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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61화 (460/1,132)

< -- 461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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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은 고개를 떨군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찾는 중이라는 말은 곧 현재는 치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네페티가 그의 얼굴에서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페로에게 빨리 회의를 정리하라고 또다시 눈짓을 보냈지만 그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자리에 말없이 앉아있던 밀리타가 파일을 정리하며 보건국장과 모렌 박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훗, 제법 빨리 알아냈군........빌어먹을 리에드 그년만 죽지 않았어도.......’

밀리타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리에드 공주가 먼저 죽지만 않았어도, 이들은 이번 바이러스의 비밀을 아마도 카렐이 관에 누운 후에야 알아냈을 터였다.

‘상관없어.......어차피 저놈들 기술로는 국상 치른 후에야 찾아낼 테니.’

밀리타는 자신의 서류들을 가방에 쑤셔넣고 다시 카렐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저 황제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지금껏 머릿속을 흘러간 그 못된 생각이 순간 하얗게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카렐은 별 말이 없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좀 쉬어야겠다.”

문을 향해 힘없이 걸음을 옮기던 카렐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페로가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렐이 죽음의 위험에 처했다는 것도, 그리고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딸 아메스라는 사실도, 그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학장이 떠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카렐이 떨리는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을 하고는 회의실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금씩 느려져가던 그의 걸음은 채 10발짝을 가지 못했다. 자리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던 카렐은 갑자기 힘이 빠진 듯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폐하! 폐하! 이러시면........”

네페티가 쓰러지는 카렐의 팔을 부둥켜안으며 악을 썼지만 그로서는 카렐의 거구를 혼자 받칠 수가 없었다.

카렐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눈치 채고 제일 먼저 달려든 건 하필 밀리타였다. 비틀거리는 카렐의 가슴을 와락 껴안은 그는 주변에 몰려드는 대신들에게 급히 손을 저었다.

“오염될 수 있으니 접근하지 말아요! 시의! 시의를 불러와!”

전공은 그다지 관계없지만 어쨌든 ‘의사’인 그의 지시에 대신들이 멈칫거리며 물러났다. 밀리타는 불덩이같이 뜨거워진 카렐의 얼굴과 붉게 충혈된 눈을 확인했다.

“호흡을 최대한 청결히 하셔야 하니 이 마스크는 차라리 벗으시는 게 낫겠습니다. 의사가 전용 마스크를 마련해줄 것입니다.”

비틀거리는 카렐을 어깨에 받친 밀리타가 황제의 마스크를 급히 벗겨냈다. 열기가 잔뜩 어린 카렐의 숨결이 얼굴에 와 닿은 순간, 밀리타는 자기도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윽.......”

밀리타는 갑자기 찌르는 듯 아파오기 시작한 가슴을 꽉 붙들었다. 그는 얼떨결에 카렐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괜찮네, 내 잠시 머릿속이 어질했던 것뿐이야.”

카렐이 밀리타의 등을 토닥여주며 뒤로 물러났다.

“힘내십시오, 폐하. 곧 치료약을 찾을 것입니다.”

밀리타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시의들이 도착하자 밀리타는 그제야 자리를 비켜주었다.

황제가 사라진 직후, 회의실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위험천만한 발언을 한 모렌 박사 역시 굳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페로 옆에 있던 제네르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독감이 이전의 독감보다 전염력은 도리어 떨어진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보건국장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제네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 역시 많은 사람과 접하고 황도 이곳저곳을 다 다니고 있지만 독감에 걸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 중 독감에 걸린 사람은 기껏해야 3,4명에 1명꼴입니다. 그런데, 이곳 황도에서 가장 청결하고 관리가 잘 된 황궁에 살고 계시는 4분의 비빈께서 모두 독감에 걸리셨던 것이 단순히 우연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순간 밀리타의 표정에서 잠시 핏기가 사라졌다. 보안국장 루토가 눈을 부릅뜨며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생각해보십시오. 특히나 두 황빈께서는 누구보다 건강한 몸을 가지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분들까지 잠시나마 독감을 앓으셨습니다. 두 분 모두 말씀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총리 페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안국은 당장 이번 독감의 발생 경로를 역추적하도록 해라. 특히 내명부 비빈들에게 독감이 전염된 경로를 추적하도록 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렌 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독감은 아시다시피 공기전염이 가능한데다가 계속 변이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그 출처를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쨌든 할 수 있는 대로 하란 말이야! 4명이나 되니까 무어라도 나올 것 아냐!”

