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66화 (465/1,132)

< -- 466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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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년, 누가 그랬는지 잘 뒈졌네.”

일라드가 가리킨 곳을 향해 황급히 달려가던 오르마즈는 누군가의 욕설에 순간 다리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잠시 멍해졌던 오르마즈는 갑자기 악을 쓰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켜! 비키지 못해!”

오르마즈를 따라온 십여명의 호위병들이 그 냄새나는 수용자들을 거칠게 밀어냈다. 민병대 병사들이 그들을 필사적으로 쫓아냈지만 사람들의 욕설이 여전히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어차피 뒈질 년이었는데 뭐!”

“교단 놈들하고 잘났다고 붙어먹더니!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

수십의 군중들을 헤치고 마당에 뛰쳐든 오르마즈의 앞에는 이미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더럽혀진 시체 한 구가 놓여있었다.

“어머니?.......어머니?”

각진 얼굴, 흰자위가 드러난 채 반쯤 열린 눈, 크지 않은 체격은 오르마즈의 기억에 남아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항상 오르마즈만을 생각해 주었던, 이 맏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웬 여자 한 명이 악을 쓰며 그 시체를 몸으로 감싸고 있었다. 오르마즈의 손에 들려 있던 낡은 로켓이 미끄러져 바닥에 굴렀다.

“엄마.......엄마........”

오르마즈는 힘없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36년간 이 날만을 기다렸을 어머니는 목에 더러운 노끈이 묶인 채 죽은 시체가 되어 사람들의 욕설과 저주 속에서 딸을 맞아주고 있었다. 죽은지 몇 분 되지 않은 듯, 아직 온기마저도 느껴질 것 같았다.

“엄마.......”

오르마즈는 당장이라도 혈색이 돌며 벌떡 일어날 듯한 그리운 어머니의 뺨을 말없이 더듬었다. 채 굳지도 않은 어머니의 뺨은 여전히 포근했다. 멍해진 오르마즈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날 좀 봐요.......날 좀 보라고요.......”

오르마즈는 어머니의 얼굴에 뺨을 부비며 바보처럼 중얼거렸지만 그의 식은 몸에서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왜! 36년이나 기다려 놓고 이렇게 죽어버리면 어떡하냐고요! 좀 일어나요!”

갑자기 표정이 일그러진 오르마즈가 시체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악을 쓰고 울부짖었다. 미친 사람처럼 한참동안 시체를 흔들던 그는 결국 축 늘어진 어머니의 작은 몸을 품에 안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엄마, 엄마.......”

주변을 둘러선 그의 다섯 동생들은 어머니의 시체를 안고 넋을 놓은 채 울고 있는 맏이에게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36년만에 다시 상봉한 이 가족 사이에서는 그렇게 한참 동안, 차가운 침묵과 눈물, 공포만이 오갔다.

“도대체......”

어머니의 더러워진 얼굴을 눈물로 닦아낸 오르마즈가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다섯 동생들을 노려보며 소름끼칠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작자의 소행이냐.”

오르마즈의 살기 띤 눈동자에 잠시 움찔한 일라드가 뒤에 서 있던 다른 동생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르마즈의 슬픔은 이제 그냥 슬픔 정도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어떤 개새끼 소행이냐고! 내 그 새끼를 이 자리에서 토막을 쳐 죽여 버릴 테다!”

오르마즈가 이번엔 이곳 수용소를 정리하던 민병대 장교를 노려보며 물었다. 오르마즈의 물음에 그 장교 역시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비록 이런저런 안 좋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어쨌든 아지드는 사령관이며 원수인 오르마즈의 친모였다.

“외부인이 못 드나들게 경비병을 5명이나 두었는데 이런 일이.......”

장교가 더듬거리며 변명했지만 오르마즈의 노기만 더 돋웠을 뿐이었다.

