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60 회: 파트3. 유리벽 너머 수선화 한 송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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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을 숨어 지낸 병실에서 나와 쿠트라스 성당 제2별관으로 처음 안내된 구르베스는 이곳이 왜 ‘비신도 출입금지’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가로세로 1스타디아쯤 되어 보이는 이 거대한 대리석조 홀 중앙에는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움직이는 빛’ 혜성 문양의 조각상과 큰 화로가 있었고 그 사방으로 수백 개의 방석들이 줄을 맞추어 놓여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교도들의 예배당이었다.
“숙소는 저 안쪽 자료실 옆에 있어요. 뭐 예상은 하셨겠지만 그다지 화려한 방은 아니에요. 책상 하나하고 침대 하나가 전부죠.”
니사가 예배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단은 첫 번째 대멸망으로 고향 행성의 생명이 거의 절멸한 직후에 대안으로 등장했어요. 제가 받드는 트라카께서는 빛과 용기를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공포와 어둠을 주관하시는 다하카르와 상보관계에 있으신 분이시죠. 지렛대의 무게를 맞추듯, 두 분의 번갈아 내딛는 걸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입니다.......최소한 우리의 믿음에 따르자면요.”
니사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짧게 말꼬리를 붙였다.
니사의 설명에 괜한 거부감이 동한 구르베스가 심술궂게 트집을 잡았다.
“당신들은 그럼 그런 신이 번쩍거리는 옷이라도 입고 하늘에서 떡 하니 나타나기를 바라는 겁니까?”
구르베스의 물음에 니사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흔히 생각하는 ‘사교도’의 이미지라는 게 하늘에서 전지전능한 신이 엄숙한 얼굴로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몽상가들이라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전 성직자이지만 동시에 의사고 과학자죠. 그렇게 친절하게 존재를 알려주시는 신이 세상에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마 대신관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백일 단식기도를 드려도 신께서는 손톱 하나 보여주지 않으실걸요.”
구르베스가 살짝 눈을 흘겼다.
“종교의 신성함을 스스로 부정하시는 건가요?”
“신께서 나타나시든 말든 그건 신성함과는 별개의 문제에요. 물론 신도 중에는 그렇게 믿고 있는 분들도 꽤 되지만 최소한 성직자 중에는 제발 얼굴 좀 보여 달라고 신께 기도를 올릴 넋 나간 사람은 없어요. 우리에게는 신이 표상하는 추상적인 가치 자체가 중요할 뿐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받드는 건 아니에요. 신께서 대놓고 떠받들어지기를 바라셨다면 몫 좋은 신전 하나씩 차지하고 사방에서 기적을 팔고 계시지 이런 조각상 따위가 당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걸 원치는 않으시겠죠.”
니사가 바로 앞의 혜성 모양 조각상을 가리키며 장난스레 말했다. 구르베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럼 당신들이 받들던 마구스들은......”
“우리가 받드는 건 인간의 ‘정신’, 그리고 신성한 ‘육체’, 세상을 현명하게 조절하는 ‘신’이죠.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매일 보고 느낄 수 있지만 마지막은 그렇지 못해요. 사람들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려 하지만 우리의 세계에서는 각각의 가치를 표상하는 열 두 분의 ‘마구스’께서 신의 자격으로 세상을 조절하십니다. 한 명의 마구스가 되시는 순간부터 외부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도 한 명의 사람이 아닌, ‘신’로서의 역할 수행에만 충실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구스들은 어차피.......”
“그래요, 그분들은 모두 돌아가셨죠.......그만 하죠. 저도 그맘때 일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니사는 구르베스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그에게 따라오라며 손짓을 보냈다.
“청소나 정리 같은 건 부설 신학교 학생들이 봉사 차원에서 하고 있으니 그런 신경쓰지 않으셔도 될 거에요. 구르베스는 여기 상주하면서 자료실 정리를 해 주시면 돼요. 자료실에는 경전하고 옛 역사 자료들이 많이 있으니 전공에도 나름대로 도움이 많이 될 거에요.”
