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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33화 (432/1,132)

< -- 433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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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이 탄현성에서 근위대의 발목을 계속 붙들고 있는 동안에도 황도 공격을 위한 연합군의 거침없는 전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지금껏 성 하나도 제대로 빼앗지 못했지만 수로를 통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암댐을 손에 넣었고, 지금껏 전력에 큰 타격을 입은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투에서는 이기지 못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견제병력을 두고 온 이상, 그들이 등 뒤에 남겨두고 온 주류성, 이암성의 많지 않은 동맹군들이 어떤 걸림돌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동맹군이 연합군과의 첫 번째 수성전을 벌였던 주류성은 공성전을 포기한 제롬의 1군이 떠나가고 난 후로 줄곧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연합군의 첫 번째 표적이었던 주류성은 사르키스의 분전과 남부 5제후 마자리크의 돌연한 이탈 덕에 흥안령 꼭대기에서 여전히 적들의 숨통 한구석을 굳건히 딛고 살아남아 있었다.

제롬과 1군은 성을 포기한 채 다시 북진을 시작했지만, 헤즈 플라칼 경과 2만의 남부연합군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주류성 수비군을 봉쇄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의 남단과 북단을 워낙에 험준한 암릉이 가로막고 있다 보니 봉쇄라고 해 봤자 동서 방향의 비교적 완만한 곳을 막은 것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이들의 역할도 주류성의 수비군이 1군의 후방을 기습하거나 보급로를 교란하는 것을 막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성에서 때때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도망치는 정찰대, 혹은 남북의 암릉을 타고 쥐새끼같이 드나드는 전령들까지 모두 잡아내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그렇게 소규모의 병력만 드나들던 주류성에서 3개 제대, 3백의 장갑보병대가 기습적으로 성을 빠져나온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도 그들이 ‘남북방향 암릉은 대규모 병력 이동은 불가능하다’며 아예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것은 심지어 동료인 주류성 수비군들조차도 한동안 눈치 채지 못했다. 물론, 주류성의 임시 수비군 사령관이 된 베나지 나하스 중랑장 역시 그 문제에 관해 일언반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성을 떠난 3백여 정예병들은 주류성 북쪽의 험준한 바위능선을 넘은 이후 며칠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은 채 흥안령 산자락을 따라 강행군을 해오고 있었다.

“거의 도착했으니 이제 힘을 내라. 도착하면 몇 시간은 잘 수 있다.”

사르키스가 지쳐 비틀거리는 병사의 등을 두드려주며 힘있게 말했다.

제국 제일의 정예병답게, 서부 장갑보병들은 3천 스타디아(450km)에 가까운 살인적인 행군훈련을 종종 받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보통의 전투에서 셔틀이나 수송선을 사용하는 이상, 행군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력 강화라는 부차적인 목적, 그리고 특수 기동군으로서 이번과 같은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행군 거리는 그들이 평소 받던 훈련보다는 그래도 조금 짧은 2700스타디아(400km) 정도였지만  지형이 워낙 험한데다가 일정이 짧은 만큼 별 차이는 없었다. 남자 병사들의 턱은 그새 거뭇거뭇한 수염으로 덮여 있었고, 사르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멋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한 여자 병사들도 시커멓게 타고 거칠어진 얼굴 덕에 언뜻 그 성별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빛이 반사되지 않도록 주머니로 날을 감싼 양손검 혹은 할버드와 방패, 군장을 등에 짊어지고 검게 칠한 갑주를 걸친 그들은 이 흥안령 빽빽한 삼림 속에 몸을 감춘 채 능선을 타고 소리없는 북진을 계속했다.

“적 1군 놈들은 어디쯤 왔을까요?”

함께 따라온 부장이 힘든 기색을 감추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산 아래, 욱리하변을 가리켰다.

“글쎄, 우리 절반 정도 속도로 행군하고 있으니 저 뒤에 어디쯤 있겠지. 똑같이 주류성에서 출발한 우리가 한참 앞서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하려나.”

