 행복하게 잠들고 싶었지만, 아니 그 ‘잠’이 비록 죽음이라 해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지만 오르마즈는 그런 그의 바보같은 생각을 용납하지 않았다.
샤미르는 아직 잠들어 있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서 ‘절영’을 선물받고 기뻐할 그의 모습을 혼자 떠올렸다. 그리고 절영과 함께 오르마즈의 분신이 될 새 갑옷 역시 상자에 들은 채 그의 방 한쪽에 마치 비밀스런 물건처럼 놓여있었다.
“내가 많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샤미르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짚은 채 혼자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골아픈 내분마저도 모두 수습하고 당당한 ‘지도자’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자신의 곁에 이젠 ‘아랫사람’이 아닌 가족, 동반자로서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래, 될 거야.”
샤미르는 자기암시를 주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될 날만을 기다리며.
그날, 샤미르는 성전 동안의 논공행상, 그리고 새로운 콜로니 정치조직의 초안을 전격 발표했다.
그는 ‘성전의 해’를 승리로 이끈 사령관 오르마즈를 제1공신으로 선포했고, 그에게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종신토록 유지할 수 있다’는 특별한 명예까지 문서로써 덧붙여 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상징으로 한때 대신관이 타던 말 ‘절영’과 갑주를 손수 하사했다.
그리고 오르마즈에 뒤이은 제2공신으로는 민병대 특무대를 이끌고 성전 승리의 숨은 주역 역할을 해 주었던 베흔 소장, 그리고 성전 초기까지 나름대로 활약을 했던 옛 강경파 수장 슈엘러 쉐너 예비역 중장을 지명했다.
특이한 것이라면 얼마 전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던 쉐너 중장의 공신 지명이었다. 그는 한때 강경파의 수장이었지만 이제는 실권을 잃고 물러난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이었다. 그는 다른 강경파 장군들과는 달리 군벌도 아니었고, 딱히 가진 지방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강경파에 ‘공신 한 자리’쯤 배정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샤미르가 그를 지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보니, 그의 공신 지명에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다름아닌 강경파들 스스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금 수장인 굴부딘 헤크마 장군이 제2공신이 되기를 원했지만 샤미르는 그에게 성전 막판에야 제 값을 한 사람을 2공신으로 삼을 수는 없다며 제4공신을 수여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샤미르의 새 ‘통치체제’ 또한 강경파들을 악 소리 지르게 만들었다.
그는 남극을 교단의 직할령으로, 북극은 제니안의 직할령으로 삼고 나머지 지역에서의 정치적 사안에는 종교집단이 손을 대지 않는다는, 신-정 분리의 공화제 통치안을 전격 발표했다.
따라서 이번 안은 교단이 정치에서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그동안 유교집단 제니안과 정치집단 TSG 민병대 양쪽 수장을 겸하고 있던 샤미르 역시 제니안과의 연계를 끊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연합 의회’의 의장 신분으로 오직 ‘정치적 수장’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하지만 기존 정치체계를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는 이런 초안은 봉건제 국가를 원했던 강경파들의 기대에는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물론 샤미르는 이들에게 각 지역 지사, 연합의회 의원 직위를 수여하겠다고 밝혔지만, 그들이 원한 건 자신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왕국이었지, 지도자 밑에서 고작해야 지방관료로 남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강경파들의 불만이 커져가는 가운데,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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