“그런데.......여기가 2별관이면 1별관은 어딨죠?”
구르베스의 느닷없는 물음에 니사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건 좀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리고 이곳처럼 예배당입니다.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구조는 비슷하고요, 지금은 다하카르 신의 예배당으로 쓰이고 있죠. 하지만 그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왜죠? 어차피 신도로 등록까지 되었는데.......”
“평신도는 등록되지 않은 다른 교단 성소에 드나드는 게 금지되어 있어요. 구르베스는 우리 트라카 교단의 등록신도고요. 괜히 그곳에 갔다가 우리 교단 전체가 낭패를 겪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지금 우리는 약자의 입장이니까요.”
“아참.”
구르베스를 데리고 자료실로 향하던 니사가 무언가 생각난 듯 돌아섰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밤에 여길 떠나게 되었어요. 앞으로 얼마간 구르베스를 보기 어려울 것 같네요.”
“예?”
이곳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던 니사의 느닷없는 말에 구르베스가 순간 당황했다.
“이 병원을 떠나신다고요?”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아케메니아.......아니, 황제령에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제가 꼭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거기 있거든요. 조만간 구르베스와도 다시 만날 것 같긴 하지만요.”
니사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는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구르베스와 다시 만난다고 말한 것인지 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럼 전 이제 누구와.......”
“지난번 병실에서 만나셨던 그 분께서 이제 구르베스를 직접 보호해 주실 겁니다.”
“그분은 누구신지.......”
구르베스는 어딘지 차갑던 그때 그 중년 여인을 머리에 떠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니사는 이번에도 웃음만 지으며 정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구르베스도 언젠가 알게 되실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분께선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요. 어쨌든.......저 같은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분이시라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구르베스는 그간 나름대로 친분을 쌓아 온 이 선한 의사와 헤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섭섭했지만 그렇다고 아직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서 무작정 기다린다고 수우가 나타나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엔지, 이제는 이곳 쿠트라스, 아니 이 성소를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이곳이 어쩌면 무척이나 소중한 곳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평소처럼 대소신료들이 모두 모이는 아침 회의마저도 취소한 카렐은 고위 측근들만을 137층의 소회의실로 따로 불러 모았다. 어제 저녁부터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황제의 모습에 내내 의아해하던 대신들은 황비 네페티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에 순간 아연실색했다.
“폐, 폐하........”
구완 슈벨 부총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툼한 털망토를 어깨에 두른 카렐은 코까지 완전히 가리는 환자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카렐을 옥좌에 앉혀 준 네페티는 그의 망토를 잘 여미어 주고는 그 옆의 황후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카렐의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잠시 정적에 파묻힌 이 소회의실을 흔들 뿐이었다.
“황후는 어찌 된 거냐.”
‘황후’ 자리에 앉아있는 네페티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페로가 우베의 팔을 덥석 잡으며 작은 소리로 따져 물었다.
“어제 드신 술이 아직 덜 깨신 것 같습니다. 황후전에서 숙취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고 연락이 와서 황비 전하께서 대신 나오셨습니다.”
“빌어먹을........그년이 제정신인가.......”
페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철딱서니 없는 황후 아메스 대신 자리를 잡은 네페티는 서부식의 단정한 아바야 차림에 히잡(hijab)으로 얼굴까지 반쯤 가리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황제 앞이 아니고서는 절대 저 히잡을 벗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유별난 미모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황제도 목석이 아닌 한 이런 사람에게 정이 가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술---아메스가 유달리 좋아하는---은 물론이고 품위를 흩트리는 일체의 행동도 모두 접은 채 서부 쪽에서 들어온 정보를 정리하고 아랫사람 다독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으면서 내명부 내에서도 4비빈 중 가장 훌륭한 평판을 얻고 있었다.
“폐하, 시의가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라 하였으니 빨리 끝내고 침소로 돌아가시옵소서.”
네페티가 카렐의 손등을 살며시 짚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긴 한데 오늘은 안건이 조금 많군요.”