별 우습지도 않은 한 마디에 몇몇 병사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임무가 도대체 뭡니까?”

부장의 질문에 사르키스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피식 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이번 작전은 그의 부대 몫은 아니었다. 이들이 주류성에서 나온 원래 목적은 이곳 흥안령의 험한 산세를 이용해 1군 후방에서 보급선 교란을 위한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네피가 지키던 이암댐이 사실상 마누엘이 이끄는 적 3군의 손에 떨어졌고, 댐을 장악한 3군이 서성을 내버려둔 채 남진을 강행하면서 이들의 임무는 돌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렇게 황제 카렐의 특명을 받은 사르키스는 그들의 원래 임무를 접어두고 필사의 행군을 감행해 이제는 그들이 원래 있던 주류성이 아닌, 이암성에 도리어 더 가까이 와 있었다.

이번 행군의 목표지점은 이암성 남쪽 2천 스타디아(300km) 지점, 연합군의 도하 예정지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르키스가 일선 장교들에게 알려준 건 목표지점, 그리고 도달해야 할 날짜뿐이었다. 그 이후의 ‘임무’는 오직 사르키스, 그리고 중간에 전령으로 합류한 페로 가디언 페다이의 머릿속에만 들어있었다.

“다 왔으니 어차피 곧 말씀 해 주시겠죠.”

부장이 풀린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장군님, 장군님.”

선발대의 병사 중 한 명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르키스에게 달려왔다. 특별히 부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 그를 따라온 3백여 병사들 중 비틀거리지 않고 제대로 뛸 수 있는 병사는 어차피 거의 없을 테니.

그래도 저렇게 풀린 다리로 기를 쓰며 왔다갔다 연락을 해야 하는 것도 행여 적의 청음초나 감청부대에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할룩스 사용을 일절 금지시킨 덕분이었다.

“전방 10스타디아(1.5km) 지점에 냇물 2개가 만나 내려가는 작은 계곡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 지점이 맞는지 확인해주십시오.”

“이제야 다 왔나.”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사르키스는 남은 물을 얼굴에 쏟아 부으며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선발대는 주변에 적 정찰병이나 초소가 혹시 없는지 확인하고 야영장소의 안전을 확보해라.”

‘야영’이라는 말에 병사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평소에 야영 소리를 듣는다면 얼굴부터 찡그리겠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맨 땅바닥이어도 몸만 대고 잘 수 있다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이 지독한 행군의 최종 목표지점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고.

“여긴 적군의 도하 예상지점보다 더 북쪽이 아닙니까?”

“응.”

부관의 물음에 사르키스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1군은 어차피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않을 텐데 여기서 도대체 뭘.......”

무어라 더 물으려던 부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멀리 북쪽 욱리하변에 시커멓게 무언가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1군이 여기까지 올라오지는 않지만 그 1군을 만나러 내려오는 또다른 적군이 있지.”

사르키스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욱리하 상류를 타고 남하하고 있는 저들은 지난번 자신들이 주류성에서 맞아 싸웠던 제롬의 1군이 아니었다.

“마누엘 놈이 이끄는 적 3군이야. 이암댐을 함락시키고 도하하러 내려오고 있는 놈들이지. 그리고 저놈들 조금 뒤에 부교 자재를 지닌 수송대가 따라오고 있어.”

사르키스가 예상했다는 듯 씨익 웃음까지 지었다. 병사들과 장교들 모두, 이번 행군의 목표가 적 3군, 아니 정확히는 그 후방의 수송대임을 깨달았다.

“저놈들은 무시하고 우리는 10 스타디아만 더 북진해서 쉬도록 하자. 10시간 정도 쉴 수 있을 테니까 ”

사르키스가 짐짓 태연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어느새 긴장으로 바싹 굳어져 있었다.

“가거든 한숨 자고 일어나서 남은 비상식량 다 털어서 배들 채우도록 해. 당장 전투에 필요 없는 장비는 모두 땅에 파묻고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 어차피 더 이상은 필요도 없어.”