“외부인이 안 그랬으면 자살이라도 하셨다는 거냐! 저 작자들 중에 어떤 놈이 어머니 목을 졸랐을 거 아니냐! 저 빌어먹을 개새끼들 구해 준 게 누군데........”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던 오르마즈는 대뜸 칼자루를 붙들었다. 지금까지 누군지도 모른 채 시체에 마구 저주를 퍼붓던 이곳 수용자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잠시 전까지만 해도 구세주였던 민병대 병사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서 있었다.

수용자 중 한 노인이 손을 모으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저희는 그냥.......와 봤더니 이미 죽어 있었고.......”

“누구 짓이냐고 물었다. 일라드.”

오르마즈가 이를 갈며 다시 물었다. 일라드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나도 몰라요. 그냥.......집안에 있다가 비스가 소리를 질러서 나와 봤더니 어머니는 이미......”

일라드가 둘째 누이동생에게 눈짓을 보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아래 동생들도 모두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 그들은 오르마즈의 매서운 눈길을 의식한 듯 하나둘씩 급히 자리를 피했다. 오르마즈는 저들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 오르 언니.......”

오르마즈는 누군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음성으로 자신을 ‘언니’라 부르자 눈을 번쩍 치켜떴다. 지금까지 바닥에서 어머니의 시체를 지키던 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더러운 옷차림의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네가.......”

오르마즈 자신과 똑같은 빛깔의 그레이오팔 눈동자,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마에서 빛나던 것과 같은 파란빛 다하카르의 문장이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사람들의 저주 속에서 어머니의 시체를 혼자 지키느라 온몸을 짓밟혀 더러워져 있었지만 어머니가 원했던 그대로, 생김새, 외모 모두 오르마즈를 꼭 빼닮은 모습이었다.

“세네피스?”

“어머니는........”

세네피스는 바닥에 누운 어머니의 목을 껴안으며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선 오르마즈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순간 핏기가 사라진 오르마즈는 그대로 호흡을 멎고 말았다.

“허, 일찍도 왔다?”

반쯤 혀가 꼬인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른 아버지 투르케스크가 지금껏 가족들이 살았다는 집 문을 홱 열며 모습을 나타냈다.

제니안 운영위원으로 있는 저 한심한 아버지는 ‘성깔’과 ‘고집’ 빼면 아무 것도 없는 남자였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딱히 학문적인 소양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그가 고위급 운영위원으로 있는 것도 TSG창립자였던 타리프 카파키의 손자에 대한 배려일 뿐, 그가 대단하게 해 놓은 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투르케스크가 거의 비어버린 술병을 쥔 채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년 집 안에 술까지 챙겨뒀더군. 어떤 놈 잔에 부어주려고 그랬을까? 아마 나는 아니었을 거야. 빌어먹을 갈보년. 그래, 나라도 먹어주지.”

그때까지도 어머니의 시체를 안고 있던 세네피스는 어느새 오르마즈의 입술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와,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등에 솟구친 거친 힘줄을 보며 겁에 질린 듯 조금 물러났다. 당황한 둘째동생 비스가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의 손목을 재빨리 붙들며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아, 아버지,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어머니가 오늘 오르 언니 오면 술상이라도 차려줘야 된다고 아침에 민병대 병사한테 얻어 온........”

하지만 거의 만취한 투르케스크는 딸을 거칠게 밀어내며 계속 떠들었다.

“뭐? 저년이 민병대 병사하고도 놀아났다고? 하, 가지가지 했구나. 그래, 교단 놈하고 붙어먹은 갈보년이 민병대라고 못 붙어먹겠냐? 유학자의 아내 된 여자가 외간남자하고 신났다고 붙어먹었으니 죽어도 싸지. 지가 아내 된 도리를 저버리고 수십 놈하고 놀아났는데 저런 게 짐승이지 사람이냐? 퉤.”

투르케스크가 빈 술병을 내던지며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저 창녀같은 년 때문에 동료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었어. 씨발.”

투르케스크가 나머지 술을 벌컥 들이키며 죽은 아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아니 저 남자의 저런 분별없는 막말이 스스로 저지른 죄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소행을 합리화시키려는 마지막 발악이라는 것을.

투르케스크는 아지드의 시체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있던 오르마즈를 가리키며 대뜸 짜증을 부렸다.