페로가 악을 썼다.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며 보건국장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리고, 너희 놈들, 당장 치료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모조리 목을 쳐서 광장에 내다 걸 줄 알아라.”

“하, 하오나.......”

“진정하십시오, 총리 각하. 지금 흥분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제네르가 페로를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모렌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은 2차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을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내의원에 지시해서 150층 출입자들의 건강상태를 모두 점검하고 공조설비를 보강하고 대대적인 살균작업을 실시해야 합니다. 일단 치료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을 벌어? 시간을 번다고? 무슨 시간? 상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페로는 자꾸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이야기하는 모렌 박사에게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흥분한 페로의 고함소리와 그를 말리는 제네르, 그리고 여전히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모렌 박사의 말다툼 속에서 회의실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신들의 말다툼으로 온통 혼란에 빠져버린 회의실을 뒤로 하고 조용히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혈통의 저주야. 그것뿐이지 내 잘못이 아냐.......”

밀리타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옮겼다.

“당신네가 S를 받아들일 때부터 예고된 저주일 뿐이라고........샤미르처럼.......그래, 내 잘못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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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미르는 오르마즈가 운구해 온 에르네스토의 시체를 지켜보며 무력하게 두 손으로 유리벽을 짚고 있었다. 모든 판단력을 잃은 식물인간처럼, 그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여윈 두 손은 유리벽을 짚은 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따뜻한 손을 맞대어 줄 아버지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에게 부모가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떠났고, 이제 아버지마저 차갑게 식은 모습으로 그의 앞에 누워있었다. 그 모두가 교단, 혹은 코메트의 소행이었다.

오르마즈가 애써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규정에 따라 두 분의 마님들과 케레사스 솔로스 중장이 장례절차를 진행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주관하실 형편이 되지 아니하니......”

‘장례’라는 말에 샤미르가 눈을 부릅뜨며 갑자기 이를 갈았다.

“다 필요 없어. 다.......아무도 저분한테 손댈 수 없단 말이다!”

순간 샤미르가 악을 쓰고 울부짖으며 주먹으로 유리벽을 꽝 후려쳤다. 순간 깜짝 놀란 오르마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가 장남인데 멋대로 장례를 치른다는 거야!”

뒤에 꿇어앉아 있던 여자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붙들 때까지 그는 몇 번이나 유리벽을 계속 두들겼다. 하지만 어디에서 괴력이 솟는지, 그는 여자마저도 거칠게 동댕이치며 계속 난동을 부렸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여자가 유리벽을 두들기며 오르마즈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하기 전 항상 건강을 확인했던 에르네스토와는 달리, 오르마즈는 저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역시 지금 몸이 성치 않았다.

“살인자들을 잡아와! 다 죽여 버릴 테다! 다 죽여 버릴 거라고!”

“젠장,”

누워 있는 에르네스토의 시체를 잠시 돌아보았던 오르마즈는 결국 옷을 벗어던지며 튜브 옆 출입문에 뛰어들었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조그만 전실(前室)에는 살균시설과 여분의 위생복이 걸려있었다. 사방에서 뿜어오는 씁쓸한 소독액과 가스를 뒤집어쓴 채 기다리는 와중에도 샤미르의 난동은 계속되었다. 볼트를 갓 뽑아낸 등과 다리의 상처가 지독하게 쓰라렸다. 2분이라는 소독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빨리, 빨리.”

잠시 후, 삑 하며 부저가 울린 순간, 오르마즈는 소독액도 채 닦아내지 않은 채 걸려 있던 위생복을 무작정 몸에 걸치고 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이젤을 막 집어던지려던 이 청년의 목을 한쪽 팔로 꽉 얽어버렸다.

“뭐야!”

