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32 회: Part 2. 석류꽃 속에는 핏빛 씨앗이. -- >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원 191년은 6년간 공포정치의 고삐를 바싹 조여 온 세나우스 2세 황제에게 찾아온 즉위 이래 두 번째의 정치적인 고비였다.
‘공포정치’의 시작 때만 해도 총리 투모카프는 공직사회의 기강 확립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위해 나름대로 원리원칙을 가지고 움직였다. 8번 도시, 2번 도시를 거쳐 결국 황제령 전역을 차례차례 휩쓴 대숙청의 광풍은 2천명이 넘는 숱한 비리혐의자를 골치아픈 재판 따위 없이 깨끗이 제거하고 황제령 내에서 황제의 지배권을 확실히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 세력이 주도가 된 이런 대숙청이 다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억울한 희생자가 줄을 이었고, 그들의 해골로 세워진 탑은 투모카프의 정치생명을 차츰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들 중 2개 가문은 이후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공포정치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황제를 압박한 건 그런 ‘도덕성’ 따위의 문제가 아닌,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이었다. 많은 세금을 내던 황제령의 대 가문들이 줄줄이 파산하거나 학살당하면서 황제령의 세금수입은 뚝 떨어졌고, 로퍼크 가의 채무인수로 잠시 땜질했던 황실의 재정적자도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즉위 100주년이 가까워오는 황제는 이런 문제로 최악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연금 종료를 코앞에 두고 있던 오르마즈가 비공식적인 라인을 통해 ‘시작이 격렬했으니 마무리 또한 뜸을 들이지 말고 단번에 끊으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하는 서한을 황제에게 전달한 것도 이맘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제국을 뒤흔들고 있던 공포정치의 주역, 총리 투모카프가 오르마즈를 처음 만난 건 그의 연금기간이 종료되기 보름쯤 전, 총리의 191년 제후지역 연례 순방 때였다. 외빈들의 모임에 그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오르마즈였지만 연금 해제를 미리 준비하려는 것이었는지, 그는 투모카프를 비롯한 황실 손님들의 접대를 직접 자처해 나섰다.
“결혼하고 부부 자격으로 처음 참석하는 공개 파티인가 보네요.”
술에 반쯤 취한 마에두가 오르마즈의 이마에 쓴 금제 서클렛을 단정하게 고쳐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꼼꼼한 그답게 서클렛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옷소매로 깨끗하게 닦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실 사절단과 북부 제후, 유력가들이 모두 모인, 조금 엄숙한 분위기의 파티였지만 아직 이런 자리의 예법에 그다지 익숙지를 않아서인지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러서 오르마즈를 당혹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마즈가 미처 관심을 두지 못한 사이에 그는 또 과한 술을 마셨는지 잔뜩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안 먹던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니까요.”
오르마즈는 마에두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을 자연스럽게 빼앗아 옆으로 치웠다. 술기운이 반쯤 오른 마에두는 오르마즈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실없이 키득거렸다. 오르마즈가 하인을 손짓해 부르며 말했다.
“취한 것 같으니 마에두 경을 침실에 좀 데려다 주게. 난 여길 비우기 어려울 것 같으니.”
“아직 괜찮다니까요.”
“마에두, 이건 공적인 자리고.......”
“잠깐만, 그냥 잠깐만 사람들 앞에서 이러고 있어 줘요. 사람들 앞에서요.”
마에두가 떨어지기 싫다는 듯 그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파티에 참석한 외빈들의 눈치를 힐끔 살핀 오르마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를 살며시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허허, 거 참, 기본적인 예의도 못 갖춘 한심한 놈이군.”
옆에서 들려온 조금은 탁한 목소리에 오르마즈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흰 비단포 위에 붉은 황소가 새겨진 머플러를 두른 검은 피부의 건장한 남자가 오르마즈와 마에두를 쳐다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게 한 말인가? 총리.”