카렐은 우베가 내민 파일을 뒤적거리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 회의처럼 각부 대신들이 올리는 업무보고를 끝낸 후, 카렐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입구 쪽에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모렌 박사와, 어딘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한 사람이 들어와 절을 올렸다.
“보, 보건국장이옵니다.”
잠시 입가를 실룩거리던 카렐이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내 리에드 공주의 부검 결과를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 하였거늘, 지금 며칠이 더 지났는지 알기나 하는가. 그 일이 얼마나.......”
카렐이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다시 찢어질 듯 기침을 했다. 당황한 네페티가 얼른 그의 얼굴과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카렐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콜록거리며 잠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폐하, 제발, 심기를 가라앉히시옵소서. 가능하다면 보고는 내일 듣고 지금은.......”
“됐습니다. 이게 마지막이니 이것만 듣고 들어갈 겁니다.”
가까스로 기침을 가라앉힌 카렐이 숨을 가다듬었다. 그의 이런 모습에 놀랐는지, 조금 전 들어온 보건국장의 표정은 거의 흙빛이 다 되어 있었다.
“그래, 말해 봐라. 공주의 사인이 무엇이더냐. 처음 예상대로 거부반응이었냐?”
카렐이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 그게.......”
황제를 잠시 올려보았던 보건국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독감으로 인한 합병증.......입니다.”
“무어?”
카렐이 막 터져나오려는 기침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아니.......내 듣기로 이번 독감이 그저 예년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것이라 들었는데.......노약자도 아니고 다른 지병도 없던 건강한 공주가.......그것도 치료를 받다가 느닷없이 죽다니.......”
덜덜 떠는 보건국장을 대신해 결국 모렌 박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독감은 보통 독감이 아니옵니다. 아니 정확히는 S혈통에 한해서는 보통 독감이 아니옵니다. 폐하의 증상도 아마도.......”
“네 이년! 어디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격분한 페로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을 카렐이 다시 가로막았다. 잠시 긴장했던 모렌 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조사 결과, 일부 황족의 면역세포에 일반인과 다른 수용체가 있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이번 독감 바이러스는 그 수용체에만 선별 반응해 면역세포를 파괴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렐이 보건국장을 돌아보았다. 보건국장이 이런 결과를 왜 함부로 보고하지 못했는지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사오시안트에 인질로 잡혀 있는 사촌 건연 대군 역시 같은 독감에 걸렸다는 소식은 카렐 역시 들은 일이 있었다. 카렐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니까.......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한 독감 정도로 작용하지만 일부 황족에게는........면역 체계까지도 함께 파괴하는 치명적인 병이라는 건가?”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해 하던 대신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리에드 공주 저하의 경우 혈액제제 투입 때문에 증세가 급격히 진행되었을 뿐,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습니다.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이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면역체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치사에까지 이르는 독감은 소인도 처음 보았습니다.”
카렐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총리, 빨리.......”
당황한 네페티 부인이 회의를 빨리 끝내라며 페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평소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렌 박사는 이번에도 어중간하게 보고를 마무지리 지을 생각은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이런 비슷한 변종 바이러스는 이전에는 전혀 발견된 바가 없습니다. 바이러스의 변이가 본디 예측이 어렵기는 하오나 이렇게 철저하게 선별 작용하는 바이러스의 출현은 수상쩍은 면이 있사옵니다. 행여 악질적인 세력이 폐하, 아니 황족 전체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배양 유포한 바이러스인지를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웅성대고 있던 대신들 사이에 순간 고함이 오가기 시작했다. 작은 소회의실 안은 격분한 대신들과 놀라 우왕좌왕거리는 몇몇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 마디만 묻자.”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 손짓한 카렐이 눈을 천천히 치켜뜨며 물었다.
“치료법은 있는가.”
모렌 박사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특정 세력이 바이러스를 유포한 것이라면 그들은 치료제와 백신 또한 함께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차라리 그쪽을.......”
“나는 우리 기술로 치료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카렐이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잠시 난감해하던 모렌 박사가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찾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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