샤미르가 악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둘의 눈이 처음으로, 아니 정확히는 유리벽 없이 처음으로 마주친 순간, 오르마즈는 그의 발뒤축을 힘껏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샤미르는 욱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쿠션이 깔린 바닥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행여 목이나 머리를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르마즈는 그의 뒤통수를 얼른 손바닥으로 받쳤다.

“후우.”

오르마즈가 급히 쓰느라 비뚤어진 마스크를 다시 고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 꽉 눌린 샤미르의 턱이 마치 울먹이듯 떨리고 있었다. 오르마즈의 회색빛 눈동자를 올려보며 벌벌 떨고만 있던 샤미르는 결국 고개를 뒤로 떨어뜨리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요, 우십시오. 그 편이 낫습니다.”

샤미르는 아버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반복해 되뇌며 바닥을 온통 눈물로 적셨다. 오르마즈는 그제야 샤미르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천장에서 다시 삐삐거리며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더러웠던가.”

오르마즈가 씁쓸한 표정으로 절룩거리며 다시 문을 향했다. 사실 푸엘 숲의 그 아수라장에서 돌아와 아직 씻지조차 못한 상황이었다. 소독약품으로 온몸에 칠을 했지만 그 역시도 피로 낭자했던 회담장의 흔적을 모두 닦아내기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막 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에서 샤미르가 중얼거리는 저주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여 버릴 테다. 남김없이 다 죽일 거야.”

오르마즈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 문제는 장례 후에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널 대장(大將)으로 승진시키겠다.”

'대장'이라는 말에 오르마즈가 멈칫거렸다.

지금껏 민병대는 TSG지도자가 총사령관 대장을 겸하는 체계였고, 그 휘하의 정보 및 헌병사령관 오르마즈와 야전사령관인 슈엘러 쉐너, 군수지원사령관 케레사스 솔로스까지 총 3명의 중장들이 실질적으로 군을 이끌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대장이 된다는 건 지도자가 아닌, 민병대의 사실상 첫 번째 총사령관이 된다는 것과 같았다.

눈물의 기운을 애써 씻어낸 샤미르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이어졌다.

“통수권자로서 네게 명하겠다. 코메트라는 존재의 씨를 말려버려라.”

오르마즈는 잠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교단’이 아닌 ‘코메트’라고 하셨습니까.”

“이번 일로 교단은 어차피 분열될 것 아닌가.......그래, 교단 내에도 협상을 반대하는 강경세력이 있으니 이번 일을 꾸몄는지 모르지. 어쩌면 우리 측 강경파가 연계했을 수도 있고. 내가 왜 선임자인 쉐너 중장을 대장으로 삼지 않는지를 모르겠는가.”

오르마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도 에르네스토의 죽음에 누가 관계되었는지는 지금 들출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이야 어쨌든, 표면적으로 손을 더럽힌 건 저쪽이었고, ‘먼저’ 내분을 일으킬 것도 이쪽이 아닌, 적이었다. 샤미르의 공격 명령은 바로 이런 점을 짚어낸 것이었다.

샤미르가 눈물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적의 12개 교단들 중 어딘가가 이번 일을 승인했을 테지. 그네들은 수나 마구스가 죽으면서 2순위 트라카 교단까지 후계권 내분에 휩싸여주기를 바랐을 거야. 그러면서 정작 이번 사건은 자기들 내부에서는 어영부영 덮어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수나 마구스가 살았으니 이제와 ‘내가 했다’고 누구도 감히 나서지를 못할 거다. 그래, 누구의 지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족인 코메트만 나쁜 놈이 된 거지.”

오르마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미쳐 날뛰던 저 청년은 이미 상황을 너무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어쨌든 샤미르는 교단을 적으로 삼는 바보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오르마즈가 힘없이 말했다.

“그 누구도 책임지는 자가 없는 집단 지도체제의 가장 큰 맹점이죠. 최소한 대신관이 없고 교단이 분열된 지금은.”

샤미르가 다시 물었다.

“내 명령대로 할 수 있나?”

“전하께서 지금처럼 냉정함과 현명함을 계속 유지해 주신다면.”

오르마즈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샤미르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눈물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단호하고 힘이 넘쳤다.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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