오르마즈는 행여 마에두가 관심을 가질까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살며시 가리며 돌아섰다. 그는 상대가 당연히 ‘천만에요’ 정도의 대답으로 상황을 수습하고 얼른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보기좋게 어긋났다.
“아아, 그대가 아니고 예법도 모르는 한심한 남편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겠나?”
“지금 예법이라 말했는가?”
오르마즈의 눈꼬리가 순간 치켜올라갔다. 샤미르 리쿠가 만든 제국 예법에 따라, 제1개국공신인 그는 황제 바로 바로 아래의 격을 갖추어 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을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투모카프의 반말과 무례는 여전했다.
“근위대, 저 남자를 데리고 나가라.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이런 자리에 참으로 격을 맞추지 못하는 한심한 남자로구나.”
투모카프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오르마즈가 대뜸 이를 드러냈다.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눈치챈 마에두가 당황한 얼굴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오르마즈가 그런 마에두를 도리어 가까이 잡아 끌어안으며 쏘아붙였다.
“내 남편이 이곳에서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닌 것 같네만, 총리. 예의는 그대가 먼저 찾게나.”
그제야 투모카프에게 달려온 이부대신이 다급한 얼굴로 귀엣말을 건넸다.
“각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저분께선 각하보다 격이 도리어 높으신데 그렇게 하대를 하시면......”
“허, 높아 봤자 뭐 하는가. 이젠 가택연금당한 골방늙은이일 뿐인데. 상께서 저자의 공신위를 빼앗지 않으셨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군.”
투모카프의 큰소리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지금껏 밝던 파티 분위기는 그의 이 오만방자함에 순간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눈치빠른 몇몇 대사들이 바람을 쐰다며 재빨리 자리를 비웠고, 차갑게 굳은 표정의 카파키 가 사람들이 전 총리와 현 총리,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아.......저, 전 들어갈게요.”
자리를 비우려는 마에두를 오르마즈가 다시 잡아끌었다.
“가지 말아요, 마에두. 당신이 잘못한 거 없으니.”
오르마즈가 투모카프, 두 사람의 예리한 눈초리가 잠시 기세싸움을 벌였다.
“투모카프, 왜 이러세요,”
언뜻 폭주하는 듯 보이는 투모카프를 두 번째로 말린 건 그의 배우자인 줄리안 노에누스 경이었다. 정숙하기로 유명한 노에누스 가 출신답게 예의바르고 조용한 성격의 이 귀공자는 오르마즈의 계모, 루다베 노에누스 부인의 남동생이기도 했다.
‘이 새끼, 이젠 내게까지 선전포고하는 건가.’
상대의 눈빛을 읽은 오르마즈가 잠시 머리를 굴렀다. 그가 아는 투모카프는 공식 석상에서 기껏 이런 얼토당토않은 억지 시비를 걸 한심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기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군.’
오르마즈가 마에두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투모카프가 오르마즈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옛날 전쟁에서 얼마나 큰 공훈을 세웠는지는 잘 알지만.......”
“그때 총리는 내 민병대원들을 때려잡고 있지 않았나.”
오르마즈의 반격에 순간 투모카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코메트 진압군 장교 경력은 아직까지 그의 뒤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원죄였다. 오르마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혹시 그걸 눈치 챘나.’
오르마즈는 지난번 자신이 황제에게 보낸 서신이 어쩌면 이자에게까지 흘러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도발하는 것은 오르마즈를 완전히 매장시키겠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투모카프가 술잔을 치켜들며 유난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돌아가는 대로 이자를 공신록에서 제명할 것을 상께 건의드릴 것이야.”
투모카프의 폭탄선언에 자리에 모인 북부 사람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르마즈에 대한 도발은 사실상 북부 전체에 대한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제를 모르는 건 네놈이구나.”
오르마즈의 입가에 엷은 미소와 함께 이런 혼잣말이 맴돌았다.
“공신록의 삭제는 상께서 헤아려 결정하실 터이니 그대는 내 남편에게 조금 전의 무례한 행동을 지금 당장 사과하게.”