“네 어미 시체는 네가 알아서 치워, 난 저런 건 손대기 싫으니까.”

“네 주제도 모르는 놈은 그럼 인간이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르마즈는 흐느적거리는 아버지 투르케스크를 향해 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의 호위병들도, 동생들도 그를 말릴 여유가 없었다.

“욱!”

순식간에 턱을 얻어맞은 투르케스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르마즈는 그의 멱살을 붙든 채 잠시 파르르 떨었다. 그는 손에 힘을 꽉 주며 이 비정한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식들 앞에서 그 어미를 죽여서 속이 시원하더냐? 이 살인마야.”

오르마즈의 기세에 순간 파랗게 질린 투르케스크는 어깨를 움츠린 채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놈의 도리 타령 해가면서 줄창 책이나 읽어대고 있었지 넌 네 손으로 자식들 한 번이라도 먹여 살려 봤냐? 자식들 굶다가 병 걸려 앓아누워도 시끄럽다고 짜증이나 냈지 그 더러운 낯짝이나 들이밀어 봤냐? 그래, 어머니는 자식들 살리려고 당신 몸을 팔았는지 모르지만 네놈은 비겁하게 처자식을 팔았어. 그래놓고 네가 무슨 낯짝으로 어머니 목을 졸랐냐?”

오르마즈는 자꾸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이 칼자루 주변에서 몇 번이나 오갔지만 차마 뽑을 수는 없었다.

“누나, 누나 제발!”

놀란 동생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오르마즈와 아버지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오르마즈는 두 남동생들에게 팔이 붙들린 채 미친 사람처럼 마구 소리를 질렀다.

“왜.......왜 저 따위 남자하고 결혼하셨나요......”

온몸에서 힘이 빠진 오르마즈는 더러운 흙바닥에 쓰러진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차피 나타나지도 않을 아버지를 위해 식탁에는 항상 그 몫의 음식이 놓여있었다. 가장이 밖에서 무시당하면 안 된다며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를 위해서만 새 옷을 사셨고, 자식들은 아버지 입고 버린 것을 뜯어 고친 것만 입어야 했다.

저 냉담하고 무뚝뚝한 남편은 그런 아내와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건네준 일조차 없었지만 어머니는 ‘알고 보면 속정이 깊은 분이야.’라는 말로 자식들을 달래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말로 몸을 팔아 수용소 안에서 그나마 살 만한 대우를 받았는지 따위는 오르마즈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그는 가족들만 살릴 수 있다면 더한 일이라도 기꺼이 했을 헌신적인 아내였고 어머니였다.

“엄마.......엄마........”

반쯤 이성을 잃고 울부짖는 오르마즈에게 그 누구도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단 한 명, 조금 전까지도 어머니 아지드의 시체를 부여안고 있던 한 명을 제외하고.

그는 품 속에서 누더기 광목을 찢은 손수건을 꺼내 이 낯선 ‘맏언니’의 젖은 눈가를 정성껏 닦아주었다. 35살, 평생을 이 지옥만 보고 자라왔을 막내 동생의 얼굴에는 야무짐, 그리고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동물적인 의지가 어려 있었다.

“세네피스.......”

무슨 이유엔지, 동생의 얼굴 위로 그다지 닮지도 않은 생전의 어머니 얼굴이 그대로 겹쳐보였다. 오르마즈는 자신의 동생이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더러운 얼굴과 누추한 옷 속에 그 아름다움이 감춰져 있지는 하지만.

오르마즈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짚었다.

“그래.......세네피스. 네가 막내로구나.”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던 오르마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 낯선 동생을 다정하게 품에 안아주었다. 이런 갑작스런 포옹에 잠시 놀랐던 세네피스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무심코 올려보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그대로의 모습이시네요.”

세네피스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포근함과 안도감이 이 ‘낯선 혈육’에게서 느껴져오고 있었다. 그는 마치 연인의 품에 안긴 듯, 두 팔에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꼭 끌어당겼다.

불현듯, 세네피스는 어쩌면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기려 한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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