갑자기 말이 없어진 병사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산꼭대기를 타고 북진하는 사르키스의 장갑보병들과, 이들의 존재를 까맣게 모른 채 산 아래에서 욱리하를 타고 남진하는 마누엘의 3군이 서로의 갈리는 운명처럼 교차했다.

8시간 정도의 꿀 같은, 그러면서도 불안한 휴식시간을 보낸 사르키스의 장갑보병들은 욱리하가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매복해 조금 아래의 험한 산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작전은 원래 황궁에 주둔하던 아메샤 스펜타의 크샤트라 연대, 혹은 이암성의 북부보병들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안에 깔린 근위대 세작과 정찰병들 때문에 수백이나 되는 병력이 황성에서 나와 욱리하 반대편에 비밀리에 상륙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그리고 이암성 역시 이암호의 통제권이 적의 손에 넘어가면서 나오는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들이 주류성에서 무리를 해 가며 이곳까지 북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이곳에 도착한 장갑보병들은 산 위에서 또 다른 적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 수송대 치곤 더럽게 많군.”

사르키스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옆에 함께 있던 페다이가 자료를 살피며 대답했다.

“추정되는 적 전투 병력은 약 5천, 지휘관은 3군 부사령관 케세크 플라칼 경입니다.”

“꽤나 익숙한 이름이군.”

사르키스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가혹한 행군으로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잠시간의 휴식으로 일단 힘을 냈지만 이미 누적된 피로로 저들은 평소의 채 절반도 싸우지 못하고 지쳐 쓰러질 것이 뻔했다. 이런 장거리 행군은 원칙적으로 작전 수행 후 탈출을 위한 것이었지 행군해서 싸우라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가문 소속인데?”

사르키스가 거칠어진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델루지 가와 플라칼 가에서 온 잘 훈련된 중장보병과 경보병입니다. 거기에 근위대 가디언 약간, 3천여의 사역병과 그보다 훨씬 많은 노예, 교량 자재를 실은 대형 화물차량이 100대 정도입니다. 나머지 중, 소형 보급차량은 본대와 함께 이미 남하했을 테고. 이암성 서성의 분전으로 도로 개통이 지체되면서 대형 차량들은 본대보다 늦게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자락을 타고 유난히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 때문인지, 적 수송대의 행렬은 평지에 비해 눈에 띄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욱리하 건너편에는 우리 동맹군을 돕는 동부 유목민 중기병 2천이 있습니다.”

사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 수송대가 출발할 때부터, 저들은 강 건너편에서 계속 적을 견제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길동무처럼 계속 강을 따라 내려오는 저 기병들 때문에 적 수송대도 강 쪽을 향해 잔뜩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산 쪽의 경계는 약해져 있을 터였다. 아니 그렇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쨌든 욱리하 수로는 배를 장악한 동맹군 쪽이 아직 쥐고 있었고, 동맹군이 맘만 먹는다면 징발한 배들을 동원해 병력을 이쪽에 상륙시키는 것까지는 쉬운 일이었다. 다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세 때문에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을 뿐이었다.

도로를 따라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적 수송대의 행렬을 바라보며 사르키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로켓을 꺼내 마지막으로 열어보았다. 한때 여동생 마리안의 모습이 담겨있던 그곳에는 이제 조카 솔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함께 들어있었다.

“하늘이 도와서 내가 널 지킬 기회를 여러 번 주는구나.”

로켓을 이마에 대고 잠시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다시 목걸이를 품 속 깊이 감추고 병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위장포, 그리고 위장 크림으로 온몸을 검게 칠한 이 정예병들의 모습은 어둠 속에 소리없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곳까지 그들을 버티어 준 무거운 군장마저도 이젠 땅 속 묻혀 쉬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이제 주류성으로 돌아갈 방법조차 없었다. 이번 작전에 성공하고 황궁에 금의환향하던가, 혹은 이곳에 영원히 눕던가, 둘 중의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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