“허허, 지금 누가 큰소리를 칠 상황인지.”
오르마즈의 최후통첩에 투모카프가 대뜸 비웃음으로 답했다.
그는 오르마즈에게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는 낮게 속삭였다.
“잘 나가던 때를 잊지 못하는 건 이해하지만 골방늙은이로라도 죽지 않고 살아있고 싶으면 앞으로는 허튼 수작 벌이지 마라. 알겠냐? 네 시기는......”
의기양양하게 떠들던 투모카프는 잠시 호흡을 멎었다. 오르마즈의 손바닥이 마치 연인의 얼굴을 쓰다듬듯 그의 뺨에 살짝 얹혀있었다.
“넌 나처럼 골방늙은이로라도 살 수 있을까?”
투모카프를 향해 갑자기 거북살스러울 만큼 다정한 눈웃음을 지은 오르마즈는 대뜸 그의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장난스러운 키스도 아닌, 혀끝까지 살짝 밀어 넣은 것이 누가 보기에도 깊은 입맞춤이었다.
“흐, 음.”
이 무서운 적수의 느닷없는 키스에 놀란 건 도리어 투모카프였다.
“흐, 음.”
지금껏 이 둘의 팽팽한 대결을 긴장된 얼굴로 쳐다보던 사람들이 대뜸 당혹스런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 둘이 방금 정말로 싸운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평소 오르마즈를 연모하던 투모카프가 남편 마에두를 질투해 과한 심술을 부린 것이라며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키스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원 191년, 3년이나 늘어난 연금기간이 비로소 종료되면서 오르마즈는 카파키 가 군 사령관 겸 북부 군사동맹 의장으로 바로 선출되었다.
아버지 투르케스크 공은 여전히 딸을 미덥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그의 복귀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북부인들과, 가문 내에 아직도 건실하게 자리잡고 있는 오르마즈의 인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딸의 정계 복귀에 가뜩이나 예민해 있던 투르케스크 공을 신경쓰이게 한 또 다른 문제는 오르마즈가 자이센 총리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출처모를 소문이었다.
오르마즈와 투모카프가 공개적인 입맞춤까지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소문은 이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정작 오르마즈 본인과 남편들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주변사람들이 사실 여부를 물을 때마다 오르마즈는 ‘리스트에 또 하나 올렸군’하며 껄껄대기만 했고, 남편들 역시 그이의 이런 소문이 한두번째냐고 태연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은 스캔들에 휘말려 있던 총리 투모카프가 갑작스레 행방불명이 된 건 오르마즈가 연금에서 풀려난 직후의 일이었다.
가족들을 몰살시켰던 코나 시디크의 행방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며 싱글벙글하던 그는 어느 날 십여명의 경호원, 그리고 배우자인 줄리안과 함께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투모카프가 다시 발견된 건 실종되고 30일 가까이가 지난 후, 대사막의 한적한 도로변 와디 부근이었다.
우기로 잠시 물이 불었던 와디에서 모래가 쓸려가면서 드러난 그의 썩은 시체는 배가 갈라진 채 온통 내장이 드러나 있었고, 손발은 굵은 철사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함께 발견된 줄리안 경이나 경호원들의 시신이 단칼에 급소를 찔려 죽어있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웬만큼 흉한 시신은 다 다루어 본 근위대조차도 그 끔찍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릴 지경이었다.
범인은 비록 잡히지 않았지만, 그가 지난 며칠간 계속 ‘코나 시디크 년의 머리끄댕이가 보여’라며 떠들고 다녔던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가 코나 시디크의 잔당 손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투모카프의 성공과 함께 제국 제일의 귀족가로 발돋움하는 듯 보였던 ‘자이센 가’는 이제 그의 미덥지않은 장남 슈막 자이센, 슈트란 가에서 갓 시집온 며느리 네베드의 손에 넘어가면서 또다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